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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32화 (133/201)

132화

“긴장되세요?”

세실의 물음에 생각에 잠긴 얼굴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로엔이 고갤 들었다. 마차가 대신전에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되는지 손끝이 차가워졌다.

세실은 좁은 마차 안에서 로엔의 드레스가 구겨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쓰며, 연신 드레스를 정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제 주인이 눈에 띄게 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걱정스럽게 물어 온 것이다.

“아니야.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데 라이칸은 어디에 있지?”

아침부터 보이지 않아 그의 행방이 신경 쓰였다.

“라이칸 님이라면 벌써 대신전에 가 계실 거예요.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주위를 살펴보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래?”

“왜요? 라이칸 님께 긴히 전할 말이라도 있으셨어요?”

“그건 아닌데, 아침 내내 보이지 않아서. 대신전에 있다니 가면 볼 수 있겠지.”

“그래요. 가면 만나실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런데 로이슈덴 공작님은 도착하셨을까요?”

“결혼식이 정오니, 지금쯤 도착하셨을 거야.”

그때 도로 위를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확연하게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세실 역시 알아챘는지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무슨 일일까요?”

긴장된 얼굴로 세실이 로엔을 올려다보았다. 로엔은 별일 아닐 것이라는 듯 세실의 손등을 토닥인 다음, 마차 창문을 열고 마부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지?”

“그게 도로 앞에 사람들이 많아서…….”

사람이 많다고?

로엔이 그제야 고갤 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다 대신전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 손엔 타라 여신의 상징인 장미꽃이 들려 있었다.

“록스버그 공작님이다.”

로엔과 눈이 마주친 사람 하나가 소리쳤다. 그리고 그 소리에 제국민들이 손에 들고 있던 장미꽃을 도로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마차가 가는 길이 장미꽃으로 채워졌다.

“축하드립니다, 공작님.”

“타라 여신의 축원을 받으세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타라 여신의 축원을 받으소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제국민들의 목소리에 로엔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다.

로엔은 장미를 든 그들의 손목에 노란 리본이 묶여 있음을 발견했다.

노란 리본은 록스버그 공작가가 운영하는 후원 단체의 상징이었다. 즉 지금 로엔에게 축원의 말을 건네는 사람들은 공작가의 도움을 받은 제국민들이었다.

“주인님, 사람들이 주인님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러 나왔나 봐요.”

세실이 창밖으로 고갤 쭈욱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그리곤 그들의 행렬이 대신전까지 이어지는 길목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걸 보곤 서둘러 그 사실을 로엔에게 전했다.

“그래. 축하해 주러 나왔네.”

기대하지 않았던 광경에 묘하게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지금껏 사람들을 도우면서도 한 번도 그 대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보답해 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새벽에 눈을 뜬 후로 내내 초조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로엔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그들의 축하 인사에 화답했다.

천천히 달리던 마차가 또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마차는 제국민들이 만들어 놓은 장미꽃 길을 경쾌하게 달려 나갔다. 창문으로 진한 장미 향이 밀려들었다.

“귀족들만 그렇지, 제국민들은 모두 주인님을 응원하는 모양이에요.”

세실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느새 마차가 대신전 앞에 멈췄다.

마차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던 라이칸이 서둘러 마차 문을 열자, 세실이 먼저 내렸다. 그리곤 손에 들고 있던 붉은 카펫을 마차 아래 펼쳤다.

“이제 내려오셔 돼요.”

세실이 옆으로 비켜서자, 라이칸이 로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두 사람 다.”

라이칸의 손을 잡고 내린 로엔은 대신전으로 올라가는 수 십 개의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계단의 끝, 대신전의 문 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진 로이슈덴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의 검은 베일이 아닌 새하얀 베일 너머, 진이 계단을 내려오는 게 보였다.

그의 의상은 로이슈덴 공작가의 상징인 검은색 제복에 금색 술이 장식되어 있었다. 넓고 단단한 어깨 위엔 금빛 휘장이 걸쳐져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진의 시선은 로엔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마치 오랫동안 제 신부를 기다려 온 신랑처럼 그의 표정에선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기다렸는데 늦었군.”

로엔은 대신전 앞의 시계탑을 확인했다. 아직 정오가 되려면 20분이나 남아 있었다. 그런데 늦었다니.

“내겐 널 기다리는 시간이 아주 길게만 느껴져서.”

로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진이 멋쩍게 웃었다. 그리곤 로엔의 손을 잡더니 그녀의 손등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장갑을 낀 손등 위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따사로운 햇살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부서졌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은 찬탄과 경외로 가득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왜 말이 없지? 결혼식 내내 나와 말하지 않기로 규칙을 세운 건 아닐 테지?”

