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진 로이슈덴이 시종장의 안내를 받으며 접견실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와 달리 먼저 접견실에 도착해 있던 에드윈이 고갤 들었다.
“결혼식 도중 정신을 잃고 라이칸의 등에 업혀 나갔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멀쩡하군. 오히려 좋아진 것도 같고. 이게 소위 말하는 신혼 재미라는 건가?”
말이 좋아 황제지, 진을 보자마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비아냥거리는 모양새는 딱 뒷골목의 무뢰배였다.
시종장이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가자 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에드윈을 향해 예를 갖췄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시는 것처럼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감정 과잉인 저와는 달리 어떤 상황에서건 평정심을 유지하는 진을 보며 에드윈은 또다시 배알이 꼴렸다.
“그렇다니 다행이야. 그래, 갑자기 결혼식 도중에 정신을 잃은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
“작은 사고였습니다.”
“사고? 내가 전해 듣기론 혼인서약서에 서명을 하던 도중 깃펜에 손이 찔려 피가 났다고 하던데. 아니었나?”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결혼식 도중 정신을 잃은 것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의뭉스럽게 구는 에드윈을 보며 진이 단호한 태도로 연관성을 부인했다.
“이상하군. 내가 듣기론 아니던데. 아니면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인 건가?”
에드윈이 일부러 하던 말을 멈추곤 진의 표정을 살폈다.
“소문이라면 무슨?”
“록스버그의 돈이 아무리 좋아도 막상 괴물 공작과 첫날밤을 보낼 생각을 하니 정신을 놓은 것 아니냐고 하더군. 사실인가?”
유치한 도발이었다. 아마 전 같았다면 그런 조롱쯤 아무것도 아니라며 넘겼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황제라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제 얘기가 아닌, 로엔 록스버그의 일이었으므로.
“폐하.”
“뭐지?”
“또 다른 소문은 듣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내가 듣지 못한 소문이 있었던가?”
에드윈은 그가 모르는 사교계의 이야기가 있을 리 없다는 듯 진을 보았다.
“제가 록스버그 공작에게 첫눈에 반해 간도 쓸개도 다 내주었다는 소문 말입니다. 게다가 록스버그 공작을 한시도 떼어 놓고 싶지 않아 결혼식장에도 품에 안고 입장한 것도요.”
뻔뻔하게 제 행동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진을 보며 에드윈은 어이가 없었다.
분명 결혼식 날 대신전에서 벌인 그의 미친 짓에 대해서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그 얘길 전해 들었을 때, 제 귀를 의심했었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가 아는 진 로이슈덴은 여인을 품에 안고 사람들 앞에 나설 자가 아니었다. 그게 상대에게 첫눈에 반해서 벌인 일이라면 더더욱.
그 어떤 일에도 무감하고, 간혹 심장이 얼어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냉혹한 진 로이슈덴이 제 신부를 애지중지한다라.
하지만 에드윈은 귀족들이 떠들어 대던 말들을 믿지 않았다. 분명 숨은 의도가 있지 않고선 절대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대의 결혼이 돈에 팔린 게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하는 건가, 진 로이슈덴?”
정략결혼에 사랑이라니.
결혼 역시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에드윈의 얼굴에 경멸의 감정이 떠올랐다. 어리석다는 투였다.
“사랑이 있으면 안 되는 겁니까. 폐하?”
“당연한 것 아닌가? 철부지 아이도 아니고. 진 로이슈덴 공작, 그대에게 피를 나눈 혈족으로 충고 하나 하자면 결혼은 사업이다. 가문을 잇고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쥐는 행위일 뿐이지.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을 한다는 건 그대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라는 걸 증명하는 일일 뿐이다.”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는 에드윈을 바라보는 진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저는 폐하의 말씀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자로 남겠습니다.”
에드윈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진을 보았다.
‘저 말이 정말 진심인 건가? 날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하지만 왜?
그가 그런 것을 두고 제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 그에겐 오히려 제 감정을 숨기는 것이 유리한 패였다.
지금껏 찾던 진 로이슈덴의 약점을 알게 된 이상, 제가 그것을 쥐고 흔들어 댈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제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정말 진 로이슈덴이 괴물 공작을…….
“그리고 록스버그 공작은 이제 로이슈덴 공작 부인입니다. 아무리 폐하라 하셔도, 예의를 갖춰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타란 대륙을 정복한 아드리안 제국의 주인으로서의 존엄일 테니까요.”
에드윈의 입매가 불쾌한 듯 굳어졌다.
진의 지적은 어느 것 하나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제 로엔 록스버그 공작은 로이슈덴 공작 부인이 되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예를 취해야 하는 것도 맞았다.
무엇보다 로이슈덴 공작가는 황가의 혈족으로 황위 계승권을 갖고 있는 가문이었으니까.
