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이로써 혈독화에 대한 확인은 끝났군.”
검게 변한 펜촉을 꺼림칙하게 내려다보는 에드윈의 얼굴엔 미묘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이젠 아버지의 주술사였던 자의 말을 더는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네. 그리고 결혼식 당일 새벽, 대신관에게 신탁이 내려진 듯합니다.”
“신탁? 하지만 대신관에게선 아무런 전갈도 받지 못했다.”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뜨곤 상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설마, 대신관이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대신전에 내려진 신탁을 황제인 그에게 알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분명 록스버그 공작에 관련된 것이겠지?”
“그럴 겁니다. 하지만 제 짐작으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일 확률이 큽니다. 무엇보다 대신전에 따로 심어 놓은 신관에 따르면, 결혼식 이후 대신관이 록스버그 공작에게 따로 연락해 만난 흔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에드윈은 얼마 전 대신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존더부르크와 연관된 신탁이 아니면 분명하지 않을 확률이 크다고 했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씨어. 네가 쫓고 있다던 노파는 찾았나?”
에드윈의 질문에 씨어가 고갤 가로저었다.
“칼라일에 들어온 흔적까진 찾았지만 그 후의 행방은 오리무중입니다. 록스버그 공작 역시 찾고 있는 걸로 보아, 그쪽에 사람을 붙여 놓으면 곧 찾게 되지 않겠습니까?”
씨어의 말에 에드윈이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너는 어때?”
“…….”
씨어는 에드윈의 물음에 잠시 침묵했다.
그 잠깐의 침묵에 조급증이 났는지 에드윈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또 다른 예언 말이야. 정복 전쟁도 끝났으니 타란 대륙의 주인이 된 나에게 예언이 내려질 차례가 아니었나?”
“죄송합니다, 폐하. 아직입니다. 분명 폐하께 위대한 예언이 내려질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아직 조급해할 필요가 없겠지. 진실을 아는 이는 나밖에 없으니. 분명 때가 오면 모든 게 내 손 안에 들어오게 될 테지.”
에드윈은 시시때때로 찾아드는 불안감을 떨쳐 내며, 미래를 예언한다는 씨어를 응시했다.
밝은 빛을 받고 서 있었지만 씨어의 모습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기이하다고 생각했지.’
에드윈은 씨어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5년 전,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가 그를 침전으로 불렀다. 황실 소속의 의사까지 물린 방 안엔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사신이 서 있었다.
「에드윈, 인사해라. 씨어다. 대대로 황제를 위해 일해 온 자다. 라딘의 후예지. 그리고 너를 보필할 자이기도 하다.」
그것이 설명의 전부였다.
위대한 예언가 라딘의 혈족.
에드윈이 황제가 된 후 씨어는 그의 책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황제에게 책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림자 책사. 그것이 바로, 위대한 예언가 라딘의 혈족인 씨어였다.
“후회하십니까?”
“뭘? 설마 괴물 공작을 내 반려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선대 황제께서 원치 않으셔서 어그러지긴 했지만 라딘의 마지막 세 번째 예언이 록스버그와 관련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전혀. 무엇보다 존더부르크 1세께선 예언이 정한 여인이 아니라, 신탁이 정한 여인을 황후로 맞으셨지. 그래서 신성하고 고귀한 피를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이고.”
에드윈은 신탁이나 예언이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해도 충분히 제 힘으로 바꿀 수 있다고 여겼다. 200년 전 라딘의 제자인 타에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럼 계획했던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그 전에 록스버그가 빨리 움직였으면 좋겠군. 가문의 저주를 푸는 게 제 목줄을 조이는 행위라는 걸 알았을 때의 표정이 굉장히 궁금하거든.”
에드윈이 비릿하게 웃었다.
* * *
진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황궁으로 간 뒤, 로엔은 침실에서 나와 록스버그 공작가의 지하 서고로 향했다.
며칠 만에 모습을 드러낸 로엔을 보며 세실은 뭔가를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로엔은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책을 넘기는 동안 계속해서 따라붙는 세실의 시선이 뭘 묻고 싶어 하는지 보여서다.
얼마 동안 책에만 집중하던 로엔이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렇게 음흉하게 웃지 말고,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말해.”
그제야 마른 수건으로 책장을 닦는 척하고 있던 세실이 책상 앞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그리곤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으셨어요? 며칠 동안 침대에만 계셨잖아요. 식사를 가져다 드리기 위해 침실 앞까지 갔는데도, 공작님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니까요. 얼마나 살뜰하게 주인님을 챙기시던지. 그런 분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깜짝 놀랐지 뭐예요.”
