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로엔은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그의 눈동자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불안이 엄습했다.
얼굴을 가렸던 베일도, 가리개도 없는 상태로 그와 마주하자 긴장이 됐다. 심해처럼 깊은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제 영혼까지 꿰뚫을 듯 날카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해 줄 테니, 잘 들어.”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경고처럼 들렸다. 로엔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고갤 끄덕였다.
“내가 믿는, 내가 믿을 유일한 존재다. 그러니 날 배신하다면 어떻게 될지 나도 알 수가 없어.”
다섯 살 나이에 그는 그가 가장 믿었던 아버지에게 배신당했다. 그 후의 삶은 몸속에서 제 힘을 키우려던 존재와 끝없이 싸워야 했고.
그렇게 반역이란 죄를 등에 지고, 제 비밀을 감추기 위해 사람 속에서 멀어져 철저히 혼자 견뎌야 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믿는 존재가 생겼다. 그 의미가 얼마나 무겁고, 겁나는 것인지 진만큼이나 로엔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진이 로엔의 턱을 놓아주었다.
로엔은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무겁게 내려앉는 감정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이 쓰였다.
‘내가 왜 이러지? 왜 갑자기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
로엔은 감정을 추스르려 애썼다. 하지만 자꾸만 목에 걸린 감정이 그녀를 괴롭혔다.
‘혹시 이게 죄책감인 건가?’
타인에게 그 어떤 기대감도 없는 진 로이슈덴의 진심이라 마음이 쓰였다. 그런 그가 꾹꾹 눌러 삼키며 쏟아 낸 감정이라고 생각하자, 그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제 돌아가도 좋다.”
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로 돌아가 다시 책상에 앉았다.
로엔은 더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계약은 파기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진은 고갤 들지도 않은 채 말했다. 마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음을 말하는 듯했다.
심장이 술렁거렸다.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내가 믿는, 내가 믿을 유일한 존재다. 그러니 날 배신하다면 어떻게 될지 나도 알 수가 없어.」
분명 로엔 록스버그에게 한 말이었다. 그런데 진의 눈빛과 태도에서, 마치 제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로엔과 시모네타가 같은 사람이란 걸 아는 것처럼.
그렇게 들렸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가 진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순순히 저를 보내 줄 리 없었다. 그리고 배신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경고할 일도 없었고.
그의 성격상, 지금 이 순간 검으로 제 목을 베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를 배신한 자에겐 자비도, 배려도 없으니까.
로엔이 느낀 진 로이슈덴은 용서를 모르는 자였다. 그래서 지금껏 그의 혈족인 아버지조차도 용서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가 진실을 알았다면, 저를 용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돌아오면, 날 찾아와.”
서재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뒤에서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엔은 문손잡이를 놓고는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책상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진이 보였다.
햇살이 스며든 오후의 햇살이 그를 비추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단정한 그의 이마에 흘러 내려와 있었다.
신이 빚어 낸 완벽한 피사체.
로엔은 다시 한 번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감탄했다. 그리고 묘하게 흥분이 됐다.
“연락드리겠습니다.”
로엔이 진 로이슈덴을 행해 예를 갖췄다.
고갤 숙인 동안, 로엔은 ‘과연 그에게 시모네타의 모습으로 연락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아마 없을 테다.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율배반적이게도 로엔은 시모네타의 모습으로 그를 다시 만나고도 싶었다.
검은 베일이나, 얼굴 가리개로 제 얼굴을 숨기지 않고 본 모습으로 그를 마주하길 바랐다.
고갤 든 로엔이 미련을 잘라 내듯 서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진은 로엔을 바라보았다. 마지막까지 흔들리던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각인처럼 심장에 박혀 들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자꾸 흔들다 보면, 단단하게 세웠던 벽이 서서히 무너져 내릴 터였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진실을 말할 날이 언제가 될지, 궁금하군.”
* * *
로엔은 검은 베일 너머로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진을 내려다보았다. 성수로 제 발을 씻기고 있는 진은 다행스럽게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며칠 전 시모네타의 모습으로 그를 방문했을 때,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이 묘하게 신경 쓰였었다. 하지만 변함없는 태도로 저를 대하는 진의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예민해진 데에서 오는 기우였던 모양이다.
