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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34화 (135/201)

134화

알고 있다. 지금 이 장면은 머릿속이 떠올린 환영일 뿐이라는 걸.

하지만 로엔은 아직도 구토가 일 만큼 진동하던 꽃 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사람을 현혹케 하는 향이었다. 죽도록 거부하고 싶어도 사라지지 않는 향이 순식간에 머리채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절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던 그날의 마지막 광경이 펼쳐졌다.

제 피를 뒤집어쓴 채 죽은 부모님의 모습이.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저를 걱정하던 안타까운 눈동자가.

로엔은 죽어 가는 부모님을 보며 비로소 제 몸속에 흐르는 저주의 검고 추악한 밑바닥을 처음 마주했었다.

‘헉―.’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눈물이 차올랐다. 심장이 무섭게 뛰며, 지독한 고통에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부모님의 모습 위로 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순식간에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깊게 억눌러 왔던 트라우마가 한꺼번에 폭발하듯 로엔을 덮쳤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뭔가 말을 해야 했지만 입이 얼어붙은 듯 한 마디도 뱉어 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진 로이슈덴만큼은 혈독화의 위험에서 예외라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서로의 체액이 목숨을 위협하는 공포가 아니라, 서로를 위험에서 구하는 생명줄이란 사실도 떠오르지 않았다.

‘안 돼. 제발…….’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타고 베일을 적셨다.

그 짧은 시간, 로엔의 속이 새까맣게 탄 후에야 진이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순순한 얼굴로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로엔을 바라보았다.

“피가 멈췄군.”

방울방울 피가 맺혔던 손가락은 온통 그의 타액으로 가득했다. 얼마나 세게 빨았는지 그의 입안에 들어가 있던 부분만 붉게 변해 있었다.

로엔이 고갤 들어 천천히 진을 올려다보았다. 태양 빛을 받고 서 있는 그는 그녀와 예상과는 달리 멀쩡해 보였다.

반듯한 이마도, 귀족적인 곧은 콧날도.

그녀의 시선이 그의 입술에 닿은 순간, 진이 붉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입술에 묻은 피를 마저 삼키려는 행위였다.

‘말도 안 돼. 아니, 다행이야. 그는 괜찮아. 그는 내 피를 삼켜도 죽지 않아.’

그제야 온몸을 속박하던 공포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공포가 가시자, 새하얗던 머릿속도 빠르게 이성을 찾아갔다.

제 몸속에 흐르는 혈독화는 사람들을 죽이는 무기였다. 그런데도 제 피를 삼킨 진 로이슈덴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건, 그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이기 때문이었다.

로엔은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다행이야. 그는 부모님처럼 죽지 않아. 그는…… 괜찮아.’

믿기지 않은 광경에 로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작님. 괜찮으신…….”

“걱정 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난 괜찮…….”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쿵’ 소리와 함께 진이 옆으로 쓰러졌다.

“공작님! 로이슈덴 공작님!”

“아악!”

“어떡해요. 로이슈덴 공작님이 쓰러지셨어요.”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귀족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엔 역시도 창백해진 얼굴로 재빨리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숨이 붙어 있는지를 확인했다.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심장 역시도 뛰고 있었고. 하지만 제 독에 중독된 이상 최대한 빨리 해독제를 먹여야 했다.

떨리는 손으로 진을 안아 올린 로엔이 진을 흔들었다.

“정신 좀 차려 봐요. 공작님!”

로엔의 목소리가 대신전을 울렸다. 절박하기까지 한 그 목소리에 대신관을 비롯해 귀족들이 충격을 받은 듯 얼어붙었다.

결혼 예식이 치러지던 대신전 안에 죽음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제길!”

욕설이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다.

왜 하필, 지금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로엔은 제 품에 안겨 정신을 잃은 진을 흔들어 깨웠다.

왜 하필, 진 로이슈덴이…….

“라이칸!”

진이 라이칸을 소리쳐 불렀다. 대기 중이던 라이칸과 세실이 재빨리 다가왔다.

“공작님을 최대한 빨리 옮겨야 해. 내 피를…….”

뒷말은 목구멍 속에 삼켜졌다. 하지만 라이칸은 로엔의 말을 즉각 이해하곤, 서둘러 진을 등에 들쳐 메듯 업었다.

“어디로 갈까요?”

“집. 저택으로 가. 그곳에 치료제가 있어.”

라이칸이 고갤 끄덕였다. 그는 서둘러 대신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로엔 역시도 세실과 함께 뒤를 따랐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대신관이 두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로엔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얼굴에 쓰고 있던 베일이 벗겨지고 얼굴에 붙인 인피면구가 드러나, 귀족들이 숨을 삼키며 고갤 숙였지만 로엔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정신을 잃은 채 라이칸의 등에 업힌 진 로이슈덴의 등만 보일 뿐이었다.

아드리안 제국 사람들은 오늘 일을 두고, 최악의 결혼식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진 로이슈덴 공작이 불운한 저주를 몰고 다니는 괴물 공작의 희생양이 되었다며 안타까워했다.

