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진, 대신관이 했던 말 기억해요? 제게 내려졌다는 신탁이요.”
“기억은 나. 그중에 뭔데?”
“호리우스의 눈으로 된 원통형의 물건이요.”
“생각나. 그게 불운을 가져온다고 했었지, 아마?”
“맞아요. 폐하가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인 것 같아요. 라딘의 서를 찾는 열쇠요. 저보고 게르피온으로 가라더군요. 끝없는 펼쳐진 사막의 끝에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로엔의 말을 듣고 있던 진은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듯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고갤 들었지만,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상하군.”
“뭐가요?”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알면서, 왜 너에게 굳이 찾아오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가서 직접 찾으면 그만일 일이잖아.”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당신 말처럼 폐하께서 직접 찾으면 되는데, 왜 굳이 나였을까요? 이건 마치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고 말하는 것 같잖아요.”
어……?
생각 없이 뱉어 낸 말이었지만, 뱉고 나니 아주 그럴듯했다.
정말 제 짐작대로 그런 이유라면, 에드윈과 씨어라는 주술사는 장소를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지금까지 찾지 못한 것이 이해되었다.
“로엔, 그때 대신관이 정확히 뭐라고 했었지?”
진의 물음에 로엔은 대신관이 했던 말을 떠올리려 애썼다.
타라 여신의 축원 의식이 끝나고 기도실을 나왔을 때 대신관은 또 다른 신탁에 대해 말했고, 왜 그 신탁이 이번에도 저라고 생각하는지 묻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었다.
「타라의 연 때문입니다. 공작새가 달린 타라의 연이 또 보였거든요.」
「그리고 또 뭘 보셨죠?」
「피였습니다.」
「피?」
「네. 누구의 것인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타라의 연에 매달린 공작새에 피가 흥건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도 보였습니다.」
「이건 그 형태가 불분명하긴 한데, 동그란 원통형의 물건이었습니다. 호리우스의 눈으로 된 물건인 건 확실한데, 복잡한 주술이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혹시 그런 물건을 가지고 계십니까?」
“대신관은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들어진 동그란 원통형의 물건이라고 했어요.”
로엔은 타라의 연에 묻어 있었다던 피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의뢰를 했으니, 기한을 정해 주었겠지?”
“한 달이요. 한 달 후에 황궁으로 오라고 하더군요.”
한 달이라니. 그 시간 동안 게르피온까지 가서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를 찾은 뒤, 다시 아드리안으로 돌아와야 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서둘러야겠군.”
“사흘 안에 떠날 생각이에요. 라이칸에게 지시를 해 놓은 상태고요.”
진은 조금 전 복도를 지나치며 묵례를 하던 라이칸을 떠올렸다.
분명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는데, 아마 이것에 대해 말하려 했던 모양이다.
“혹시 라이칸도 알고 있나? 황제가 널 암살하려고 했던 배후라는 걸.”
로엔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그에게 더는 감출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다행이군. 적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어서.”
황제는 그동안 로엔을 죽이라며 수차례 암살자를 보냈다.
지금까진 뒤에 숨은 배후였지만, 만약 황제의 정체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면 아드리안 제국은 물론 타란 대륙 내에는 록스버그 공작가를 비호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얼마 전 정복 전쟁에서 아드리안이 승리한 이상, 타국에선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의 말을 거역하긴 힘들 테니까.
“모두가 록스버그의 적이 될 거야. 타란 대륙에선 숨을 장소도 없을 테고.”
에드윈을 적으로 돌린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로엔 역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드윈이 그런 협박을 했을 테지. 진 로이슈텐을 배반하지 않는다면, 록스버그 공작가 역시 사라질 것이라고.
“걱정 마. 내가 네 편이 되어 줄 테니까.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나야. 아무리 황제가 죽이려 한다고 해도, 내가 있는 한 섣불리 행동하진 못할 거야.”
진의 말에 로엔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일인데, 두렵지 않나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말할 줄은 몰랐거든요.”
“어차피 나는 반역자야.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가 아니라도, 마지막 순간엔 날 빌미로 널 협박하게 될 거야.”
로엔의 입가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에드윈이 어떤 협박을 했는지. 그리고 그 협박 내용을 진에게 말하지 않는 사실도.
진이 손을 뻗어 로엔의 눈가를 쓸었다. 손끝이 부드럽게 뺨에 닿았다.
“그러니 죄책감 같은 건 가질 필요 없어. 네가 아니라도 이미 내 운명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진?”
“이용해. 뭐가 됐든 날 밟고 살아남아. 너에게만 허락해 줄 테니까.”
믿기지 않았다. 그가 뱉어 낸 한 마디 한 마디가 로엔의 심장을 찔러 댔다.
