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같은 시각, 진은 신관의 안내를 받으며 대신전의 개인 접견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대신관이 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부부터 물어 왔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로이슈덴 공작님?”
그나마 혼인서약서가 끝난 다음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으니 망정이지, 서약서에 서명하지 못한 채 끝이 났다면 결혼식이 무효화되었을 터였다.
그랬다면 록스버그 공작가와 로이슈덴 공작가의 결혼은 아드리안 제국의 사교계를 뒤흔들 최악의 결혼식으로 기록이 되었을 테고.
“보시다시피. 그런데 카를 신관은 괜찮습니까?”
진의 물음에 대신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결혼식이 있었던 그날, 로이슈덴 공작과 함께 정신을 잃은 신관이 바로 카를이었다.
쓰러진 카를 신관을 방으로 옮긴 뒤 그의 상태를 살폈는데, 놀랍게도 그는 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무엇보다 카를 신관이 중독된 독의 종류를 알 수 없어 해독제도 사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진 로이슈덴 공작이 해독제를 건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고열에 시달리던 카를 신관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보내 주신 해독제 덕분에 차츰 회복되는 중입니다.”
“약속대로 카를 신관의 상태에 대해선 함구령을 내렸을 테죠?”
진의 서늘한 목소리에 대신관이 긴장했다.
진이 해독제를 건네며 내건 조건이 바로 카를 신관의 상태에 대해 당분간 밖에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직접 해독제를 먹였고, 위독하다는 이유를 들어 카를 신관을 별관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방문객 역시 철저히 통제 중입니다.”
대신관의 설명에 진이 고갤 끄덕였다.
“그런데 카를 신관이 어쩌다 독에 중독된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대신관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까지 록스버그 공작이 암살자의 위협에 시달렸다는 사실을요.”
진의 말에 대신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신전에 틀어박혀 신의 말을 전하는 자였지만, 그 역시 아드리안 제국에 떠도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10년 전, 록스버그 공작 부처의 사고 이후 어린 상속녀가 겪었을 그 참담한 현실을.
“알고 있습니다. 혹시 공작님께선 이번 일도 그 연장선상으로 보시는 겁니까?”
“추측이 아닌, 확신입니다. 그리고 제 의심은 카를 신관이 그 암살자의 끄나풀이란 거죠.”
진의 지적에 대신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신의 말을 전하는 신관이 암살에 연관되어 있다니. 이건 대신전 안에 정치적 힘이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대신관인 제 눈을 피해, 대신전까지 손을 뻗을 수 있는 자라면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황제인 에드윈.
‘설마 그가 지금까지 록스버그 공작을 암살하려 했다는 건가?’
믿기지 않은 사실에 대신관은 입술만 달싹였다.
“짐작도 못했나 보군요.”
“저는 신탁을 받아 전하는 몸입니다.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을 이유도 없고, 또…….”
대신관이 입을 다물었다. 더는 말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카를 신관에 대한 추궁은 추후에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알게 될 진실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요.”
“대부분 아드리안 제국의 대신전은 황실인 존더부르크가를 위해 존재한다고들 하죠. 하지만 제가 대신관이 된 후 처음 받은 임무는 황실인 존더부르크의 존속이 아닌, 아드리안 제국의 존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로이슈덴 공작가와 선대 대신관과의 맹약 역시 지켜 왔던 것이고요.”
지금까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던 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대신관에게 향했던 의혹 역시 서서히 가시기 시작한 것이다.
“대신관에게 주어지는 사명이 아드리안 제국의 존속이란 건 처음 알았군요.”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죠. 대신전이 황제의 비호 아래 있다고. 하지만 비밀 한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존더부르크가엔 대신관보다 더 가까운 자가 존재해 왔습니다.”
대신관보다 더 가까운 자라? 대체 누가…….
그 순간 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가 있었다.
“혹시 위대한 예언가 라딘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라딘의 피를 이어받은 혈족들은 황실의 비호 아래 200년 동안 존재해 왔고요.”
대신관의 대답에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위대한 예언가 라딘은 아드리안 제국이 아니라, 존더부르크 황가에 충성하던 자였다.
하지만 존더부르크 1세는 라딘의 세 개의 예언 중 마지막 예언을 사장시켰다. 그와 동시에 라딘의 행방은 묘연해졌고.
그래서 200년이 지난 지금도 라딘의 세 번째 예언에 대해 아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라딘이 죽기 전 그의 제자인 타에라를 시켜 ‘라딘의 서’를 은밀히 숨겼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말은, 라딘이 마지막 순간에 존더부르크 황실을 배신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은 문득 혈독화에 중독되었을 때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환영처럼 보이던 그 장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꿈이 아니라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만에 하나, 이것이 200년 전 과거에 존재했던 실제 장면이라면…….’
이건 대신관이 받은 신탁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받아들이면 될 듯싶었다.
