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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36화 (137/201)

136화

‘대체 언제부터 안 걸까?’

그동안 그가 제 비밀을 알고 있지 않을까 의심을 한 적이 몇 번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시치미를 떼며 모르는 척했다.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그의 앞에서 연극하는 꼴이. 분명 우스워 보였을 테지.’

로엔은 제가 그를 속이기 위해 연극을 하는 동안 저를 비웃었을 걸 생각하자, 모멸감에 화가 났다. 무엇보다 그가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다.

마음은 언제까지 저를 속이며 비웃을 생각이었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어 내지 않은 건, 그녀가 먼저 그를 속였기 때문이었다.

로엔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는 진을 보며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화를 삼켰다.

“다 알았으면서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지금 날 갖고 놀았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로엔은 감정이 격앙되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입을 열자 울컥 쏟아지려는 감정을 가까스로 눌러 삼켰다. 그리곤 조금 진정되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몰랐다면 그럴 수 있다고 넘길 수 있었겠지만, 내 몸속에 있는 게 맹독인지 알면서 어떻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피를 삼킬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기다렸어요.”

로엔이 또다시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곤 진에게 눈을 맞춘 채 입을 열었다.

“그러니 공작님께서 말씀해 보세요. 왜 그러셨는지.”

“그러니까 지금 네가 화가 난 게, 내가 네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 뗐던 것이 아니라 네 핏속에 맹독이 흐른다는 걸 알면서도 네 피를 삼킨 것 때문인 거지?”

심각한 로엔과는 달리 상황을 정리하듯 물어 오는 진의 태도에 로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요? 지금이라도 ‘날 갖고 놀아서 재미있었냐.’고 따져 물을까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나는…….”

평소와 달리 진이 말끝을 흐리며 로엔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냉정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당연히 제 비밀을 알면서 모르는 척했던 것도 화가 나요. 하지만 그건 제가 공작님을 먼저 속인 거니까 따질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뿐이에요.”

“갖고 논 적 없어. 나는 맹세코…….”

로엔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변명 같은 건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여기서 더 말했다간 싸움만 될 게 뻔하니까. 무엇보다 지금 당신 상태가 멀쩡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혈독화를 삼킨 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자칫 죽을 수도 있었어요. 아무리 드래건의 심장을 삼켰다고 해도, 맹독인 내 피를 직접 삼키다니. 그건 너무 위험했다고요. 알고는 있나요?”

로엔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제 피를 삼키고 대신전 바닥에 쓰러지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그때의 공포와 두려움에 온몸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쩌지? 만약에 나 때문에 그가 또…….’

순간 로엔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가 정신을 잃은 후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던 감정의 정체가 뭔지 깨달아서다.

미쳤다. 정말, 이건 미치지 않고서는…….

그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온몸이 떨리고, 목구멍이 조이듯 아린 이유는 그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로엔은 그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내가 그를…….’

로엔은 재빨리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떨쳐 내려 애썼다. 두려움이 들불처럼 일었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갤 들자 진이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은 하지 못할 것 같아. 나도 이유를 모르거든.”

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맹독을 삼키고 죽을 수도 있었는데, 본능이 먼저였다. 그녀를 사람들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모른다니. 그게 무슨…….”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그 말이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처럼 들려서다. 몹시도 당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심장이 울렁거릴 만큼 기뻤다.

“정말 나도 몰라서 답답해. 하지만 그 순간 네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것밖엔 떠오르지가 않더군. 그러니 나도 너에게 딱히 이유를 말해 줄 수가 없는 거야. 아, 맞다. 우리가 맺은 계약, 그러니까 그걸 이행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계약이라.

진은 계약이란 말을 언급하면서도 그 순간 계약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하지만 굳이 계약이란 말을 생각해 낸 건, 혼란스러운 듯 감정의 흔들림을 겪고 있는 로엔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그의 앞에서 로엔이 도망쳐 버릴 것 같았다.

그의 예상이 맞았는지 무섭게 흔들리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조금은 안정을 찾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 계약은 3주 전에 파기된 게 아니었나요?”

“파기한다고만 했지, 계약서는 파기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아직 유효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 같은데. 아닌가?”

진의 말에 로엔이 그를 쏘아보았다. 그게 말이 되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로엔은 그의 허무맹랑한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두려웠다. 좀 더 깊숙한 것까지 파헤치다 보면,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까지 알아 버릴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10년 전 사고 이후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 왔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게 분명했다.

가문의 저주도, 그리고 제가 지금 그에게 느끼는 감정의 정체도.

