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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35화 (136/201)

135화

“타에라, 이 어리석은 제자여.”

“제게 중요한 건 라딘 님의 이름이 흠 하나 없이, 타란 대륙의 역사 안에 대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제국 따위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고요.”

“네 선택에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가?”

“상관없습니다. 어리석은 제자는 제 선택으로 어떤 대가를 받게 되더라도 흔쾌히 받아들일 생각이니까요.”

타에라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막을 떠나 노아스로 향하는 것을 보며 라딘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년 전 성급하게 예언을 입 밖으로 쏟아 냈던 제 어린 치기가 후회가 됐다.

“아니, 어쩌면 이것 역시도 신의 운명이었을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파수꾼이 시간을 넘어 그의 신부를 알아볼 수 있을까?”

걱정해도 이미 늦었다. 타에라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그러진 운명은 시간 속을 흐르기 시작했으니까.

“내 죄인가? 어리석은 제자의 마음속에 헛된 욕망을 심어 준 건?”

라딘은 회환이 깃든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하늘을 태울 듯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의 반지가 사라진 자리엔 타라 여신의 별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라딘이 손을 뻗자, 그의 손 위로 ‘라딘의 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언서의 마지막 장을 펼친 그는 바뀐 운명의 주인들이 제 발자국을 찾아올 수 있도록 예언의 마지막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고대어로 쓰인 예언의 마지막 부분은 운명의 주인이 아니면 볼 수 없게 내용을 봉인하는 주술을 걸었다.

앞으로 ‘라딘의 서’로 불릴 예언서를 모래사막 위에 내려놓고는 마법진을 그려 나갔다.

『태양의 반지가 다시 뜨는 날. 파수꾼이 제 운명을 깨닫고 제 신부를 되찾는 순간, 어그러진 운명이 제자릴 찾는다.』

순식간에 ‘라딘의 서’가 모래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허억―.”

거친 숨을 내쉬며 진이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눈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쓰다 제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태양의 반지가 다시 뜨는 날. 파수꾼이 제 운명을 깨닫고 제 신부를 되찾는 순간, 어그러진 운명이 제자릴 찾는다.』

조금 전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뛰어다녔다. 그리고 고대어로 속삭이던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울렸다.

‘대체 그건 뭐였지?’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 있던 장소는 그에게 익숙한 곳이기도 했다.

‘그곳이 어디였지? 분명 사막의 한가운데였는데…….’

기억의 회로를 찾아 올라가던 진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모래로 뒤덮인 죽음의 땅.

그가 적국의 기사들의 피로 산을 만들어 낸 곳.

게르피온이었다.

조금 전 그가 본 환영의 장소는 정복 전쟁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렀던 헤르파 사막이었다.

“분명 헤르파 사막이었어.”

그런데 왜 그곳에 낯선 자들이…….

그리고 하늘에 떠올랐던 태양의 반지는 또 뭐고.

식은땀이 진득하게 베어 나온 이마를 손등을 쓸며 진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무섭게 뛰던 심장이 잠잠해지자, 정신을 잃기 전 대신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 맞다. 결혼식…… 윽!”

진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드래건의 비늘이 돋아난 심장이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삭이는 동안 진은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되짚었다.

분명 신관이 건넨 깃펜으로 혼인서약서에 서명을 하는 중이었다. 로엔 역시도 아무 문제없이 서명을 끝내는 것을 보며 만족스러워했었다.

특히 로엔 S 록스버그의 ‘S’에 숨어 있는 이름이 생각나자 입가에 미소까지 떠올랐다.

그 순간, 당혹스러운 신음 소리와 함께 로엔의 손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인해 진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로엔의 손에 맺힌 피를 핥아 삼키고 멈추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혈독화.

