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황제인 에드윈이 로이슈덴 공작저로 사람을 보낸 건, 결혼피로연 파티가 있던 날 새벽이었다.
키스로 시작된 도발이 두 사람의 욕망을 부추겼고, 급기야 파티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손님들이 돌아가기도 전에 침실로 향했다.
밤의 뜨거운 열기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지독한 쾌락에 눈을 뜬 사람들처럼 두 사람은 끝도 없이 몸을 얽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에 신음하며, 서로를 찾아드는 뜨거운 숨결을 열망했다.
육체가 주는 쾌락은 몸속에서 미쳐 날뛰는 뜨거운 맹독을 정화시켰고, 통제를 잃은 자아를 되찾게 했다.
로엔은 절박하게 저를 끌어안는 진의 손길에 처음으로 안도했다. 꿈도 꾸지 않고 달콤한 잠에 빠져드는 것이 뭔지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들이, 그들에겐 서로의 손을 잡고 나서야 알게 된 작은 떨림이었다.
쾅쾅쾅!
두 사람을 방해하듯 새벽의 고요를 깨고 찾아온 방문객의 손엔 황실의 인장이 찍힌 봉투가 들려 있었다.
봉투를 받아 든 알렉에게 검은 로브 차림의 낯선 방문객은 황제의 뜻을 전했다.
「폐하께서 로이슈덴 공작 부인을 만나 뵙길 바라십니다. 정오까지 황실 접견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단, 공작 부인 혼자 오셔야 할 겁니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던 두 주인이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알렉은 봉투를 들고 아침 햇살에 새벽의 어둠이 다 밀려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도 한참, 마침내 침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나서야 침착한 얼굴로 공작 부인의 방문을 두드렸다.
황제의 편지가 전해진 후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로이슈덴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하는 로엔의 옆엔 진이 앉아 있었다.
혼자 오라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함께 황제를 알현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진의 고집 때문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로엔은 시종장의 안내를 받으며 황실 접견실이 있는 건물 앞에 섰다.
진은 로엔 혼자서 에드윈을 만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황제의 명을 어길 수 없었다. 그래서 로엔이 에드윈을 만나고 나올 때까지 황실 기사단에 가 있기로 합의했다.
진을 태운 마차가 기사단 쪽으로 가는 걸 보곤, 로엔은 다시 시종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접견실 앞에 도착한 로엔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맞은편에 서 있는 시종장에게 고갤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시종장이 접견실 문을 두드렸다.
“폐하, 로이슈덴 공작 부인이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
에드윈의 허락에 시종장이 문을 열어 주곤 옆으로 물러섰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로엔이 접견실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순간 로엔은 목덜미에서부터 시작된 서늘한 냉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사냥꾼에게 쫓기던 초식 동물이 퇴로가 막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 이런 것일까?’
로엔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낯선 감각에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곤 창문 근처에 놓인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에드윈을 응시했다.
‘오늘은 쉽지 않겠어.’
로엔은 벌써부터 짓눌리는 압박감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굳게 의지를 다진 후, 에드윈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폐하, 보내 주신 선물을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엔이 우아한 태도로 에드윈을 향해 예를 갖췄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야 당연한 거지. 그러지 말고 앉지. 내가 잡아먹을 것도 아니고.”
삐딱한 말투며 냉소 어린 입가가 로엔을 향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로엔이 자리에 앉자, 에드윈은 손수 로엔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마셔. 독은 들어 있지 않으니까.”
찻잔을 들어 올리는 대신 로엔은 검은 베일 너머로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볼 필요 없다. 대신전에서 진이 독이 중독돼 정신을 잃었다기에 미리 말한 것뿐이니까.”
에드윈은 여상하게 말하곤 찻잔을 들어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차를 마시느라 살짝 숙인 그의 입가엔 서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가 알고 있어.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이건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긴장할 것 없다. 록스버그 공작. 아니, 로이슈덴 공작 부인이라고 불어야 할까? 뭐, 뭐가 되었든 내가 오늘 그대를 부른 이유는 그대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거든. 앞으로 나에게 록스버그 공작으로 불릴지, 아니면 로이슈덴 공작 부인으로 남을지.”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에드윈은 날씨 얘기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로엔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기회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유치하게도 진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황제의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있었으니까.
“저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저는 록스버그 공작인 동시에 로이슈덴 공작 부인이기도 해서.”
우선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무슨 속내를 품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제 패를 보일 순 없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척 시치미 뗄 생각은 마, 록스버그 공작. 그대도 알고 있을 텐데? 진 로이슈덴이 반역죄를 지은 죄인이란 걸 말이야.”
이젠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에드윈이 노골적으로 로엔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로엔은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한 채 시치미를 뗐다.