이젠 일개 귀족과는 그 위치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만에 하나 로엔 록스버그가 진 로이슈덴의 상속자를 낳기로도 한다면, 그 상속자 역시 황위 계승권을 갖게 될 테지.’
하지만 마음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어두운 감정이 쉽게 그 사실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에드윈은 불쾌한 얼굴로 비아냥댔다.
“몸 정이 무섭군. 결혼식을 올린 지 이제 일주일인데 벌써부터 싸고돌다니. 로이슈덴 공작, 그리 탐탁지 않긴 하지만 그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록스버그 공작을 공작 부인으로 예우해 주겠다. 그러니 여인의 치마폭에 싸인 티는 내지 말도록. 꼴불견이니까.”
마지막까지 진의 속을 긁어 댔지만, 제 예상과는 달리 진 로이슈덴은 기꺼이 허릴 숙여 왔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제 안위를 확인하셨을 테니 그만 물러가 봐도 되겠습니까?”
“냉정한 진 로이슈덴이 공처가가 다 된 모양이군.”
“집에 일찍 돌아간다고 약속한 것은 맞지만, 그 전에 대신관과 약속이 있습니다.”
“대신관?”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진은 에드윈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잠시 뜸을 들였다.
진의 침묵이 에드윈을 초조하게 했는지 냉소로 비틀렸던 얼굴이 굳어지는 게 보였다.
“그날 혼인서약서에 서명할 깃펜을 건넨 신관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말하곤 에드윈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대로 에드윈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결혼식을 도운 신관에 대해 물어볼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군.”
“별것 아닐지도 모르지만 카를 신관이 건넨 깃펜으로 서명을 한 뒤에 제가 정신을 잃었습니다. 로엔 역시도 손가락이 찔려 피가 났고요. 제 생각으론 제가 정신을 잃은 이유가 신관이 건넨 깃펜에 독이 묻어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을 살까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눈치였다.
“깃펜에 독이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럼 폐하께선 제가 결혼식 도중 정신을 잃은 이유가 뭔지 알고 계십니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깃펜을 건넨 카를 신관 외엔 의심이 되는 자가 없어서.”
에드윈은 입술만 달싹였다.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않은 그가 확신에 찬 듯 아니라고 하는 건 또 다른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다.
제길.
에드윈은 속으로 욕설을 뱉어 냈다.
“나야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그대의 말이 맞을 테지.”
“그래서 지금 그자에 대해 알아볼 생각입니다. 전에도 록스버그 공작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어 온 터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이 예를 갖춘 뒤 접견실을 나가자 에드윈이 욕설을 짓씹었다.
그때 접견실 안쪽에 존재하는 문이 열리더니 검은 로브를 쓴 그림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로이슈덴 공작은 돌아간 겁니까?”
“지금 돌아갔다. 정략결혼에 마음이 들어 있으면 안 되냐고 묻더군. 거기다 깃펜에 독이 묻어 있었던 것 같다고 대신관을 만나겠다고 했고. 설마 아직 록스버그 공작의 비밀을 모르는 건가? 독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는 걸 말이야.”
에드윈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이제 로이슈덴 공작 부인이니 예를 갖추라는 철없는 말을 끝도 없이 쏟아 내는 꼴로 봐선, 그가 록스버그의 저주 때문에 죽다 살아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뭐,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진 로이슈덴의 약점을 알게 된 그로선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지난 200년 동안 비밀을 지켜 온 록스버그 공작가입니다. 어쩌면 록스버그 공작은 진 로이슈덴과는 달리 그를 믿지 못하는지도 모르고요.”
사실 아무리 사랑하는 감정이 존재한다고 해도, 가문의 비밀을 털어놓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가문의 존속이 달린 일이라면 숨기는 건 당연했다.
“그럼 사기 결혼이군. 똑똑한 척 굴더니, 진 로이슈덴도 어쩔 수 없었나 봐. 여인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다니.”
진 로이슈덴과 얘길 나누는 동안 내내 잡쳐 있던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리고 진 로이슈덴이 깃펜을 건넸던 카를 신관을 의심하는 눈치였어.”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를 신관 역시도 혈독화에 중독돼 사경을 헤매는 중이라 아마 대신전에 가도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여기.”
내내 접견실의 그늘 속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자가 에드윈이 서 있는 곳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검은색 로브를 걸치고 있던 씨어의 모습이 햇빛 아래 드러났다. 창백한 얼굴에 불투명한 눈동자가 기이해 보였다.
“뭐지?”
“록스버그 공작이 서명했던 깃펜입니다. 증거가 될 것 같아 회수해 왔습니다.”
상자를 받아 든 에드윈이 서둘러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 든 은색의 펜촉이 검게 변해 있었다. 독에 닿았던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