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아드리안 제국을 떠나온 지 벌써 사흘.
다행히 여행은 순조로웠다. 깨끗한 여인숙에서 잠을 청한 뒤, 6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는 말을 달렸다.
운이 좋은 날엔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도 했지만, 사흘 중 이틀은 나무 그늘에 앉아 아침에 준비해 온 빵과 간단한 음료로 식사를 대신했다.
하루 종일 말을 달린 후엔 여인숙에 도착해 밥을 먹은 뒤, 편한 침대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로엔은 진이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말을 타는 건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저녁을 먹고 대충 씻은 다음, 침대에 머리만 대면 새벽이 될 때까지 곯아떨어지는 걸로 보아 진의 말이 영 틀린 건 아닌 듯했다.
“로엔 님, 오늘은 거리 때문에 이 숲에서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점심을 먹는 동안 지도를 골똘히 내려다보던 안톤이 로엔에게 다가오더니 난처한 얼굴을 했다.
남자들이야 대충 바닥에 모포를 깔고 하루쯤 노숙을 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한 번도 험한 일을 해 보지 않았을 로엔이 걱정되는 눈치였다.
“걱정할 것 없어, 안톤. 여행을 시작하면서 늘 편할 것이라고 기대한 건 아니라. 오히려 밤하늘을 올려다볼 기회를 갖게 돼서 즐거울 것 같기도 하고.”
로엔의 말에 안심한 듯 안톤이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다시 말을 달렸고, 어둑해질 무렵 숲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은 강이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자릴 잡고 야영을 할 준비를 했다.
라이칸과 세이지가 능숙하게 음식을 조리하는 동안 로엔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달린 말들을 강으로 데려가 물을 먹였다.
말들이 달게 물을 마신 뒤 숲 근처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는 걸 보고서야 로엔은 신고 있던 가죽 부츠를 벗었다. 면으로 된 양말까지 벗자 조금 살 것 같았다.
로엔은 시원해 보이는 강을 보다 유혹에 이기지 못하곤 발을 담갔다.
“하아, 살 것 같다.”
만족스러운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오늘은 어젯밤처럼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지 못할 테니, 이렇게라도 하루 동안의 피로를 풀어 줘야 할 것 같았다.
첨벙, 첨벙.
로엔은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물장구를 쳤다. 물이 튀자 바지가 젖지 않게 종아리까지 바짓단을 끌어 올렸다. 저물어 가는 석양빛에 새하얗고 모양 좋은 종아리가 드러났다.
“여기에 있었군.”
뒤에서 들려온 진의 목소리에 로엔이 고갤 돌렸다. 진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게 보였다.
석양빛이 그의 뒤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로엔은 역광으로 음영이 진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금단 현상인가?’
사흘 동안 그와 손도 잡지 못했더니, 그가 몹시도 고팠다. 로엔은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식사 준비가 다 끝난 모양이네요.”
로엔이 물에서 발을 빼내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젖은 발을 닦으려는데, 진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더니 손수건을 가져갔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로엔의 젖은 발을 붙잡아 물기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밤엔 간단히 씻을 수 있을 거야. 숲 안쪽에 작지만 꽤 괜찮은 호수를 발견했거든.”
로엔의 뺨이 뜨거워졌다. 마치 그 말이 모두가 잠든 밤에 두 사람만 함께 있을 장소가 있다고 유혹하는 것처럼 들려서다. 정말 중증인 모양이다.
로엔의 시선이 진의 입술로 향했다. 물기를 닦아 낸 그가 어느새 양발을 제 발에 신기고 있었다.
“그만 쳐다봐.”
로엔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슬쩍 고갤 돌렸다. 진 역시도 제 눈빛 속에 담긴 열기를 읽은 모양이었다.
“안톤과 어딜 다녀온 거예요? 함께 나가던데.”
“주위에 위험한 곳이 있나 살펴봤어. 숲이라 산짐승이 있을 수도 있고, 또 뒤따르는 자가 숨을 수 있는 장소도 살필 겸.”
진의 말에 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추적자가 있다는 뜻인가요?”
“아니, 아직은 없어. 하지만 에드윈이 한 달 동안 우릴 가만히 놔둘 리는 없을 테니,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뿐이야.”
“아, 그렇겠네요.”
“씨어라는 자에 대해서 알아낸 정보는 없나?”
“아직이요. 랑케의 정보원을 모두 동원해 샅샅이 훑고 있긴 한데, 특별한 건 없어요. 200년 동안 음지에 숨어서 황실을 도와왔다는 것 외엔. 사실 정체를 드러낸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그게 10년 전이었어요.”
“10년 전?”
진이 고갤 들었다.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걸로 보아,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당신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네요. 정말 씨어라는 자가 부모님의 사고와 연관이 있는 걸까요?”
“지금껏 숨어 있다가 정체를 드러낸 시기를 따져 봤을 땐, 가능성이 없진 않을 것 같군. 시기가 너무도 절묘하잖아. 그리고 그 후로 황제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너를 죽이려 한 시점과도 맞물리고.”
진의 지적에 로엔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에드윈과는 어렸을 때부터 크게 접점이 없었지만, 선대 황제와는 달랐다.