은둔자의 숲에서 로엔을 처음 만났을 때, 짙은 꽃 향과 함께 독이 공기 중으로 퍼졌었다. 그리고 그녀의 피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맹독이란 사실도 그녀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오히려 로엔이 지금껏 숨겨 왔던 비밀이 대신관과 귀족들 앞에서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로엔의 손가락을 물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저 필사적일 만큼 단호하게 로엔의 피를 삼키는 스스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피가 멈춘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며 고갤 들었을 때, 당혹감으로 점철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백해진 피부며, 덜덜 떨리는 손까지.

걱정과 경악으로 가득한 로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순간 진은 지금껏 그녀를 감싸고 있던 벽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안도감과 함께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일렁였다.

‘괜찮다고, 끝까지 말했어야 했는데.’

울 것 같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로엔을 안심시켜야 했었다. 하지만 제 기억으론 마지막 말을 다 맺지 못한 채 의식을 놓아 버렸다.

달칵.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문 쪽으로 고갤 돌리자 쟁반을 든 로엔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군. 난 분명 대신전에서 너와 결혼식을 하고 있었는데.”

진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로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대로 다가왔다. 로엔의 얼굴엔 그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근래 보였던 부드럽고 다정한 표정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진은 초조해졌다. 로엔은 화가 나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그에게.

욱신, 심장이 날카로운 송곳에 찔린 듯 아팠다. 순간 진은 허탈해져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로엔의 서늘한 눈빛만 봐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미움받기 싫었다.

협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로엔이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손을 댔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열이 남아 있어요. 해독제를 먹이긴 했지만 아직 몸에 독이 남아 있거든요.”

감정 따위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목소리였다. 로엔은 저에게 따라붙는 진의 시선을 무시한 채 쟁반 위에 놓여 있던 약병을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먹어요.”

진이 로엔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약을 받아 삼켰다.

“물도 마셔요.”

이번에도 로엔이 건넨 물을 순순히 받아 마셨다.

“왜 화가 났지?”

순간 로엔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왜 화가 났는지 정말 모르냐는 듯이.

로엔의 서슬에 진이 순한 강아지처럼 털 속에 날카로운 발톱을 숨겼다. 그리곤 버림이라도 받은 양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치떴던 눈꼬리를 내렸다. 그리곤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진에게서 물 잔을 받아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더 자요. 드래건의 힘 때문에 목숨까지 위험한 건 아니지만 쉬어야 해요.”

로엔은 진의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엔.”

진이 몸을 일으키며 로엔의 손을 잡아챘다. 그리곤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제야 로엔의 시선이 진을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자, 로엔이 눈동자에 희미하게 다시 분노가 일었다.

“화났냐고 물으셨죠? 네, 화가 나요. 공작님 때문에 화가 나 미치겠다고요. 왜 그러셨어요? 왜 무모하게 그런 행동을 하셨냐고요.”

진의 시선이 로엔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얼굴 가리개로 향했다.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그저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지, 서늘한 목소리로 그의 무모한 행동을 질책할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로엔의 화를 풀 수 있는지 제 머리로는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진이 초조해하던 그 순간, 로엔이 손이 눈에 들어왔다. 겉으론 냉정하게만 보였는데, 쟁반을 잡고 있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얼굴 가리개에 가려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듯 창백했다.

“이리 와.”

본능이 그녀를 품에 안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불안에 떠는 로엔을 위로해야 한다고. 하지만 로엔은 그를 노려볼 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내가 가고 싶은데, 아파서 그래.”

진이 더운 숨을 몰아쉬며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모습에 가파르게 치켜 올라갔던 로엔의 눈썹이 조금 내려왔다.

“많이 아파.”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하지만 로엔은 그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진이 손을 뻗어 로엔의 얼굴 가리개의 천을 만지작거렸다.

가리개를 벗길까 아니면 내버려 둘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로엔은 진의 손을 밀어내는 대신 참고 참았던 질문을 뱉어 냈다. 예상대로 진은 놀라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었어.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지금껏 모른 척하고 있었다. 로엔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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