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로엔은 고갤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 로이슈덴이 로엔을 품에 안고 대신전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귀족들은 경악에 가까운 모습으로 두 사람을 보며 앉아 있었다.
그중 압권은 대신관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휘청거리는 대신관을 옆에 서 있던 신관이 부축하는 게 보였다.
‘아, 망했다.’
경건한 분위기에서 결혼식을 치르려 했건만.
아마 이번 스캔들은 지난번 검술 시합장에서보다 더 오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게 분명했다.
대신관 앞에 도착한 진이 그제야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당당한 태도로 로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뒤따라온 세실이 서둘러 로엔의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세실이 흐트러진 베일을 뒤로 길게 늘어뜨리며 로엔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연신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는 걸 보니, 세실에게도 한동안 놀림을 받을 것 같았다.
“흠흠. 로이슈덴 공작님, 잠깐만.”
대신관이 진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신호를 했다. 진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 대신관 쪽으로 고갤 숙였다.
“제발 자중해 주십시오. 여기는 결혼식이 치러지는 신성한 장소입니다. 기도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대신관은 최대한 정중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로엔의 얼굴이 붉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기도실이라면 어제 두 사람이 욕망을 참지 못하고 키스를 했던 곳이었다.
아, 정말…….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대신관님.”
진의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대신관은 할 말을 잃은 듯 고갤 절레절레 흔들더니, 이내 경건한 표정으로 몸을 바로 했다. 진 역시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뒤 로엔의 옆에 섰다.
“지금부터 예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대신관의 말과 함께 유리엘라 종탑의 시계가 12시를 알리기 시작했다.
땡, 땡―.
로엔은 그제야 진 로이슈덴과의 결혼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충격과 경악으로 물들었던 대신전은 어느새 경건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마침내 대신관의 집전 아래, 로엔 록스버그와 진 로이슈덴의 결혼 예식이 진행되었다.
* * *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진은 로엔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라이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심장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불쾌한 감정과 함께 지독한 소유욕이 들끓었다. 이제는 단단하게 자릴 잡은 드래건의 비늘이 욱신거리기까지 했다.
언제나 그의 신경을 긁어 대던 고통이 아니라, 지독한 열기였다. 드래건의 심장 역시도 제 암컷에 소유를 주장하듯 로엔의 옆에 있는 라이칸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예정에 없던 행동을 했던 것은.
처음엔 로엔이 계단을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한 계단, 한 계단 저를 향해 올라올 때마다 느껴진 만족감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로엔의 손이 라아칸에게 붙잡혀 있는 걸 본 순간, 발이 먼저 움직였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간 진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 소유를 주장하듯 로엔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오롯이 제게 향하자 예민하던 신경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젠 익숙해진 감정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예물을 교환하시면 됩니다.”
대신관의 말에 생각에 잠겨 있던 진이 고갤 들었다. 아직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진을 향해 대신관이 뭘 하고 있느냐는 듯 눈빛으로 그를 재촉한다.
옆을 돌아보자 신관 하나가 보석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대신전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신관에게 미리 건네 놓은 것이었다.
진이 보석 상자를 집어 들자 로엔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베일 너머로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보였다.
“손을 내밀어 주겠나?”
진의 요구에 로엔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그의 눈앞에 내밀어진 손은 흉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지만 진의 눈을 사로잡은 건 로엔의 손이 아니었다. 장갑으로 가려져 있던 가느다란 손목에 매달린 타라의 연이 있었다.
푸른 실을 꼬아 만든 타라의 연은 익히 잘 알고 있는 로이슈덴 공작가의 상징 공작새가 매달려 있었다.
진이 고갤 들자, 베일을 사이에 두고 로엔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로엔이 손을 내밀기 전 망설였던 이유가 흉터 때문이 아니라, 손목에 차고 있던 타라의 연 때문이었단 걸 알 수 있었다. 들키기 싫었던 모양이다.
진이 실수인 척 손끝으로 타라의 연을 건드렸다.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제 타라의 연을 보자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만족감으로 심장이 뜨거워졌다.
진은 보석 상자의 뚜껑을 열어 반지를 꺼냈다. 대대로 로이슈덴 공작 부인에게 전해지는 결혼 반지였다.
로엔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껴 준 진은 손을 놓는 대신, 고갤 숙여 반지에 입을 맞췄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로엔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흠흠.”
대신관이 헛기침을 했다. 이제 그만 예식을 진행해야 하니, 일어서라는 재촉이었다.
진이 로엔의 손을 놓고 허릴 세웠다.
