158화
식사가 끝나자 뒷정리를 끝낸 네 사람은 로엔을 제외하고 번갈아 가며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로엔도 같이 하겠다고 했지만, 다음 날 말을 타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네 사람 모두 반대했다.
어쩔 수 없이 불침번 순서에서 빠진 로엔은 미리 깔아 놓은 모포에 몸을 뉘었다.
첫 번째 불침번 순서가 라이칸인 듯, 모닥불 옆에 쭈그리고 앉은 그가 나뭇가지를 던져 넣었다. 그러자 모닥불의 온기가 로엔이 있는 곳까지 흘러들었다.
그때, 진이 로엔의 옆에 몸을 뉘었다. 그리곤 팔을 내밀더니 그녀를 바짝 끌어 그의 품 안에 당겨 안았다.
괜스레 주변 시선이 신경 쓰여 눈을 굴리자, 진이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모포를 끌어다 그녀의 목까지 잘 덮어 주었다. 순식간에 따뜻한 온기가 로엔을 감쌌다.
바닥은 딱딱했고 사방이 트여 있었지만 진과 함께 있어서인지 안락하게 느껴졌다. 그리곤 불침번을 서겠다는 야무진 포부와는 달리, 순식간에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는 소리만 들리고 함께 옆의 있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로엔이 눈을 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넣던 진이 로엔 쪽으로 고갤 돌렸다.
“깬 모양이군.”
로엔이 고갤 끄덕이곤 진에게 시간을 물었다.
“몇 시쯤 됐어요?”
“아직 동이 트려면 2시간은 있어야 해. 피곤할 테니 너는 더 자도록 해.”
진이 다가와 로엔을 눕힌 다음 따뜻한 모포를 덮어 주었다.
“일어나고 싶어요. 더는 잠도 오지 않을 것 같고.”
잠시 고민하던 눈치더니 이내 진이 고갤 끄덕였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선 로엔이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모두 곯아떨어졌는지 주위는 고요했다.
“주변을 살피러 가야 하는데, 같이 갈까?”
“좋아요. 같이 가요.”
로엔이 모포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이라 날씨가 차. 이걸 걸치는 게 좋겠군.”
진이 양털로 만들어진 커다란 숄을 로엔의 어께에 걸쳐 주었다. 어깨부터 종아리까지 오는 길이라 양털에 뒤덮인 느낌이었다.
조금 과한가,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진의 말처럼 새벽 공기가 차 그냥 있기로 했다.
“고마워요.”
“그럼 갈까?”
진이 로엔의 손을 잡고 앞장서 걸었다. 어둡던 숲에 새벽빛이 스미고 있었다.
“폐하가 움직일까요?”
“그는 의심이 많은 자야.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어쩌면 네가 말한 씨어라는 자의 말도 마지막 순간까지 의심에 의심을 거두지 않을 테고.”
로엔은 접견실에서 마지막 순간 에드윈이 제 흉터에서 손을 거뒀던 게 떠올랐다. 진의 말처럼 씨어를 완전히 신뢰하는 것 같진 않았다.
‘만약 황제와 씨어라는 자 사이에 의심을 불어넣는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황제의 협박에서 자유로워질 방법을 쉽게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억나요? 건국기념일 축제에서 만났던 그 주술사 노파요.”
“기억나. 독특한 구슬을 가지고 있었지.”
“지금 생각해 보니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들어진 구슬이었던 것 같아요.”
“근거는?”
“전에 고서에서 호리우스의 눈에 관해 본 적이 있어요. 호리우스의 눈이 진실을 보는 힘이 있다고 알려지긴 했지만, 그 순간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알려져 있진 않거든요. 그러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비서에 주술사 노파가 들고 있던 것과 같은 형태의 구슬 그림을 보았어요. ‘진실의 눈은 모두를 담을 수 있는 원이다.’ 옆에 써 있던 글귀였고요.”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고 보니 그 주술사가 그랬었던 것도 같군. 파수꾼이 눈을 뜰 때 만나게 될 것이라고.”
로엔이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사실 지금까지 그 주술사의 행방을 쫒고 있었는데, 그만두려고요. 찾지 않아도 때가 되면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특히 에드윈이 라딘의 서를 찾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때, 진이 로엔의 손을 힘주어 꼭 쥐었다. 놀라 고갤 드니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끝이 떨렸던 모양이다.
“서재에서 너에게 했던 말,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새벽 공기를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선 끝없는 신뢰가 느껴졌다. 로엔은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로엔의 머릿속엔 대신관이 말했던 신탁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타라의 연이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는.
그래서 로엔은 제 타라의 연을 진에게 줄 수 없었다. 세실의 말에 진에게 타라의 연을 줘야 할까, 고민했었지만 결국 건네지 못했다.