다만 같은 맥락이라고 하기엔 미래를 보여 주는 신탁과는 달리 저는 과거의 사실을 본 것이었지만.
그리고 왜 그런 것들을 제가 보게 되었는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혹시 제 몸속에 잠들어 있는 드래건 때문일까?
노아스에 태어났다던 검은 드래건의 혈족이란 건, 어쩌면 아버지가 제게 먹인 그 심장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곳은 분명 게르피온의 헤르파 사막이었어.’
‘라딘의 서’를 숨긴 자는 제자인 타에라가 아니라 라딘이었다. 지금껏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과 소문은 교묘하게 일그러져 진실을 굴절시키고 있었다.
“제가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대신관님.”
대신관의 뜻밖의 제안에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 록스버그 공작님의 암살 시도 사건에 대한 얘기입니다. 대신관 소속의 신관이 개입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해서.”
“…….”
진은 선뜻 대답하는 대신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의 침묵에 초조해하는 것은 오히려 대신관이었다.
타라 여신의 축원 의식을 치르는 동안 로이슈덴 공작을 사흘에 한 번 꼴로 자주 만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어려운 존재였다.
저보다 한참은 어린 나이였지만 그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존재했다.
비단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국의 긍지인 ‘부러지지 않는 검’의 주인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신의 말을 전하는 대신관에겐 평범한 사람들이 감지하지 못하는 영적인 능력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눈으로 보건대, 진 로이슈덴은 범상치 않은 존재였다.
아직 그 힘의 정도를 가늠하는 건 어려웠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선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신성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대체 어떤 힘을 품고 있는 걸까?’
아니, 그걸 넘어서 대신관은 처음으로 아드리안 제국의 주인인 존더부르크 황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과연 신탁에 의해 정해진 아드리안 제국의 주인이 존더부르크 황가였을까?’ 하는.
대신관은 제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이건 신탁을 부인하고, 아드리안 제국을 부인하는 엄청난 중죄였기 때문이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신관님.”
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신관 역시 그를 따라 일어서며, 문득 결혼식 날 새벽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선대 대신관과 로이슈덴 공작의 비밀 맹약은 이미 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게 했다.
새로운 황좌의 주인까지도.
대신관은 그가 대신관이 된 후 처음으로, ‘금언 서약을 어길까?’ 하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 문을 나서려던 진 로이슈덴이 대신관을 향해 돌아섰다.
『대신관, 기억하라. 그대가 할 일은 그대가 한 맹세를 지키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그대의 몫이 아니다. 운명이 정한 자들에 의해 결정되도록 지켜보는 자일 뿐.』
낯선 언어에 대신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그의 모든 생각을 읽은 듯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태양빛에 의해 그의 주위에 신성한 푸른빛이 일렁였다.
대신관은 저도 모르게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릴 구부리며 맹세했다.
『따르겠습니다.』
대신관은 저도 모르게, 지금은 사장된 고대어로 대답했다.
* * *
로엔은 2층 창가에 서서 로이슈덴 공작가로 들어오는 마차 행렬을 지켜보았다. 로이슈덴 공작 부인으로서 처음 참석하는 파티였기 때문에 평소와 달리 긴장이 됐다.
“주인님, 괜찮으신 거죠?”
세실의 목소리에 창문 앞에 서 있던 로엔이 돌아섰다. 대답 없는 로엔이 걱정되는지 세실이 다시 한 번 물어 왔다.
“혹시 긴장되세요?”
로엔은 아니라고 말하려다 고갤 끄덕였다. 숨겨 봐야 소용없었기 때문이다.
“로이슈덴 공작 부인으로 참석하는 건 처음이라, 그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야.”
세실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지금 장난하세요? 제가 장담하건대, 공작님은 주인님이 파티장에서 어떤 모습이건 상관하지 않으실걸요? 예뻐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뭐라는 건지. 세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알고 있지?”
“말이 안 되긴요. 제가 본 바론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크죠. 그러니 오늘 파티 때 각별히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내가 뭘 조심해야 하는 건데?”
“뭐긴요. 질투심이지. 분명 공작님은 주인님이 검은 베일 너머로 눈길이라도 주는 귀족분이 있으면 당장 그분의 목을 조르려 들걸요? 아니다, 결투를 신청하시려나?”
마치 곧 일어날 일이라도 된다는 듯 세실이 진심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로엔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안 사실이지만 진 로이슈덴은 질투심이 많았다. 특히 에드윈 때문에 알게 된 캐슬리우스 백작을 시작으로 라이칸까지도 마땅찮아 했다.
무엇보다 오늘 파티에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을 초대하지 않겠다고 해서 얼마나 난감했던지.
왜냐하면 에드윈이 두 사람의 결혼피로연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는 대신,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을 대리인으로 보내겠다고 전갈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에드윈의 의도야 뻔히 보였지만, 황제의 직접적인 명령이니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런 난처한 상황에서 진의 반응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감정이 질투심이란 걸 깨닫곤, 로엔 역시도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