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진은 여전히 로엔을 설득하려는 듯 로엔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그의 입속으로 여린 살이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로엔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래도 지금은 안 돼요. 이건 대놓고 우리가 뭘 하는지 광고하는 거잖아요. 공작님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어린 시절부터 봐 온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뻔뻔할 자신은 없다고요.”
로엔이 고개까지 가로젓는 모습에 진은 웃음을 삼켰다.
록스버그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제 주인이 뭘 하든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에 반해 로엔은 은근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평소엔 그렇게 당차고 자신만만하더니.
단단히 미쳤는지 그 괴리감이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진이 한 발짝 물러서자 로엔이 안도하며 고갤 들었다.
“뭔데요?”
“먼저 들어주겠다고 약속해.”
설마 난처한 조건을 내걸려는 건 아닐 테지?
“걱정 마. 이번처럼 사람들 앞에서 너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아니니까.”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진이 선수를 쳤다. 그제야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가 볼까?”
진이 로엔을 안아 책상 위에서 내려 주었다. 그리곤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손을 제 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알렉은 돌아갔다고 했죠?”
“바로 돌아갔어.”
“저녁이라도 먹이고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다음에 오면 바로 보내지 마세요.”
“그런 사소한 것에 일일이 신경 쓸…….”
“당연히 제가 신경 써야죠. 이젠 로이슈덴 공작 부인인데. 그리고 내 사람을 챙기는 일은 사소한 게 아니라, 아주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로엔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진이 고갤 끄덕였다.
“네 마음대로 해. 네 말처럼 이젠 네가 로이슈덴 공작 부인이니까. 공작가의 살림은 네가 도맡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허락해 줘서 고마워요.”
로엔은 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서고를 나왔다.
복도를 따라 식당으로 가는 내내 로엔은 앞으로 로이슈덴 공작가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진의 눈빛이 한없이 다정한 것도, 입가에 떠오른 매혹적인 미소도 보지 못했다.
* * *
로엔과 진이 탄 말이 은둔자의 숲에 멈췄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진은 2층 침실로 올라가는 대신 로엔에게 승마를 제안했다.
식사 내내 그가 내걸 조건이 무엇일지 고민하던 참이라,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침실로 바로 가면 서고에서 하지 못했던 일을 할 것 같아서 최대한 그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진이 저녁을 먹는 내내 로엔을 뜨거운 눈빛으로 연신 바라보는 통에 민망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함께 시간을 보낸 일주일 동안 로엔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파악했는지, 진은 연신 그녀의 접시에 오리 고기를 비롯해 갖가지 요리를 놓아 주었다.
괜찮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진은 로엔이 접시에 놓인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기까지 했다.
결국 로엔은 그가 저녁을 먹게 하기 위해 그가 접시에 놓아 준 음식을 다 먹어야 했다.
식사 시중을 들던 세실은 두 사람을 보며 연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로엔으로서는 서고에서 키스하는 것까지 보인 터라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식사 내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여긴 왜……?”
“너랑 다시 와 보고 싶었어. 거기다 오늘이 그믐이기도 하고.”
그믐이라는 말에 로엔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3개월 전 이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었다.
“공작새의 눈물이 필요하신 거라면, 제게 의뢰를 하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그 유명한 만물상점의 주인이거든요.”
로엔의 농담을 바로 이해한 진이 짐짓 진지한 표정을 했다.
“구해 줄 수 있나? 얼마 전 독에 중독돼 꼭 필요하거든.”
“운이 좋으시네요. 이 방면에선 절 따라올 자가 없는데. 따라오세요. 바로 구해 드릴게요.”
로엔이 숲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진이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로엔은 조금 전의 장난스러움이 아닌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혹시 독이 완전히 해독된 게 아니었나요?”
“대부분은 됐지. 덕분에 활동하는 덴 전혀 지장이 없으니까.”
하지만 완벽하게 몸이 회복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로엔은 당연히 그의 몸속의 독이 해독되었다고 여겼다.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불편한 내색은 한 번도 없었을뿐더러, 그의 몸속에 들끓던 열도 사라졌었다.
몇 번이나 확인한 드래건의 비늘 역시도 상처 없이 깨끗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심해.”
생각에 빠져 걷던 로엔이 진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그가 손을 뻗어 로엔의 얼굴 바로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밀었다.
그제야 로엔은 부러져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제 얼굴을 찢어 놓을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마워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군.”