울컥,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아리게 조여 왔다.
왜 그는 이런 순간조차도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을까?
어떻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를 이용하라고 할 수 있을까?
순간 자신이 너무도 저속해 보였다. 그를 속이고 있는 제가 너무도 싫었다.
가문의 저주를 위해 그를 이용하려는 제가.
그리고 그걸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못하고 저울질하는 자신이.
“난…….”
“로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도 돼. 이미 내가 허락했으니까. 뭐가 되었든, 어떤 순간이든 날 마음껏 써도 좋아. 말했잖아. 네 장단에 맞춰 놀아나 주겠다고. 네가 유일한 로이슈덴 공작 부인인 이상 내 모든 건 네 것이다.”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한 번 말할 테니 잘 들어. 네가 원하는 만큼 네 장단에 얼마든지 놀아나 줄 테니, 마지막엔 나에게…….」
로엔은 그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의 입을 막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몰랐었다. 그 말이 갖는 무거운 책임감과 아릿할 만큼 밀려드는 죄책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로엔에게 진이 고갤 숙여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위로하듯 그리고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의 눈가에 그의 입술이 와 닿았다.
파르르 떨던 눈꺼풀이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감겼다. 정말 모든 것에서 눈을 감아도 좋다는…… 허락처럼 느껴졌다.
로엔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곤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진을 향해 낮게 읊조렸다.
“누구 맘대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놀란 듯 진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눈치였다.
로엔은 그런 진을 보며 낮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내가 지켜요. 지금껏 그래 왔고, 앞으로 그럴 거예요. 하지만 당신 한 사람쯤은 내가 지켜 줄 수도 있어요. 록스버그 공작가가 가진 돈과 정보의 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막강하거든요. 한 나라를 쥐락펴락할 만큼.”
처음에 놀란 듯하더니 이내 진의 입가에 미소가 깊어졌다. 그리곤 급기야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시원하게 웃는 그를 보자, 로엔은 묘하게 심장 부근이 간질거렸다. 그리고 안도감이 뒤따랐다.
로엔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안도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뭐든 괜찮다고 했다. 그를 이용해도 상관없다고.
그것이 면죄부가 된 것처럼 로엔은 조금 홀가분해졌다. 이기적이라고 비난받아도 감내할 생각이었다.
“그만 웃어요.”
로엔이 그의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그러자 진이 그녀를 품에 가두듯 안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알았어. 그만 웃을게.”
그리곤 로엔을 내려다보며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눈을 맞춰 왔다.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불이 난 듯 뜨겁고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아참, 폐하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어요. 그때, 대신전에서 본 마차 속의 그 사람이요.”
로엔이 화제를 바꾸듯 씨어에 대해 얘기했다.
진은 처음엔 누군지 알아채지 못하는 듯하더니, 그녀의 설명을 듣고서야 기억이 난 듯 고갤 끄덕였다.
“생각나는군. 누구였지?”
“씨어라고 하더군요. 대화 도중 흘리듯 말하긴 했지만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그자가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과 나의 일도. 사장된 라딘의 서에 대한 것까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자라.”
“제 생각엔 라딘의 혈족인 것 같아요. 그래서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것일 테고.”
로엔의 말에 진 역시도 동의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게르피온으로 간다고 했나? 나도 함께 가고 싶은데.”
진이 로엔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저만 혼자 보내려고 한 건가요? 이미 허가증도 준비시켜 놨는데.”
로엔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진을 보았다.
로엔의 타박에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짙어졌다.
“내 생각이 짧았군. 당연히 같이 가야지.”
서재를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때, 진이 로엔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출발이 사흘 후라고?”
“네. 알렉에게도 미리 전갈을 보내야겠어요. 한 달간 게르피온에 가 있게 될 것이라고.”
커다란 손이 로엔의 등을 느릿느릿 어루만졌다. 그 나른한 감각에 로엔은 저도 모르게 달뜬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게 좋겠군. 그럼 우린 이틀 동안 뭘 하면 되지?”
“딱히 할 건 없어요. 라이칸이 말레 상단의 안톤과 모든 준비를 끝낼 테니까요. 우린 그동안 서고에서 라딘이 서에 대한 자료를 살피는 것 외엔…….”
로엔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태연하게 말하려 애썼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틀 동안 자유란 뜻이군.”
“자유까진 아니지 않을까요? 개인적인 물품은 각자가 챙겨야 하는 것이라…… 어엇!”
하지만 로엔의 평정심은 순식간에 몸이 들리는 느낌에 깨어지고 말았다.
당황한 로엔이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순식간에 로엔은 책상 위에 앉아 진과 마주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