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로엔은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키며 여상한 얼굴로 에드윈을 보았다. 굳이 이 부분에 대해서 그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네. 제가 운영하던 만물상점의 의뢰인으로 찾아왔던 터라.”
로엔이 은둔자의 숲에서 만났다는 얘긴 쏙 뺀 채 진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했다.
로엔의 설명을 듣고 있던 에드윈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의 태도로 보아 로엔이 그를 속였다는 것보다, 제가 모르던 사실들을 진 로이슈덴이 먼저 알았다는 것에 화가 나 있는 듯했다.
“만물상점이라면?”
“칼라일에 있는 시모네타의 만물상점입니다.”
“시모네타의 만물상점이라. 그래, 들어 본 적이 있다. 의뢰한 것이 무엇이든 다 구해다 준다고 했던 것 같군. 나도 그 소문을 듣고 의뢰를 해 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지. 제길!”
마지막에 뱉어 낸 욕설은 그 생각을 실천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후회인 듯 보였다. 그랬다면 진보다 먼저 로엔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을 것이라 여긴 모양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만약 에드윈이 만물상점에 찾아왔다고 해도, 절대 그에게 제 신분을 밝힐 생각 따위 없었으니까.
그리고 에드윈은 저를 10년 동안 죽이려 했던 배후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제 행동은 까맣게 잊은 듯 행동하고 있었다. 그 부분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로엔은 다시 한 번 진에 대한 에드윈의 경쟁심을 똑똑히 실감하며,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모든 것을 손에 쥔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 에드윈 존더부르크는 절대 진 세인트 루이스 로이슈덴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대 말은 진이 의뢰인으로 상점에 찾아왔고,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그대의 정체를 들켰다는 것이군. 그래서 그대의 청혼에 동의한 것이고.”
단서를 하나 툭 던진 것뿐이었는데, 에드윈은 음유시인처럼 스스로 이야기를 짜 맞췄다.
로엔은 굳이 그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변명거리를 만들어 주었으니, 그 장단에 맞춰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네.”
“제길, 아버지의 말이 아니라 씨어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
로엔은 억울한 듯 욕설을 뱉어 내는 에드윈을 응시했다.
‘씨어라고?’
화가 나 뱉어 내는 말 속에서 로엔은 에드윈이 말했던 측근의 이름이 씨어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다행히 에드윈은 제가 씨어의 이름을 말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듯 보였다.
씨어라.
그자는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는 물론 금기된 주술까지도 모두 알고 있는 자였다. 거기다 진이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것까지도 알고 있었고.
대체 씨어란 자는 누굴까?
“록스버그 공작, 그대도 기억하고 있겠지? 처음엔 우리 두 사람 사이에 혼담이 오갔다는 사실을 말이야.”
혼담이라고?
그게 언제 적 얘기인데 이제야 그 말을 꺼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대 황제폐하께서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순수하고 고귀한 황가의 피가 저주받은 록스버그의 피로 더러워질까 봐 로엔과의 결혼을 거절했었다. 그 역시 그 생각에 동의했고.
하지만 씨어만은 록스버그 공작과의 결혼을 밀어붙였었다.
에드윈은 햇살 아래 드러난 로엔의 아름다운 얼굴을 다시 한 번 홀린 듯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미모였다. 그래서 욕심이 났다.
제 것일 수 있었는데.
아니, 제 것이었다.
들끓는 탐욕이 그를 뒤흔들었다.
그 순간 신비한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마주치자, 마음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어두운 감정이 또다시 일렁거렸다.
‘빼앗고 싶다. 진 로이슈덴에게서 로엔 록스버그를 빼앗고 싶어.’
제가 가질 수 없다면 기어이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로엔은 에드윈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추악한 감정을 읽고는 몸을 굳혔다.
역겨움이 밀려와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제 본 얼굴을 보자마자 탐욕으로 일그러진 에드윈의 얼굴은 악마처럼 보였다.
“로엔 록스버그? 아니, 이건 만물상점의 주인인 시모네타에게 의뢰를 해야겠군.”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의뢰라니.
로엔은 그의 제안을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당장 접견실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황제의 명령 없이 자릴 뜰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의 의뢰를 거부할 수도 없을 터였다.
‘미치겠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를 가져오라.”
순간 로엔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사실 그가 의뢰라는 말을 껴낸 순간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줄은 몰랐다.
진실을 숨긴 채 돌려 말할 줄 알았는데. 그에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 뭔가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폐하, 만약 제가 폐하의 의뢰를 들어 드릴 수 없다고 한다면…….”