대신관은 그제야 안도하듯 숨을 내쉬었다. 예식을 진행하는 내내 이렇게 마음을 졸인 건 처음이라는 듯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기까지 했다.
“그럼 혼인서약서에 서명하십시오. 서약이 끝나면 두 사람은 타라 여신의 축원 아래 결혼이 성립될 것입니다.”
대신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관이 혼인서약서와 펜 두 자루가 놓인 금색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여기, 이 펜으로 각자의 서명란에 이름을 정확히 쓰시면 됩니다.”
신관의 말에 진이 먼저 깃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잠깐, 이건 록스버그 공작님의 것입니다.”
신관이 말에 진이 고갤 들어 신관의 얼굴을 확인했다.
“따로 써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각자 정해진 깃펜에 축원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진이 제가 들고 있던 깃펜을 천천히 살핀 다음 쟁반 위에 놓았다. 그리곤 옆에 놓여 있던 깃펜을 들어 혼인서약서에 이름을 써 넣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진 세인트 루이스 로이슈덴.
서명을 끝낸 진이 깃펜을 내려놓았다.
“이름이 뭐지?”
로엔 쪽으로 움직이던 신관이 걸음을 멈추곤 당황한 얼굴로 진을 올려다보았다.
“카를입니다, 로이슈덴 공작님.”
쟁반을 든 신관, 카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저를 쏘아보는 은청색의 눈동자가 제 목을 물어뜯을 듯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카를 신관, 고맙다.”
잔뜩 긴장한 채 서 있던 카를이 진의 인사에 안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최대한 빨리 이 자릴 벗어나고 싶은 듯 로엔 쪽으로 쟁반을 내밀었다.
로엔이 반지를 낀 손으로 깃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혼인서약서에 제 이름을 써 넣기 시작했다.
로엔 S 록스버그.
진의 이름 옆에 써 넣은 제 이름을 보며 로엔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깃펜을 든 손가락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카를 신관님, 고마…… 읏!”
깃펜을 내려놓으려던 로엔이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새하얀 손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로엔은 놀라 숨을 삼켰다. 짙은 혈 향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서 지혈을 하지 않으면 대신전에 모여 있는 귀족들이 위험해진다. 그녀 몸속의 혈독화는 향만으로도 사람의 목숨을 앗을 만큼 강한 독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윽!”
가장 옆에 서 있던 카를이 머릴 감싸며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엔이 창백해진 얼굴로 제 손을 감싸 쥐려는 순간, 진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놓아…… 위험…….”
그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힘을 준 순간, 놀랍게 진이 고갤 숙여 왔다. 그리곤 붉은 피가 맺힌 제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맹수가 상처 난 부위를 치료하고 소독하듯 방울방울 맺힌 피를 핥아 삼키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당황한 로엔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이미 그가 제 피를 삼킨 뒤였지만, 이제라도 저에게서 그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휘청!
긴 드레스 때문에 뒷걸음치던 로엔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 했다. 진이 재빨리 손을 뻗어 로엔의 허리에 팔을 감고는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놓아요. 제발…….”
목소리가 떨렸다. 로엔은 그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그를 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팔은 그녀를 옭아매듯 단단히 끌어안을 뿐이었다.
“진정해. 괜찮으니까.”
“아니에요. 위험해요. 내 피는…….”
창백해진 얼굴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목소리까지 바들바들 떨렸다.
로엔이 고갤 가로저으며 뭔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급기야 진이 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곤 말릴 새도 없이 제 손가락을 삼켰다.
순식간에 뜨겁고 말캉한 감촉이 손에 느껴졌다. 진은 지혈이라도 하려는 듯 힘껏 빨기까지 했다.
“안 돼요. 제발……. 안 돼.”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진의 행동에 로엔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하지만 진은 로엔이 느끼는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본격적으로 흘러나오는 피를 삼킬 뿐이었다.
그가 피를 빨아낼수록 공기 중에 떠돌던 향이 서서히 사라졌다.
‘어쩌지? 그가 내 피를…….’
제 혈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중독 증상을 일으켰다. 그런데 제 피를 직접 삼키기까지 하다니…….
충격이 너무 크면 현실감이 사라지는 모양이었다. 로엔은 그의 입에서 제 손가락을 거둬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 순간 혈독화가 새겨진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의식 밑바닥에 깊이 침잠해 있던 장면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복된 마차에 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로엔은 더 이상 떠올리지 않기 위해 고갤 가로저었다.
하지만 늦었다. 한 번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주위를 물들이던 새빨간 피와 죽음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달콤하던 꽃 향까지 함께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