사고가 있기 전까지 선대 황제는 사교 모임에서 볼 때마다 제게 다가와 살갑게 말을 건네곤 했었다. 로엔 역시도 황제의 다정한 태도에 특별해진 느낌이었고.
하지만 사고가 있고 흉터로 가득한 몸으로 황제와 대면했을 때, 차갑게 식은 그의 눈빛을 보며 온몸이 떨렸었다.
그래도 조금은 믿었었는데, 그 믿음에 여지없이 밀쳐지는 느낌이었다.
“다 됐군.”
“고마워요.”
어느새 가죽 부츠까지 신겨진 제 발을 내려다보며 로엔이 고마움을 전했다.
“고마우면 상을 주든가.”
“상이요?”
로엔이 고갤 들자 진이 슬쩍 고갤 숙여 왔다. 보상으로 입을 맞춰 달라는 뜻 같았다.
습관처럼 눈을 감고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처음 제 흉터를 보이지 않기 위해 했던 습관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이젠 할 필요도 없는데.’
로엔이 살짝 턱을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순간 진의 눈꺼풀이 순식간에 밀려 올라가며 신비로운 은청색의 눈동자가 눈을 마주쳐 왔다. 그리곤 그의 커다란 손이 로엔의 뒷덜미를 감싸 쥐곤 고갤 숙여 왔다.
순식간에 서로의 입술이 자릴 찾듯 맞물렸다. 사흘 동안 키스는커녕 손도 잡지 못해서인지 불꽃은 너무도 빨리 발화했다.
“흐음.”
입술을 비집고 나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진이 방향을 바꿔 가며 농밀하게 혀를 얽어 왔다. 맞물렸다 떨어지는 질척한 소리가 어둠이 내려앉은 공기를 뜨겁게 달궜다.
진의 팔이 익숙하게 로엔의 허릴 감고는 족쇄처럼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곤 뜨거운 욕망으로 욱신거리는 몸을 밀착시키곤 당장에라도 몸을 겹칠 듯 문질러 댔다.
아랫배에 닿는 그의 단단한 하체가 너무도 적나라했다. 그제야 로엔은 제가 입은 바지 때문에 평소와 달리 그의 존재를 더 확실히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하아, 제길!”
진이 욕설을 뱉어 내며 입술을 뗐다. 그리곤 제 품에 로엔을 가두듯 안더니, 어둠 속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당장 꺼져, 세이지.”
그제야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저녁 식사 준비가 다 되었는데도 두 사람이 오지 않아 세이지가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욕망에 눈이 먼 두 사람이 짐승처럼 입술을 맞댄 걸 본 걸 테고.
순식간에 온몸에 홧홧해졌다.
“제발 애정 행각을 하려면 지붕도 있고 벽도 있는 곳에서 하라고. 눈 돌릴 데도 없는 곳에서 하지 말고.”
세이지 역시 본의 아니게 그런 광경을 목격한 게 썩 달갑지는 않은 눈치였다.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하곤 서둘러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피해 죽을 것 같아요.”
“나쁜 일을 한 것 아닌데, 그럴 필요 없어. 아니면 조금 전에 본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혼쭐을 내 줘도 되고.”
진의 말에 로엔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흘렸다.
가끔 보면 진 로이슈덴에겐 부끄러움 같은 건 없는 듯했다. 처음이 어려웠지, 애정 표현에도 스스럼이 없었고 사랑을 나누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그냥 둬요. 괜스레 원망만 들을 것 같으니까.”
로엔의 말에 진이 다시 로엔의 턱을 붙잡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둘만 다른 곳에서 자고 올까?”
입술에 턱에, 급기야는 귓불을 물고는 아릿하게 빨아 당기며 유혹을 해 온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나른한 전율에 로엔은 정신없이 허물어지려 했다.
“응? 사흘이나 떨어져 잤잖아.”
떨어져 자다니. 두 사람은 사흘 동안 한 침대에서 딱 들러붙어서 잤다. 단지 너무 피곤해 로엔이 잠이 들어 버리는 바람에 다른 것들을 못 했을 뿐.
아마 떨어져 잤다는 말은 몸을 겹치지 못했다는 말인 듯했다.
로엔은 조금 전 세이지가 떠나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발 애정 행각을 하려거든 지붕과 벽이 있는 곳에서 하라고 경고했었다.
진의 말처럼 숲에서 두 사람만 따로 밤을 보내게 된다면, 분명 유혹을 참지 못하고 서로 몸을 겹칠 터였다.
그리고 그가 주는 쾌락에 신음을 참을 수 없을 테고, 숲에 있는 모든 것들이 두 사람이 밤새 뭘 하는지 알고도 남을 터였다.
“오늘은 안 돼요. 다음에, 그러니까 지붕도 있고 벽이 있는 곳에서 해요.”
로엔이 가까스로 그의 유혹을 떨쳐 내듯 말했다. 그리곤 허리에 감긴 그의 팔을 떼어 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또 잠들면?”
“그땐 깨워요. 꼭 일어날 테니까.”
로엔의 약속을 듣고서야 진이 아쉬움을 털어 내며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