거기다 세실 대신 라이칸이 식사를 들고 방문 앞에 갔을 땐 얼마나 날을 세우고 을러대던지.
그 서늘하고 날카로운 분위기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리창 청소를 하던 세실이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한마디로, 그때의 로이슈덴 공작의 모습은 제 암컷을 지키는 독점욕 강한 맹수 같았다.
“너도 알 것 아냐. 톰이랑 곧 결혼한다지?”
“네. 이것 보세요. 톰이 줬어요.”
세실이 로엔에게 자랑스럽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소매 안에 푸른색 실로 만들어진 타라의 연이 채워져 있었다.
“서로 교환한 거야?”
“사실 건국기념일 날 받은 거예요. 그런데 주인님께선 공작님께 타라의 연은 주셨어요? 외출하실 때 보니 손목에 없던 것 같은데.”
세실의 물음에 로엔이 고갤 숙여 책을 보는 척했다. 그녀의 태도에 세실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분명 결혼식 날 엄청난 사건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로엔이 만들어 놓은 해독제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두 사람은 첫날밤을 보낸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굳게 닫혀 있던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진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처음부터 제 주인인 로엔에겐 다정하긴 했지만, 진 로이슈덴은 기본적으로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서늘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차가움이 몰라보게 누그러져 있었다.
남자는 사랑에 빠지면 그 여인으로 인해 변한다고 했다. 세실은 그의 변화를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 로이슈덴과는 달리 제 주인의 감정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검술 시합에서 타라의 연을 망설임 없이 건넨 진 로이슈덴과는 달리, 로엔은 타라의 연을 진에게 주는 걸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님, 혹시나 결혼하시고 나서 마음이 변하신 건 아니시죠?”
“뭐?”
“그러니까 제 말은요, 그런 사람이 있다잖아요. 내 손에 들어온 물고기에겐 먹이를 주지 않는다고요. 그게 주인님이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제 말은…….”
“그건 아니야.”
“그럼 왜 타라의 연을 주시지 않은 건데요?”
세실의 물음에 한사코 책을 읽는 척 고갤 숙이고 있던 로엔이 천천히 고갤 들었다.
“세실, 잘 들어. 너와 톰과는 달리 내 결혼은 정략결혼이야. 너도 알다시피 귀족들의 결혼이 다 그렇잖아. 그리고 결혼식 날, 그가 혈독화로…….”
“또 밀어내시는 건가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는데, 벌써 도망칠 준비 먼저 하시는 거냐고요.”
세실이 안타깝다는 듯 로엔을 보았다.
로엔 역시도 답답했다. 제 핏속에 맹독이 들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피를 삼킨 진을 보며 제 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가문의 저주는…… 여전했다.
10년 전, 마차 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은 로엔은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풀 의무가 있었다. 이 의무와 책임은, 제 감정과는 상관없이 저를 묶는 족쇄였다.
‘내 감정을 죽이고 그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로엔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머릿속에 넘쳐나는 생각의 홍수를 막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꾸만 흔들렸다. 처음으로 가문의 저주, 제 몸속에 흐르는 혈독화 그리고 책임과 의무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동시에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세실, 나는…….”
“어차피 주인님이 선택하실 테지만, 저는 주인님이 가장 원하는 걸 하셨으면 좋겠어요. 인생에서 중요한 게 마음이잖아요. 원하는 대로, 원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요.”
세실의 말에 로엔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주인님의 행복을 위해 뭔가를 포기했다고 해서 아무도 주인님을 비난하지 않아요. 저는 그래요. 그럼 이만 나가 볼게요. 저녁 준비를 도와야 해서.”
세실이 예를 갖추곤 서고를 나갔다.
혼자 남겨진 로엔은 다시 앞에 펼쳐 놓는 책에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머릿속에 한 줄도 들어오지 않았다.
로엔은 생각에 잠긴 채, 그렇게 한참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서고 안을 밝혀 놓은 등불이 일렁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똑똑.
다시 노크 소리와 함께 세실이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긴 침묵에서 그제야 벗어난 로엔이 책장을 덮고는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리곤 조금 전 혼란스러웠던 감정 따위 전혀 없었다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데? 공작님이 벌써 돌아오신 거야?”
세실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로엔의 모습에 안도한 듯 마주 잡은 손을 놓고는 재빨리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요. 하지만 비슷해요. 로이슈덴 공작가에서 사람이 왔거든요.”
로이슈덴 공작가에서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