* * *

타란력 980년.(아드리안 제국이 세워지기 20년 전)

타란 대륙의 북쪽 끝.

버석한 모래사막 위에 서 있던 위대한 예언가 라딘이 품속에서 낡은 회중시계를 꺼냈다. 달칵 소릴 내며 회중시계의 뚜껑이 열리자 두 개의 바늘이 정확히 12를 가리켰다.

“이제 시작되는 건가?”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쓴 두건을 끌어 내리자, 깊이를 알 수 없는 짙고 푸른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동자엔 시간을 넘어선 자의 깊은 혜안과 지혜가 담겨 있었다.

라딘은 긴장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100년에 한 번 나타난다는 금환일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하늘에 떠오른 타라 여신의 별이 주인을 찾는 날이기도 했다.

30여 분 동안 계속된 일식이 끝이 나려는 듯 붉게 타오르던 태양의 반지가 서서히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어, 일찍 찾아온 사막의 어둠 위로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가 붉은빛을 뿜어냈다. 익히 알고 있는 타라 여신의 별이었다.

잠시 후, 금환일식이 끝나자 그 별과 마주해 떠오른 또 하나의 별.

한참을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동자에 짙은 그늘이 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파수꾼의 신부가 태어났다.”

사내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늙은 노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딥니까?”

“아드리안의 남쪽, 록스버그 공작가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록스버그 공작가에서 태어날 여아는 아드리안 제국의 황후가 될 분입니다. 동시에 두 개의 운명을 지닐 수는 없습니다.”

노파가 강하게 부인하며 라딘을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푸른 눈동자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성이 느껴지는 사내의 눈동자는 밤의 하늘처럼 깊었다.

“1,000년 전, 모습을 감췄던 노아스의 땅에 파수꾼이 태어났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검은 드래건의 후예지. 그가 태어난 이상 더는 전쟁과 혼란은 없을 것이다. 곧 새로운 제국이 세워질 테니까.”

“라딘 님!”

라딘을 부르는 노파 타에라의 얼굴에 공포와 두려움이 떠올랐다.

1년 전, 위대한 예언가 라딘은 아드리안의 존더부르크가에서 새로운 제국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 예언했다. 그리고 그 예언에 맞춰, 귀족들은 새로운 제국을 세울 준비를 모두 끝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노아스 땅에서 태어난 검은 드래건의 후예가 여신의 파수꾼이 된다니.

그건 위대한 예언가 라딘의 예언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말도 안 돼. 라딘 님의 예언이 틀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 없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다시 하늘의 길을 봐 주십시오.”

타에라의 떨리는 목소리에 라딘이 담담하게 그녀를 불렀다.

“타에라, 두려워할 것 없다. 이미 정해진 운명의 별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으니, 더는 바꿀 수가 없구나.”

타에라가 걱정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었지만 라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하지만 타에라의 생각은 달랐다. 제 스승이자, 타란 대륙의 위대한 예언가라 칭송받는 스승의 명성이 오늘의 예언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바닥에 떨어져 진창을 구르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럼 새로운 제국의 태양이 바뀌는 겁니까?”

“말했지 않았느냐. 이미 타란 대륙을 지탱하고 있는 신수도 노아스 땅에 태어난 검은 드래건의 후예를 주인으로 선택했다고.”

“하지만 또 바뀌지 않겠습니까? 오늘처럼 또 다른 예언이, 아니 신탁이 내려온다면 원래대로 되돌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타에라의 물음에, 라딘의 눈가에 짙은 그늘이 졌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마치 그의 눈앞에 펼쳐진 듯 굳어진 입가에 슬픈 미소가 어렸다.

“타에라, 멈춰라. 너는 아무것도 해선 안 된다. 열쇠를 쥔 파수꾼의 신부를 죽여선 안 돼. 네 욕심으로 파수꾼의 신부가 죽게 된다면 시간을 넘어 불운의 씨앗이 전해질 것이다.”

라딘의 경고에 타에라가 버석한 모래 위로 무릎을 꿇었다.

“라딘 님께서 록스버그 공작가에서 태어난 아이가 새로운 제국의 황후가 될 운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첫 번째 예언을 믿습니다.”

라딘의 눈동자에 스산한 바람이 스쳤다. 그 서늘한 눈빛에 타에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결정을 내렸고요.”

라딘의 눈이 타에라에게 향했다. 말려도 소용이 없다는 걸 라딘 역시 알고 있다. 그가 본 예언된 미래는 이미 타에라에 의해 비틀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 역시 운명인지도 모르겠군.’

라딘은 미래를 안다는 게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미래를 안다고 해도, 그것을 바꾸는 것은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말 이것 역시 그들에게 예견된 운명이라면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타에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노아스로 갈 생각입니다. 파수꾼이 될 자의 눈을 가리고 그의 몸속의 힘을 봉인할 것입니다. 황후가 될 분은 죽이지 않을 겁니다.”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럼, 첫 번째 예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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