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피?”
“네. 누구의 것인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타라의 연에 매달린 공작새에 피가 흥건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도 보였습니다.”
피가 묻은 타라의 연이라니. 조금 불길했다.
“이건 그 형태가 불분명하긴 한데, 동그란 원통형의 물건이었습니다. 호리우스의 눈으로 된 물건인 건 확실한데, 복잡한 주술이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혹시 그런 물건을 가지고 계십니까?”
로엔이 고갤 가로저었다.
“아니요. 호리우스의 눈으로 된 원통형의 물건이라면 본 적도, 소유한 적도 없어서.”
거기다 복잡한 주술까지 걸려 있다니.
‘대체 뭘까?’
대신관 역시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순순하게 말했다.
“저도 공작님께서 그런 물건을 갖고 계실 것이라 생각하고 물은 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런 물건을 혹여라도 갖게 되신다면 조심하십시오. 뭔가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거든요.”
대신관이 신탁을 받았던 때를 떠올리는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의 태도에 로엔이 주먹을 움켜쥐려 하자, 진이 그녀의 손을 맞잡아 왔다.
고갤 돌리자 진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이젠 너의 모든 순간에 내가 함께일 테니까.”
그의 말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일렁이던 불안이 사라졌다.
대신관이 보았다는 신탁의 내용은 어쩌면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와 연관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저주를 푸는 과정 중에 누군가 피를 흘리게 되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풀기 위해선 진 로이슈덴이 필요했다. 아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품고 있는 드래건의 심장이 필요했으니까.
이번엔 불안과는 다른 감정이 일렁거렸다. 더 진득하고 어두운 감정이었다. 쉽게 떨쳐 버릴 수도 없는.
“그럼 제가 전할 말을 다 한 것 같으니 내일 정오에 뵙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대신관과 신관은 두 사람에게 예를 갖춘 뒤 급히 자릴 떴다.
“우리도 그만 갈까?”
진이 로엔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동안 로엔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대신관이 보았다는 신탁의 내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형태를 부풀려 오기 시작해서였다. 아마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곧 가까워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 * *
어둠이 찾아든 대신전에 그림자 하나가 스며들었다.
그림자는 대신전의 복잡한 길을 익숙한 듯 지나쳐 신관들이 머무는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문을 연 신관이 그림자를 향해 허릴 숙였다. 방으로 들어간 그림자는 달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 앉아 신관을 바라보았다.
“대신관이 록스버그 공작에 대해 중요한 말을 했다지?”
“조만간 록스버그 공작이 그것을 찾을 듯합니다.”
“그것?”
“네. 폐하께서 간절히 찾고 계셨던 그 물건 말입니다.”
“대신관이 그런 예언을 했다는 건가?”
“네. 다행인 건 대신관을 비롯해 두 공작들 역시 그 물건의 정체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들어진 원통형의 물건이라고 했을 때,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습니다.”
신관의 설명에 그림자가 고갤 끄덕였다.
“장소는 말했나?”
“대신관도 그것까진 보지 못한 듯했습니다. 하지만 록스버그 공작에게 사람을 붙여 놓는다면 문제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오늘을 무슨 일로?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을 하셔서 놀랐습니다. 정보 전달은 언제나처럼 전서구를 통해서 하는 것이라. 그리고 사실 내일 있을 결혼식 준비로 새벽에 나가 봐야 해서요.”
신관이 어서 빨리 돌아가라는 말을 돌려 말했다.
“폐하께서 이걸 너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셨다.”
그림자가 품 안에서 상자를 꺼내 신관에게 건넸다.
“이게 무슨…….”
“깃펜이다.”
상자를 받아 든 신관이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림자의 말처럼 은으로 된 펜촉이 달린 깃펜이 들어 있었다.
“이것으로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아무것도. 다만 내일 결혼 서약을 이것으로 하게 하면 된다.”
“이것만 식장 안에 가져다 놓으면 되는 것입니까?”
“그래. 그리고 꼭 록스버그 공작 쪽으로 가져다 놓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신관이 그림자가 건넨 상자를 서랍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림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검은 로브가 흔들렸다.
“저기, 라딘 님?”
신관의 부름에 그림자가 돌아섰다.
“뭔가 착각한 것 같군. 위대한 예언가인 라딘 님은 내 선조일 뿐, 동일인이 아니다.”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는 겁니까?”
신관의 질문에 그림자가 잠시 망설이다 씹어 삼키듯 말했다.
“씨어(Seer).”
자신을 씨어라고 했던 자가 문을 열고 방을 나왔다.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움직이던 그가 한 순간 걸음을 멈췄다. 대신전의 지하 기도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신탁인 건가?’
이끌리듯 발길을 옮기려던 씨어가 강한 힘에 발이 묶인 듯 걸음을 멈췄다. 속박 주술이었다.
대체 누가?
“제길. 방해자가 따라붙은 건가.”
씨어가 제 발을 묶은 주술사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대신전 안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그 순간 강하게 불어온 바람이 깊게 눌러쓴 검은 로브의 후드를 벗겨 냈다. 새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고목같이 마르고 버석한 얼굴을 덮고 있었다.
주름진 눈꺼풀이 위로 밀려 올라가자, 생명력이라곤 없는 불투명한 눈동자가 달빛에 비쳐 들었다.