신탁이 말한 불길한 예언. 그것을 가진 자에게 위험이 닥칠 것 같아 오히려 진의 눈에 띄지 않게 타라의 연을 꼭꼭 숨겨 놓았다.
“내일이면 게르피온 국경을 넘게 될 거야.”
“게르피온은 아드리안과는 다르겠죠?”
진은 전쟁터에서 보았던 게르피온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강인했다. 적국의 기사로 만나지 않았다면 그들의 끈기와 투지에 감탄했을 터였다. 그리고 제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또한 그들은 타국인들을 경계했다.
“폐쇄적인 성향이 강하더군. 하지만 걱정할 건 없어. 정복 전쟁에서 아드리안 제국이 승리한 이상, 우릴 함부로 대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최대한 은밀히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게르피온의 국왕 역시 라딘의 서에 관심이 많다는 첩보를 받았거든요.”
로엔 역시 전적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두 사람은 작은 호수 앞에 도착해 있었다.
“어, 이건…….”
순간 로엔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호수 때문에 놀란 게 아니었다. 호수 주변에 핀 새하얀 꽃 때문이었다.
채 사라지지 못한 달빛과 새벽의 여명을 동시에 받은 새하얀 꽃들은 마치 별들을 뿌려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너에게 보여 주고 싶었어.”
로엔은 진이 있는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제야 어젯밤 일행과 따로 자자는 말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깨달았다.
꼭 성적인 뜻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니라 로엔에게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이고.
“아름다워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고마워요, 볼 수 있게 해 줘서.”
로엔이 발끝을 들어 진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뜨거운 입술이 차가운 진의 뺨에 닿자, 놀란 듯 어깨가 흠칫대는 게 느껴졌다.
그의 반응에 로엔은 재빨리 몸을 물렸다. 하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서기도 전에 팔이 붙잡혔고 순식간에 그의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흣.”
숨 쉴 틈도 없이 진의 입술이 맞물려 왔다. 진은 허기진 맹수처럼 로엔의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을 찢어발길 듯 삼켰다.
로엔이 몸을 떨며 그의 팔을 붙잡자, 거칠게 입술을 핥아 올리던 그가 그녀를 달래듯 느릿느릿 움직였다.
“하아, 진…….”
간지럽고 달콤한 열기를 참지 못하고 로엔이 그를 불렀다. 진은 이름을 부르기 위해 열린 틈새로 뜨거운 혀를 밀어 넣고는 깊숙이 파고들었다.
방향을 바꿔 가며 격렬한 키스가 계속되었다. 습윤한 공기 안에 두 사람의 질척한 열기가 스며들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아 서로의 숨결을 삼키는 행위는 절박하게 느껴졌다. 서늘한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로엔은 저도 모르게 허릴 비틀며 야릇한 열기를 쫓아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진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바지를 입고 있는 로엔의 아랫배에도 단단하고 뜨거운 것이 존재감을 드러내듯 꾹꾹 찔러 댔다.
“제길, 미치겠네.”
진이 로엔에게서 가까스로 입술을 떼곤 열기를 달래려는 듯 로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거친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져 등줄기에 전율이 흘렀다. 채워지지 않는 열기에 감정을 다스려야 하는 건, 진뿐만이 아니었다.
“……해요.”
“……”
로엔의 속삭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진이 천천히 고갤 들었다.
로엔은 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호수 안쪽, 그러니까 숲의 더 깊은 곳으로 무작정 그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로엔, 진심이야?”
그녀에게 끌려가는 사이, 로엔의 의도를 알아챈 진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우리, 해요. 불을 지폈으면 책임을 져야죠.”
짐짓 원망이라도 하듯 로엔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건 제 눈에 콩깍지가 씐 탓인 듯했다.
“하지만 몸에 무리가 갈 거야. 하루 종일 말을 타야 하니까.”
진이 한 가닥 남은 이성을 붙잡으며 설득하려 들었다. 그러자 로엔이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겁쟁이.”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널…….”
“그러니까, 해요. 딱 한 번만. 이렇게 매달리는데도 거절할 건가요?”
진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당연히 거절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로엔이 이렇게 매달리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녀를 갖고 싶어 안달이 난 건 그였으니까.
무엇보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와 함께 있고 싶다고 사정까지 하는 모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제 존재감을 드러내며 커질 대로 커진 제 하체는 더는 통제가 불가능했다. 짐승처럼 들러붙고 싶어 머릿속이 쥐가 날 정도였다.
“제길! 후회해도 이젠 몰라.”
진이 거친 숨을 내쉬며 로엔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곤 새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 무덤 사이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