“진 로이슈덴 공작은 반역죄로 죽게 될 것이다.”
“반역죄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뻔히 알고는 있었지만 최대한 순진한 얼굴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에드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릿하게 웃더니, 마치 은밀한 얘기라도 하듯 살짝 고개까지 숙여 왔다.
“네가 모르는 진 로이슈덴의 비밀 하나를 말해 주겠다.”
에드윈은 로엔의 아름다움에 홀려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을 입에 올렸다.
“네가 아는 진 로이슈덴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 살아남은 자다. 그대도 알 것이다. 드래건의 금기된 주술을 시도한 자의 최후가 무엇인지.”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직접 에드윈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듣자 화가 치밀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지금껏 숨겨 오다니.’
분명한 건, 지금까지 그 사실을 눈감아 준 이유가 진을 반역죄로 죽이는 게 못내 안타까워서는 아닐 터였다.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드리안 제국의 영웅을 반역죄로 몰기 위해선 제국민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황실인 존더부르크가가 아니라, 로이슈덴 공작가에서 드래건의 심장을 가진 자임을 공표해야 했다.
아드리안 제국의 제국민들은 대신전에 내려진 신탁과 위대한 예언가 라딘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만약 진 로이슈덴이 다른 것이 아니라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도 살아남은 자란 사실이 알려진다면, 제국민들은 오히려 그를 황제로 추대할 수도 있었다.
라딘의 두 번째 예언 중에 황실에 검은 드래건의 피를 이은 자가 태어날 것이란 말이 있었고, 로이슈덴 공작가 역시도 황실의 혈족이었다.
그 말인즉 라딘이 말했던 예언의 인물은 에드윈이 아니라 진 로이슈덴이라는 뜻이 된다.
그제야 로엔은 에드윈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 때문에 지금껏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어.’
로엔은 헛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곤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지금껏 에드윈이 진실을 말하지 못했으니, 앞으로도 확실한 뭔가가 나타나기 전까진 사실을 공표하진 못할 거야.’
그러니 그의 협박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로엔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며 에드윈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듯했다.
“처음 듣는 얘기라 충격이 큰 모양이군. 그러니 잘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내게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진은 반역자로 죽게 될 테니까. 그리고 너 역시 반역자의 아내로 처형될 테고.”
에드윈이 로엔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곤 손끝으로 인피면구를 떼어 낸 아름다운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로엔은 순간 소름이 돋아 그의 손을 당장 쳐 내고 싶은 걸 참아 내느라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장갑을 끼지 않았더라면 손톱이 손바닥을 찔러 피가 났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에드윈은 제 맹독에 중독되는 일이 벌어졌을 테고.
하마터면 황제를 독살할 뻔한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드윈이 선심을 쓰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에겐 관용을 베풀어 줄 수도 있다. 로이슈덴의 이름을 버리고, 록스버그 공작으로 남는다면. 그러니 게르피온으로 가라. 끝도 없는 사막의 끝에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가 봉인되어 있다고 하더군. 그곳에서 대신관이 말한 물건을 내게 가져오도록 해.”
에드윈은 로엔에게 순순히 열쇠가 있는 장소까지 알려 주었다.
씨어가 그에게만 알려 준 비밀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들어진 크립텍스를 풀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라딘의 혈족인 씨어조차도 직접 봐야만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로엔에게 제가 아는 비밀을 공유하는 이유는 라딘의 서를 찾는 열쇠를 찾는 동안, 로엔이 진을 배신하길 원했다.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제가 마음을 준 여인에게 배신당한 진 로이슈덴은 폭주할 테고,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 미쳤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비밀을 세상에 폭로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폭주한 진을 반역죄로 죽이면 그만이었고.
처음 계획과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그에게 유리한 쪽으로 풀려 가고 있었다.
“폐하, 저는…….”
“로엔 록스버그, 지금 당장 모든 것을 결정할 필요는 없다. 너에게 한 달의 기한을 주지. 한 달 후, 이곳에서 그대의 결정을 듣겠다.”
큰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에드윈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순간 로엔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가까스로 충동을 억누른 로엔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최대한 빨리 떠나는 게 좋을 것이다. 시간은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빨리 흐르는 법이니까.”
로엔이 바닥에 떨어진 베일을 집어 들었다. 에드윈의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로엔은 무시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얼굴에 베일을 쓰자 아름답던 얼굴이 순식간에 가려졌다. 하지만 에드윈의 탐욕스러운 시선은 로엔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