씨어는 고대어로 주문을 외운 다음, 손을 뻗어 제 발아래 나타난 주술을 파괴했다. 순식간에 그의 발을 묶고 있던 속박 주술이 사라졌다.
씨어가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대신전의 지하로 들어가려다 다시 발을 멈췄다. 이미 빛은 사라지고 대신전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한발 늦었군.’
속박 주술에 걸려 있는 사이, 대신전 지하에서 흘러나온 빛의 정체를 알아볼 기회를 놓친 것이다.
씨어는 흘러내린 후드를 다시 깊게 눌러썼다. 그리곤 서둘러 대신전을 빠져나갔다. 이번엔 늦었지만 조금 전 만났던 신관을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면 그만이었다.
이내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 짙은 어둠이 밀려들었다.
* * *
대신전은 이른 아침부터 록스버그 공작가와 로이슈덴 공작가의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인파들로 가득했다.
결혼식이 정오부터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이례적인 움직임이었다. 그 정도로 지금 칼라일은 두 가문의 결혼식에 수많은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와 더불어 대신전의 신관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현 황제의 대관식 이후 대신전에서 치러지는 가장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신관들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난 신관들은 정오에 있을 결혼식을 차질 없이 준비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대신전 주변에 성수는 뿌렸나?”
대신관의 물음에 신관이 재빨리 대답했다.
“빠짐없이 다 뿌렸습니다.”
“결혼식 준비는?”
“거의 끝나 갑니다. 그런데 혼인서약서는 준비하셨습니까?”
신관의 물음에 대신관이 서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건넸다.
“폐하께서 보내셨다. 잊지 말고 챙겨야 할 것이다.”
두루마리를 받아 든 신관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서 있었다.
“뭐지? 할 말이라도 있나?”
“그게, 절차가 맞는 건가 해서요. 평소라면 혼인서약서에 폐하의 승인을 받는 건 결혼식이 끝난 뒤가 아닌가 해서.”
대신관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개인 사정으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신다는 전갈을 보내오셨다. 그래서 미리 승인서를 보내온 것이고.”
대신관의 설명에 그제야 납득에 된 듯 신관이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신관이 방을 나가자, 대신관은 굳은 표정으로 창가로 향했다.
신전 주변엔 두 가문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몰려든 제국민들로 가득했다. 도로를 따라 선 제국민들의 손엔 타라 여신의 상징인 붉은 장미가 들려 있었다.
“록스버그 공작가와 로이슈덴 공작가의 결합이라. 괜찮은 걸까?”
평온하던 대신관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의 걱정은 황제가 승인서를 보내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황실인 존더부르크가를 제외하고 록스버그 공작가와 로이슈덴 공작가는 아드리안 제국의 근간과도 같은 명문가였다.
무엇보다 로이슈덴 가문은 황위 계승 서열 2위에 해당하는 황가의 혈족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결혼식에 황제가 참석하지 않다니.
어떤 이유가 있든, 그건 황제가 두 가문의 결합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명백히 하는 것이었다.
‘반역.’
대신관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한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생각은 한 달 전 그를 찾아 온 진 로이슈덴으로 이어졌다.
「200년 전 로이슈덴 공작가에 내려진 신탁을 파기하길 요청한다.」
그 당시 대신전에 내려진 신탁의 내용은 황제가 될 존더부르크 1세를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위대한 왕이 신성한 피를 가진 짐승을 길들인다. 곧 그것이 시작이며, 아드리안 제국의 영광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신탁을 이행한 자가 바로, 로이슈덴 공작이란 뜻이었다.
전설의 켈피를 길들이고 지금은 알려지지 않은 검은 드래건을 수하로 부리던 로이슈덴 공작은 제게 내려진 신탁을 비밀에 붙였고, 그 비밀은 아직까지 역대 대신관과 로이슈덴 공작가의 장자를 통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현 로이슈덴 공작이 200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신탁을 파기하길 원하고 있다.
하지만 대신관은 진 로이슈덴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선대 대신관과 로이슈덴 공작이 함께 신탁을 봉인한 주술은 제 힘으로 파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하아, 이를 어쩐다.”
선대 대신관의 신성력을 이용해 봉인된 신탁이 있는 지하 밀실에 결계를 쳐 놓았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밀실의 문이 열리고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오랫동안 봉인을 해 둔 신성한 맹약이 깨진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대신관은 결계가 깨어지고 신성한 맹약으로 이뤄진 신탁이 곧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만약 이 사실이 폐하에게 알려진다면…….”
불안이 엄습했다. 예기치 않은 운명이 2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궤도를 찾아 움직이려 하고 있다.
하지만 대신관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신성한 맹약 안에는 금언의 조약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황제에게도, 그리고 맹약의 주인인 로이슈덴 공작가의 장자에게도 사실을 전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달 전 진 로이슈덴 공작이 저를 찾아왔을 때처럼 신탁을 무효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만약 그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 일이 생긴다면, 아드리안 제국은 피로 물들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전쟁의 끝에서 웃는 자는…… 원래의 신탁의 주인이 될 것이고.
이 모든 운명의 열쇠를 쥔 자는 황제가 아니라, 진 로이슈덴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