그러니 여기서 멈춰야 했다. 모르는 척 덮어야 했다.

“좋아요. 그럼 몸이 회복되면 계약서는 다시 쓰기로 해요.”

로엔이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었다. 그리곤 이마에 맺힌 땀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 준 다음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쉬어요. 다른 얘긴 독이 해독된 후에 하고요. 우리 두 사람 다, 이 모든 걸 받아들이기까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로엔이 방을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정말 로엔에겐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진이 이번에도 그녀의 팔을 붙잡고는 놓지 않았다.

“가지 마.”

낮게 가라앉은 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은청색의 눈동자 역시 간절해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진이 상처받은 연약한 동물처럼 보였다. 아직 독에 중독되어 있어서인지 그를 지켜 줘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쉬어야 해요. 아직 다 회복된 게 아니…….”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진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로엔이 방을 나가 버리면 이제야 미세하게 열린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릴 것 같았다.

그를 보며 혼란스럽게 일렁이던 감정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단단한 껍질 안으로 숨어 버릴 게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만큼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녀를 붙잡아야 했다.

“아파. 여기가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진이 제 셔츠의 단추를 풀더니 로엔에게 제 심장 주위에 박힌 드래건의 비늘을 내보였다. 그의 말처럼 새롭게 돋아난 비늘의 뿌리가 붉게 변해 있었다.

“네 독 때문인 것 같아. 그러니 책임도 네가 져.”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를 붙잡을 수 있다면 더한 것도 할 생각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서늘하던 은청색의 눈동자에 어느새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진이 손을 뻗어 로엔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듯 맞잡았다.

커다란 손이 여린 손바닥에 문질러지자 순식간에 나른한 열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이 우리, 첫날밤이기도 하고.”

유혹하듯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진이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로엔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리개의 천을 벗겼다. 스르륵 소리와 함께 얇은 베일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인피면구가 붙어 있어야 할 자리는 흠 하나 없이 깨끗했다. 진의 손끝이 로엔의 뺨을 천천히 쓸어 내렸다.

“언제 알았지?”

그가 묻는 바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와서 해독제를 먹이면서 생각했어요. 왜 그랬을까, 하고.”

처음엔 제 핏속에 맹독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한 행동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로엔이 괜찮냐는 질문을 했을 때 진은 걱정 말라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다 알게 되었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듣고 ‘이 사람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구나.’ 하고. 내 몸속에 맹독이 흐르는 것도 다 알고 있으면서 내 피를 삼켰다는 것도요.”

진의 손끝이 로엔의 입술에 닿았다. 바짝 마른 입술을 통해 제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동안 얼마나 속을 끓였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은 진심이었는데.”

진의 커다란 손이 로엔의 목덜미를 쓸었다. 그리곤 뒤쪽으로 움직이더니 조그만 머릴 감싸 쥐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로엔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진이 고갤 숙여 왔다.

“으읏.”

뜨겁고 말캉한 혀가 로엔의 바짝 마른 입술을 쓸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키스에 로엔은 안도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서서히 이완되자, 로엔은 그제야 제가 침대에 기대 누워 있는 그를 반쯤 덮치듯 올라가 있음을 깨달았다.

치료를 위해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그의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겹쳐진 제 아랫배에 느껴지는 감각이…….

순간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그가 혈독화에 대해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그가 첫날밤이란 말을 했을 때도 그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잔뜩 흥분해 있는 남자의 몸을 직접 마주하자, 지금 상황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걸 감지했다.

“어, 잠깐…….”

그의 몸이 의식되기 시작해 로엔은 입술을 떼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진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몸을 일으키려는 로엔의 허리를 팔로 휘감은 다음 순식간에 휙 하고 몸을 뒤집었다.

“어엇!”

푹신한 침대가 등에 닿았다. 그가 덮었던 이불이며 베개에서 그의 체향이 났다. 청량하면서도 몸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사향 냄새였다.

놀란 것도 잠시, 그가 고갤 숙여 로엔의 귓불을 삼켰다. 이로 잘근잘근 씹고 뾰족하게 만든 혀가 희롱하듯 예민한 살갗을 찔러 댔다.

뜨거운 숨결이 예민한 살에 닿자 로엔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허락한 것 아니었나?”

“읏, 뭘……? 으음―.”

“날 책임진다고 했던 것.”

습윤한 열기를 품은 혀가 귓바퀴를 핥아 올렸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감촉에 로엔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우리의 첫날밤이란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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