그의 농담에 로엔이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대신전까지 오는 내내 사람들을 봤어요.”

로엔의 말에 진의 시선이 대신전 주위에 모여 있는 제국민들에게 향했다.

“나도 봤어. 너를 위해 타라 여신의 꽃을 뿌리던 것도.”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뭔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는…….”

하지만 그녀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말은 그게 다였다. 대신 진이 그녀가 품고 있던 말을 했다.

“축하해. 네 소원이 이루어졌군. 타라 여신이 축원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고 하더니.”

서늘하게 보이던 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그의 인상을 바꾸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그의 미소는 로엔의 눈을 사로잡았다.

“맞아요. 소원이 이루어졌어요.”

“참고 견딘 보람이 있군. 기도실에서도 티룸에서도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참은 보람이 있었어.”

진의 농담이 농담 같지 않아, 로엔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진 로이슈덴이 이렇게 농담을 할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엔은 부드럽게 풀어진 그의 얼굴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진 로이슈덴은 굉장히 기분 좋아 보였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표정만 본다면 이건 1년간의 정략혼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과 죽고 못 사는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같았다.

심장이 간질거리자 로엔은 괜스레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가 상상이나 할지 모르겠군요. 수도사보다 금욕적이라는 아드리안 제국 최고의 냉미남이 야하기 짝이 없다는 걸 말이에요.”

그 순간 진이 로엔 쪽으로 고갤 숙여 왔다. 그리곤 그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새하얀 베일을 쓴 로엔의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수도사라 불릴 정도로 금욕적인 날 물들여 놓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누가 무슨 책임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실이 로엔을 불렀다.

“주인님?”

그제야 로엔이 세실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녀는 곧 지금 두 사람이 제국민들이 모두 보고 있는 대신전 앞에서 실랑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세실. 무슨 일인데?”

로엔은 태연한 척 서 있는 진에게 살짝 눈을 흘긴 다음,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세실과 라이칸을 번갈아 보았다.

“사랑싸움은 나중에 하시고요, 우선은 가셔야 할 것 같아서요. 결혼식이 곧 시작하려는지 신관님이 저 위에서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거든요.”

로엔의 시선이 계단 위에 서 있는 신관에게 향했다. 초조한 듯 연신 흘끗거리는 모습에 괜스레 미안해졌다.

“이제 갈까? 결혼식에 지각할 순 없으니까.”

진이 평소의 서늘한 얼굴로 로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단정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로엔은 그의 이마에 손을 뻗는 대신, 제게 내밀어진 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그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사락, 사락. 불어온 바람에 새하얀 베일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마치 요정의 짓궂은 장난처럼 베일이 진의 몸을 휘감았다.

그게 못내 신경이 쓰여 로엔이 손을 뻗어 그의 몸에 감긴 베일을 잡아당겼다.

“어엇!”

“괜찮나?”

손에 힘을 너무 준 나머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던 로엔을 진이 팔을 뻗어 허릴 감싸 안았다.

“아, 괜찮아요. 베일이 자꾸만 몸에 감겨서…… 아읍!”

순간 로엔은 숨을 삼키며 진을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진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쿵쿵, 무섭게 뛰는 심장 소리가 바로 귓가에 들려왔다. 진이 로엔을 두 팔로 안아 올렸던 것이다.

로엔은 도저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제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진이 저를 품에 안아 들다니.

“지금 뭐 하시는……. 내려 주세요. 사람들이…….”

“넘어질 것 같아 불안해서 내가 안 되겠어. 그냥 얌전히 있어.”

“하지만 결혼식장에 안겨 들어갈 수는 없다고요. 지금까지 그런 전례가…….”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야. 그리고 다들 이해하겠지. 신랑이 제 신부가 될 사람을 끔찍이 아끼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진이 태연하게 말하곤 로엔을 안은 채 계단을 마저 올랐다.

계단 끝에 도착할 무렵, 로엔은 당연히 그가 내려 줄 줄 알았다. 하지만 로엔의 예상은 너무도 쉽게 빗나갔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

신관에게 묻자 충격을 받은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신관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 네.”

신관이 서둘러 대신전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진은 로엔을 품에 안은 채 결혼식이 진행될 대신전 안까지 들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결혼식에 참석한 귀족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동시에 예식 집전을 위해 서 있던 대신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공작님.”

아니, 이 남자가 진짜!

로엔이 난처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진을 불렀다.

“내려 줄 생각 없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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