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아드리안 제국의 국경을 넘은 직후, 로엔 일행은 국경 근처에 있는 여인숙으로 향했다.
게르피온행이 결정된 후, 신분을 검사하기 위해 국경의 처소를 방문할 때를 제외하고 로엔과 진은 말레 상단의 일원으로 여행을 할 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빠르게 움직일 최선책이었기 때문이다.
로엔은 서둘러 방 하나를 잡고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국경을 넘기 전까지 답답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벗자 좀 살 것 같았다.
편하게 여행 준비를 마친 로엔은 방 안에 있는 거울을 통해 제 모습을 점검했다.
드레스를 벗고 품이 조금 넉넉한 남자 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로엔의 모습은 호리호리한 소년처럼 보였다. 풍성한 머리까지 질끈 묵고 나자 영락없이 미소년 폼이었다.
방을 나와 1층에서 점심 식사 중일 일행에게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중간쯤 내려갔을 때, 로엔은 진을 찾기 위해 고갤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때마침 위를 올려다보던 진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진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조금 놀란 듯 로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머리에서부터 시작해 셔츠와 바지 차림까지 천천히 훑어 내렸다.
그리고 다시 그의 시선이 로엔의 얼굴로 돌아올 때까지 로엔도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계단에 서 있어야만 했다. 그의 눈빛이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여깁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라이칸이 로엔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로엔은 진의 시선에서 벗어나 계단을 내려올 수 있었다.
“식사는 미리 주문해 놓았습니다.”
“고마워, 라이칸.”
로엔이 인사를 건네곤 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맞은편에 자릴 잡고 앉았다. 그때까지 진은 말없이 로엔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이상한가?’
그의 시선에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로엔은 태연한 척했다. 그리곤 라이칸이 내민 물 컵을 받아 들곤 목을 축였다.
“뭐야? 완전 꽃미남인데?”
세이지가 남장 차림의 로엔을 보곤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게르피온행에 세이지가 함께 가기로 결정된 뒤, 로엔은 제 정체를 세이지에게 밝혔다.
록스버그 공작가의 서재에 어색하게 앉아 있던 세이지가 진과 함께 나타난 로엔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베일을 벗은 모습이 만물상점을 운영하는 시모네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세이지, 잘 들어. 지금 여기 있는 시모네타가 내 신부가 된 록스버그 공작이다.」
진이 앞뒤 설명을 다 잘라 낸 뒤 사실만을 전했다.
로엔은 황당한 표정으로 어리둥절한 채 서 있는 세이지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진의 단호하고 냉정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라면 그의 성격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겠지만, 그때는 조금 달랐다. 약간의 부연 설명이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로엔은 서둘러 그간의 사정을 세이지에게 말했다.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는 빼고 나머지 사실을 다 말하고 나자, 세이지는 납득이 된 듯 고갤 끄덕였다.
「다행이야. 사실 우리 대장이 시모네타 님도 꽤 마음에 들어 했거든. 그래서 나중에라도 바람이 나, 두 사람 사이에서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고. 그런데 같은 사람이었다니. 이젠 그런 일이 일어날 걱정은 할 필요 없겠어.」
세이지의 말에 로엔은 웃음을 터뜨렸고, 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진 역시 시모네타와 로엔이 같은 사람이란 걸 알기 전까지 세이지의 말처럼 당혹스러웠던 상황이 있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얼굴이었다.
「사실 이제 와 하는 말인데, 어렴풋이 짐작은 했었어. 우리 대장이 지고지순형이라 두 여자를 마음에 품을 사람이 아니거든.」
「알고 있었다고요?」
「응. 하지만 걱정 마.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좀 감이 빠른 편이거든. 그리고 말투며 특유의 습관이 똑같더라고. 손짓이라든가 당황했을 때 보이는 반응 같은 것.」
로엔은 세이지의 예리한 관찰력에 다시 한 번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세이지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자, 로엔은 한결 가벼운 마음이었다.
전엔 모든 걸 철저히 숨겨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주위 사람을 믿고 제 비밀을 털어놓자 뒷배라도 생긴 듯 안정감이 찾아 들었다.
“대장, 왜 아무 말도 없어? 마음에 안 든 거야?”
세이지도 갑자기 말이 없어진 진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로엔 역시도 세이지의 목소리에 회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진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고갤 들자, 진이 아무런 말도 없이 로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
침묵이 계속되자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세이지가 다시 한 번 진을 불렀다. 그제야 진은 정신이 든 듯 제 앞에 놓여 있던 물 컵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목이 타는 듯 거침없는 행동에 로엔은 의아해졌다. 그러다 슬쩍 시선을 피하듯 고갤 돌리는 진의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로엔을 비롯해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세이지와 라이칸에게 그의 옆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수줍게 붉어져 있는 귓불도 함께 보였다.
그제야 세이지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뭐야? 마음에 안 든 게 아니라, 눈을 못 뗀 거였어? 귀까지 붉힐 만큼?”
세이지가 혼잣말처럼 ‘대체 무슨 상상을 했기에 그러는 건데?’라는 말을 뱉어 냈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 모두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때, 탁! 소리와 함께 진이 물 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서늘하다 못해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세이지를 쏘아보았다.
