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서재에 서 있던 라이칸이 어두운 표정으로 로엔을 응시했다.
분명 황궁으로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갔을 땐 진 로이슈덴과 함께였다. 하지만 저택으로 돌아올 땐 로엔 혼자였던 것이다.
싸우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사이가 좋았던 것 같은데…….
“한 달이야.”
“그게 무슨?”
“폐하께서 어떤 물건을 찾아 달라고 의뢰하셨어. 기한은 한 달이고.”
라이칸은 아직 이해가 되지 않은 듯 미간을 구겼다.
‘의뢰는 뭐고, 또 기한은 뭔지……. 아니, 그 이전에 폐하가 왜 로엔에게 그런 걸 했는지부터가…….’
순간, 라이칸이 뭔가 감이 잡힌 듯 표정을 굳혔다.
“폐하께서 공작님이 두 개의 신분으로 사셨던 걸 눈치채신 겁니까?”
라이칸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제야 로엔은 지금껏 쓰고 있던 베일을 벗었다. 그러자 얼굴에 붙여 놓았던 인피면구가 아무렇게 떨어져 나가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냥 봐도 억지로 잡아뜯은 테가 났다.
“시모네타란 건 내가 말했어. 하지만 다 알고 계신 건 사실이야.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도, 그리고 내 몸속에 흐르는 혈독화도.”
“그럼 배신자가 있었던 겁니까?”
라이칸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그러자 로엔이 천천히 고갤 가로저었다.
“배신자가 아니었어. 폐하는 그자를 씨어라고 부르더군. 그자가 누군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라딘의 서에 대해 알고 있었어. 그리고 록스버그의 저주도 상세히 알고 있었고. 그자가 폐하 곁에 있는 자야.”
그림자처럼 숨어 황제를 조종하는 자.
“씨어라면, 예언자네요. 200년 전 존더부르크 1세 곁에 있었던 그 예언자처럼.”
“라딘의 서에 대해 자세히 하는 걸로 보아, 그 혈족이 아닐까 해.”
“200년 동안 라딘의 혈족이 존더부르크가 곁에 있었다는 뜻입니까?”
생각 없이 뱉어 낸 말이었는데, 로엔이 대답 대신 고갤 끄덕였다.
믿기지가 않았다. 라딘의 혈족이 살아 있었다니. 그것도 황제의 곁에서.
“그런데 왜 혼자 돌아오신 겁니까? 로이슈덴 공작님은요?”
라이칸의 질문에 로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결국엔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협박을 하셨다. 황제의 편이 설 것인지, 아니면 로이슈덴 공작 곁에 남을 것인지.”
“설마 폐하께서 로이슈덴 공작가를 멸문시키겠다고 하셨습니까?”
“응.”
“제길! 이유가 대체 뭡니까? 지금껏 암살자를 보낸 이유와 같은 것입니까?”
라이칸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그는 제 주인에게 해가 된다면 누구라도 적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황제의 편에 서실 생각이십니까?”
“생각 중이야. 어떤 패가 나에게 유리할지.”
“황제는 10년 동안 공작님을 암살하려던 자입니다. 지금은 로이슈덴 공작님보다 황제가 더 믿기 힘듭니다.”
“나도 알고 있어. 그리고 그의 편에 설 생각도 없고. 하지만 당분간은 황제에게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하거든.”
라이칸은 그제야 납득이 된다는 듯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한 달이란 기한이 주어졌다면, 그때까지 폐하가 원하는 걸 찾지 못할 시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죽겠지.”
“이런, 미친!”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라이칸을 보며 로엔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지금까지 서재에 감돌던 무거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게르피온에 가야 해.”
“폐하께서 찾는 것도 게르피온에 있는 겁니까?”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폐하와 내가 찾는 게 같아.”
“제길! 우리가 찾은 걸 강탈하려는 속셈이었네요. 로이슈덴 공작님께는 뭐라고 말씀하실 생각이십니까?”
“사실대로 말해야지.”
하지만 에드윈이 반역죄를 들어 협박을 했다는 말은 빼야겠지?
진 때문에 록스버그 공작가의 존망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분명 마음이 무거울 테니까.
‘정말 어이없게 이런 순간까지 그를 걱정하다니.’
이젠 제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공작님도 게르피온에 함께 갈 거야.”
“혹시 공작가의 저주에 대해서도 말씀하실 생각이십니까?”
라이칸의 물음에 로엔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 로엔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라이칸을 마주 보았다.
“말하지 않을 생각이야. 어차피 황제가 라딘의 서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는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에만 매달릴 순 없는 노릇이니까. 우선은 황제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아야지.”
“그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당분간은 그와 손을 잡을 생각이야. 그다음 일은 살아남고 나서 생각할 테고.”
그리고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의 몸에서 드래건의 힘만을 봉인해 분리해 내는 방법을.