“아픈 줄 몰랐어요. 당연히 좋아졌다고 생각해서. 말하지 그랬어요. 나는…….”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이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진이 손을 뻗어 로엔의 뺨을 감쌌다. 그리곤 엄지손가락으로 찌푸려진 눈썹을 꾹꾹 눌러 폈다.
“괜한 걱정을 시킨 모양이군.”
“괜한 게 아니에요. 공작님은 제게 말했어야 했어요. 저 때문에…….”
“쉿. 진정해.”
진이 로엔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며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이 어둡자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럼 서고에서 했던 조건 말이야. 지금 말해도 될까?”
다행히 로엔의 머릿속에 가득 찼던 죄책감은 그가 내걸 조건에 대한 생각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뭔지 말해요. 들어줄게요.”
평소와 달리 순순한 대답에 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겁도 없이. 내가 뭘 말할 줄 알고.”
“사람들 앞에서 난처하게 할 일은 아니라면서요.”
“그렇지.”
진의 시선이 로엔의 입술에 닿았다. 그리곤 진득한 눈빛으로 로엔의 입술을 훑어 내렸다.
그의 시선에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시선이 입술에 닿은 것뿐이었지만 온몸에 뜨겁게 열이 올랐다.
로엔은 고갤 돌려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리곤 혼란스러움을 감추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뭔지나 말해 봐요.”
* * *
“정말 이거면 되는 거죠?”
로엔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자 이미 웃옷을 벗고 폭포수 아래 서 있던 진이 고갤 끄덕였다.
“그렇대도. 그러니 어서 들어오기나 해.”
로엔은 여전히 망설임을 떨쳐 내지 못한 채, 발아래 살랑거리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시절 이후 한 번도 밖에서 수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숲속의 호수에서 헤엄을 치자니.
“어서.”
진의 재촉에 로엔이 폭포수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다.
“잠깐, 겉옷은 벗고 들어와야지.”
진이 로엔이 서 있는 쪽으로 휘적휘적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외투를 벗겨 냈다. 그리곤 로엔을 바위 위에 앉힌 다음 신고 있던 승마용 신발을 벗겼다.
로엔은 물에 반쯤 몸을 담근 채 제 앞에 무릎을 꿇다시피 한 진을 내려다보았다.
고갤 숙이고 있어서인지 그의 굵은 목덜미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진 모양 좋은 어깨 근육과 탄탄한 등 근육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로엔은 저도 모르게 그 유려한 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남자 몸을 보고 침을 삼키다니.’
이건 변태가 따로 없었다.
진은 로엔의 음습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능숙하게 그녀의 양말까지 벗겼다. 타라 여신의 축원 의식을 치르는 동안 반복적으로 했던 일이라 로엔 역시도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젠 그가 해 주는 배려들이 너무도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신발과 양말까지 모두 벗긴 진이 옷가지를 들고 폭포수 안쪽에 있는 비밀 공간으로 사라졌다.
로엔은 진이 보이지 않자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아랫배에 고인 열기를 잠재우려 했지만 한 번 시작된 욕망은 사그라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손을 뻗어 조각처럼 완벽한 몸을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느라 주먹을 꽉 쥐어야만 했었다.
그때, 진이 돌아왔다. 로엔은 재빨리 시선을 돌려 그의 탄탄한 몸을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진은 바로 코앞에 멈춰 서선 로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 생각보다 깊거든.”
그의 커다란 손을 잡자 진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첨벙, 첨벙.
물소리와 함께 로엔이 폭포수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미지근한 물이 다리를 적셨다.
당연히 차가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뜨거운 태양에 데워진 듯 따뜻했다.
“절벽 아래에 온천이 있는 것 같아. 동굴 안도, 이곳도 따듯한 걸 보면.”
로엔의 생각을 읽은 듯 진이 로엔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첨벙 소리와 함께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입고 있던 드레스가 위로 부풀어 올랐다.
진의 손을 잡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까지 휘적휘적 걷는 동안 물에 젖은 드레스가 자꾸만 발에 감겼다.
“잠깐만, 천천히…….”
로엔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물속에서 드레스를 입고 걷는 게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걸음을 멈춘 진이 뒤를 돌아보더니 무겁게 내려앉은 드레스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두 팔을 뻗어 로엔을 번쩍 안아 들었다.
“이러다 습관이 될 것 같군.”
진이 제 품에 안긴 로엔을 고쳐 안으며 낮게 속삭였다. 로엔은 고갤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귀찮아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런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것으로 보아 즐거운 듯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