“반역죄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폐하. 진은 절대로 폐하를 배신할 자가 아니에요. 검술 시합에서도 폐하께 부러지지 않는 검을 받쳤던 사람입니다. 절대 그런 일은…….”
로엔이 말끝을 흐리자, 에드윈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말 재미있군. 진을 믿다니. 그럼 진은 내버려 두고 네 비밀에 대해 먼저 말해 볼까?”
에드윈은 재미있어 죽을 것 같았다. 파르르 떨며 당황해 하는 로엔의 모습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로엔의 모습만으로 미루어 추측해 보건대, 지금 두 사람은 각자의 비밀을 숨긴 채 서로를 속고 속이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이 정말 배꼽을 잡을 만큼 웃겼다.
“폐하, 제 비밀이라면…….”
“맞아. 록스버그 공작가에 여아에게만 전해진다는 저주. 아마 그걸 혈독화라고 부른다지? 그대의 몸속에 흐르는 저주의 피 말이야. 우습게도 진은 제가 중독된 독이 암살자에 의한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눈치더군. 어리석제 제 신부의 몸속에 흐르는 독인 줄도 모르고.”
“저는……. 폐하!”
“이 사실을 진 로이슈덴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굉장히 궁금하군. 진은 거짓말하는 자를 경멸한다는 걸 알고는 있나?”
“폐하!”
“진이 알까 두렵긴 한 모양이지?”
로엔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록스버그 공작, 앞으론 진 로이슈덴보단 날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네 몸속에 흐르는 맹독에 대해 제국민들이 알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저주받은 괴물 공작이 될 테니까. 그땐 그대가 아무리 애원해도 내가 손쓸 도리도 없어지거든.”
에드윈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곤 다시 한 번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니 로이슈덴 공작 부인이 아니라, 록스버그 공작으로 남는 걸 선택해야 할 거야. 어차피 정략결혼일 뿐인데 함께 멸문할 순 없잖아?”
로엔은 에드윈이 저를 부른 이유를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무기 삼아 진을 배신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때, 에드윈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로엔이 쓰고 있던 베일을 벗겨 바닥에 던졌다.
“헙.”
당황한 로엔이 재빨리 고갤 숙였다. 그러자 로엔의 행동에 에드윈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나를 돕고 있는 자가 있지. 그자의 말에 따르면, 네 흉터도 네 비밀처럼 거짓이라고 하더군.”
로엔은 바짝 긴장했다. 흉터가 거짓이란 것도 알고 있다니.
“그자에 의하면 혈독화는 타인을 죽일 수 있는 맹독이지만, 제 주인의 몸에 난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하더군. 만약 그의 말이 맞는다면 10년 전 사고로 인해 생긴 흉터는 지금쯤 깨끗이 아물었을 테지.”
혈독화의 효능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다니, 더는 감출 수도 없었다.
로엔이 천천히 고갤 들자 에드윈이 손을 뻗어 왔다. 하지만 그의 손끝이 인피면구에 닿으려는 순간,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마지막 순간에 측근의 말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대가 직접 하는 게 좋겠지?”
에드윈이 손을 거둬들이는 걸 보며 로엔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에드윈에게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에 대해 말한 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혹시 대신전에서 본 마차 안의 그 검은 로브의 사내일까?’
혈독화까지 아는 걸 보니 만년설을 재련해서 무기를 만든, 금기된 주술을 쓴 자 역시 동일 인물인 듯했다.
“더는 숨길 수도 없겠군요.”
로엔이 고갤 들어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얼굴에 붙인 인피면구를 천천히 떼어 내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군.”
얼굴을 감싸고 있던 흉터가 떨어져 나간 로엔의 얼굴에 정오의 햇살이 고스란히 비춰 들었다.
탐스러운 금발이 파도처럼 일렁거렸고, 흠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와 신이 공들여 만든 작품처럼 정교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에 에드윈은 놀란 듯 숨을 삼켰다.
특히 신비로운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사기나 다름없는 얼굴과 어우러지자, 낯선 경외감마저 들었다.
‘미쳤군. 말도 안 돼.’
괴물 공작이라고 손가락질받던 로엔이었다.
멸시와 경멸을 받고 사교계에서 내쳐졌던 그녀였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지금껏 감추고 있었다니.
에드윈은 제 앞에 드러난 진실을 보고도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이런 얼굴을 지금껏 숨기고 있었다니.”
마치 에드윈은 배신이라도 당한 얼굴이었다.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그의 태도로만 보면 아까운 걸 놓쳐 분한 것 같았다.
순간 로엔은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만에 하나 그녀가 지금까지 제 외모를 감추지 않았다면 에드윈과 결혼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로엔을 쏘아보던 에드윈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진은 알고 있겠지? 네 진짜 얼굴을 말이야.”
마치 이제야 로엔이 진 로이슈덴과 결혼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는지, 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있었다.
‘정말, 미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