“입 닥치고, 밥이 나 먹어.”
당장 입 다물지 않으면 들고 있는 물 컵을 세이지에게 던질 기세였다.
“알았으니 진정하라고.”
꼬리를 내릴 때라는 걸 알았는지 세이지가 재빨리 한발 물러섰다.
때마침 식사가 준비되어 여인숙의 종업원이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차례차례 두 개의 테이블에 접시가 내려졌다.
로엔은 안톤이 보이지 않는 게 생각나 문 쪽으로 고갤 돌렸다.
“안톤 님은 로엔 님이 타고 오신 마차를 처분하고, 타고 가실 말을 구하러 나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여행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마차 대신 말을 타는 것도 이미 결정된 사항 중의 하나였다.
그때, 문이 열리고 안톤이 안으로 들어왔다.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보곤 그들이 저를 기다렸다는 데 생각이 미쳤는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시장하셨을 텐데, 먼저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니야. 지금 나왔어. 얼른 앉아.”
로엔의 말에 안톤이 라이칸 옆에 자릴 잡고 앉았다.
비로소 일행 다섯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단출했지만 모두 다 각 분야의 실력자들이라 다시없을 최고의 조합이었다.
이내 식사가 시작되었다.
“목적지가 게르피온의 북쪽 마을이라고 했었나?”
진이 접시에 있던 고기를 집어 로엔의 개인 접시에 올려 주며 안톤을 향해 물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진에게 향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로엔 앞에 물 컵을 건네주는 진의 행동에 세이지를 비롯해 라이칸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뭐야, 닭살 돋게.”
세이지가 소름이라도 돋는다는 듯 팔을 문지르며 진과 로엔을 번갈아 보았다.
그제야 로엔이 진에게 눈치를 주며 그만하라는 듯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이 눈치 없는 남자는 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부지런히 로엔의 접시로 음식을 가져다 나를 뿐이었다.
“얼른 먹어. 여행을 하려면 체력이 있어야 할 것 아냐. 그런 가느다란 몸으로 말이나 제대로 탈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냥 마차로 이동하는 것도…….”
“진, 약하긴 누가 약하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전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아직도 그걸 깨닫지 못한 건가요?”
로엔이 거듭되는 진의 잔소리에 마땅찮은 얼굴을 했다.
그가 걱정을 해 주는 건 고마웠지만, 그런 관심이 사실 조금 부담스러웠다. 한 번도 이런 무방비한 애정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알았으니 얼른 먹어.”
진이 실랑이 대신 또다시 그녀의 접시에 음식을 올려놓았다.
탑처럼 쌓아 올려진 음식을 보며, 로엔은 포기한 듯 포크를 부지런히 놀렸다. 경험상 음식을 최대한 빨리 먹어 치우는 게 났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흠흠. 네, 첫 번째 목적지는 북쪽 마을입니다. 그곳이 사막과도 가깝기도 하고, 얼마 전 랑케의 정보망을 통해 어떤 자가 대장간에 특이한 물건을 주문하려 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우선 거기부터 시작해 볼 생각입니다.”
“특이한 물건이란 건, 호리우스의 눈으로 된 뭔가겠군.”
“그렇습니다.”
안톤의 순순한 대답에 진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음식을 씹어 삼켰다.
“사막이면, 우리가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헤르파를 말하는 거지?”
세이지의 말에 진 대신 안톤이 고갤 끄덕였다.
“맞습니다. 헤르파 사막 근처의 마을입니다.”
“거기라면 대장과 내가 잘 알지. 우리가 그곳에서 2년을 보냈거든. 내 손바닥만큼이나 잘 아는 곳이라고. 그렇지, 대장?”
“맞아. 그러니 그곳으로 이동한 후엔 따로 길잡이를 구할 필요는 없을 거야.”
진의 말에 안톤이 눈에 띄게 반가운 얼굴을 했다.
“다행입니다. 사실 게르피온인들은 정복 전쟁이 끝난 뒤론 아드리안 제국인들과 거래를 기피하는 경향이 생긴 터라,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안내자를 찾는 게 쉽지 않거든요. 특히 헤르파 사막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지형이 워낙 많이 바뀌어서 잘 아는 현지인도 많지 않고요.”
게르피온행이 결정되고 헤르파 사막의 지형에 대해 잘 아는 자를 물색 중이었지만 지금까지 마땅한 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구한 지형도 역시 정확한지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헤르파 사막에 대해 잘하는 이가 두 명이나 있다니. 이건 천운이라고밖엔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식사가 끝났으면 출발해 볼까요? 최대한 시간을 아끼는 게 목표라.”
로엔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들 역시 얼른 식사를 끝마치곤 따라 일어섰다.
계산을 끝내고 여인숙을 나오자 일행이 타고 갈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뒤론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실은 말들 역시 매어져 있었다.
말에 오른 일행은 지체 없이 게르피온의 북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저녁이 되기 전에 도시 근처의 여인숙에 도착하기 위해선 서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