분명 아버지의 밀서에 따르면 라딘의 제자인 타에라가 라딘의 서와 함께 ‘현자의 돌’을 숨겼다고 쓰여 있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현자의 돌’엔 모든 것의 해답이 있고, 세상의 이치가 쓰여 있다고 했다.
에드윈에게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를 주는 대신, 현자의 돌을 달라고 협상을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록스버그의 저주도, 진 로이슈덴에게도 아무런 위험도 없을 터였다.
그게 안 되면 현자의 돌에 대한 건 철저히 비밀이 붙이면 그만이었다. 절대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만 한다면…….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차피 황제가 의뢰한 물건을 찾는 한 달 동안은 아무 일 없을 테니까요.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사흘 후가 좋겠어. 벤투스와 안톤에게도 전해. 명목은 게르피온의 금광 채굴권과 소금 사막의 교역권을 얻기 위해서 간다고 하면 될 거야. 그 정도 명분이면 국경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거야.”
라이칸이 서둘러 서재를 나가자, 로엔은 서랍에서 거울을 꺼냈다. 그리곤 억지로 잡아뜯긴 인피면구를 깨끗하게 제거했다. 진이 제 일로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다.
“로엔, 로엔!”
얼굴에 붙어 있던 인피면구를 다 제거했을 때쯤,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엔 초조함이 읽혔다.
로엔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제 진 로이슈덴과 대면해야 할 때였다.
* * *
진은 현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스미스에게 로엔의 행방을 물었다. 서재에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그는 바로 서재로 향했다.
복도를 따라 걷고 있는데, 마침 서재에서 나오는 라이칸과 마주쳤다.
진을 발견한 라이칸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꾼 듯 진에게 묵례를 하곤 빠르게 그를 지나쳐 갔다.
그 모습에 진은 더 초조해졌다.
로엔의 이름을 부르며 서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서랍에서 양피지로 된 문서들을 꺼내는 로엔을 볼 수 있었다.
“괜찮아?”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로엔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특별히 달라진 점은 보이진 않았지만, 그것으론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로엔에게 다가가 얼굴부터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별일 없었어요.”
로엔의 말에 진이 고갤 들어 눈을 맞춰 왔다. 진짜냐는 듯이.
“아직 죽일 생각은 없던 것 같아요. 이용가치가 있는 모양인지.”
로엔이 농담조로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진의 표정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대체 뭐라고 했는지 말해.”
분노를 짓씹는 것과는 달리 로엔의 뺨을 쓸어내리는 진의 손길은 섬세하기 짝이 없었다.
로엔은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진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분명 그와 함께 황궁으로 갔을 때까지만 해도 로엔의 얼굴엔 인피면구가 씌워져 있었다.
그런데 저택으로 혼자 돌아온 것도 모자라, 인피면구까지 깨끗하게 제거되어 있었다.
갑갑해 떼어 낼 수도 있었지만 목이며 손목에 붙인 것은 아직 제거하지 않는 채였다. 휴지통엔 거칠게 찢어진 인피면구가 버려져 있었고.
즉 얼굴에 붙인 것만 급하게 떼어 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폐하께서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더군요. 혈독화도, 그리고 혈독화로 인해 제 얼굴의 흉터가 사라진 것도.”
“그래서? 혹시 그 자식이 직접 네 얼굴에 손을 댄 건가?”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폐하라는 호칭 대신 그 자식이라고 욕설을 뱉어 낼 정도로 화가 나 있는 듯했다.
“아니요. 처음에 그럴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마지막 순간에 물러나더군요. 그리곤 저보고 직접 떼라고 했어요.”
진이 담담하게 말하는 로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곤 깊게 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제 품속으로 꼭 끌어당겼다.
“제길!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널 혼자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뒤늦은 후회의 목소리 귓가를 울렸다.
“함께 갔으면 더 험한 꼴을 보였겠죠. 당신을 자극하고 싶어 했을 테니까. 아마 당신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인피면구를 뜯어냈을 거예요.”
로엔의 지적에 진이 안타까운 듯 로엔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 나 때문에 당할 필요도 없는 모욕을 당하다니.”
로엔이 살짝 그를 밀어내며 고갤 들었다. 그리곤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진,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말했잖아요. 폐하가 록스버그 공자가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그리고 그걸 빌미로 나를 협박한 건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내게 원하는 게 있을 뿐이지.”
“원하는 것? 그게 뭐지?”
“폐하께서 라딘의 서를 찾고 계신대요. 그리고 저보고 그걸 찾을 열쇠를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그걸 네가 어떻게 찾아? 뭔지도 모르는데.”
진이 화가 치미는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제가 만물상점을 운영하는 시모네타란 걸 아셨어요. 그리고 만물상점은 의뢰자가 원하는 건 뭐든 구해 주죠.”
“미친!”
진의 입술을 통해 터져 나온 욕설에서 지독한 분노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