로엔은 그제야 안도하며 날이 서 있던 긴장을 늦췄다.
첨벙, 첨벙.
물소리가 기도실 안을 울렸다.
사흘에 한 번씩 행해진 타라 여신의 축원 의식이 오늘로써 일곱 번째를 맞았다. 그리고 내일이 바로, 로엔 록스버그와 진 로이슈덴의 결혼식이었다.
이 당혹스러운 의식 역시 오늘부로 끝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왜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 로이슈덴은 첫 번째 의식 이후, 로엔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타라 여신의 축원을 받는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지금처럼 성수로 발을 씻기는 것 외엔 손도 잡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이 3주 내내 그녀를 피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하루에 한 번, 애프터눈 티타임에 나타나 그녀와 함께 차를 마셨다.
문제는 차를 마시는 동안 깍듯이 예를 갖추며 손끝 하나 스치는 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전엔 눈만 마주치면 입술을 겹치고 끌어안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굴더니. 이젠 그런 것엔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차가운 얼굴을 유지했다.
그는 세이지가 말했던 파렐 수도원의 수도사라도 된 것처럼 굉장히 금욕적으로 굴었다.
그 덕분에 모든 게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하지만 얼마 전부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중한 수도사처럼 구는 진과는 달리, 그와 닿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로엔 쪽이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에 손을 얽고 싶어졌고, 정중하게 예를 표하는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도 제 발을 성수로 씻어 내는 그를 바라보며, 몸속이 들끓는 열기를 잠재우려 애쓰는 중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다고 생각하자, 실수로라도 그와 닿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로엔의 머릿속은 온통 음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금단 증상이 일어난 건지…….’
진 로이슈덴이 뭔가 술수를 부린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로엔은 머릿속에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밀어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진이 성수가 든 그릇을 옆으로 치우는 게 보였다. 이제 마른 수건으로 로엔의 발을 닦으면 의식은 끝이 난다.
로엔은 능숙하게 물기를 닦아 내는 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아, 미치겠네.’
커다란 손이 예민한 발끝을 스칠 때마다 입안이 열기로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로엔은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시선을 주며 붉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진이 수건을 내려놓자 그녀는 안도하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다 끝난 모양이네요.”
로엔은 지난 의식 내내 그래 왔던 것처럼 벗어 놓았던 실크 스타킹에 손을 뻗었다. 제 속내를 진에게 들키기 전에 기도실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잠깐, 가만히 있어.”
하지만 진의 손이 더 빨랐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로엔의 손을 밀어내더니, 진이 스타킹을 집어 든 것이다.
“오늘로써 마지막이니 내가 해 주고 싶어서.”
“네? 하지만…….”
그의 제안에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로엔의 머릿속에 어떤 음란마귀가 있는지 모르는 진은 무해한 얼굴로 스타킹을 직접 신겨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망설이는 로엔을 보며 그가 덧붙였다.
“네가 불편하다면 눈을 감아도 되고.”
눈을 감는다고 하는 걸 보니, 그는 로엔이 제 다리를 보게 되는 걸 꺼린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꺼리는 진짜 이유가 그의 손이 맨다리에 닿는다고 생각하자 도저히 견뎌 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지만.
사실 성수로 발을 씻겨 주는 동안에도 발끝이 곱아들고 아랫배에 열이 고여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손이 종아리를 스치고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허벅지에 닿는다고 생각하자 온몸이 홧홧해졌다.
정말 이러다가 그를 기도실 바닥에 밀어 넘어뜨리곤 그에게 강제로 키스라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로엔.”
그의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제 이름을 듣는 순간, 준비해 놓았던 거절의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이건 정말 반칙이었다. 이런 순간에도 저렇게 순진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다니.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타고난 바람둥이인 건가?’
하지만 순한 표정의 그를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정말 순수한 의도로 해 주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아마 지금 이 순간 가장 큰 문제점은 잘생긴 얼굴에 넘어간 로엔일 것이다.
「내가 믿는, 내가 믿을 유일한 존재다. 그러니 날 배신하다면 어떻게 될지 나도 알 수가 없어.」
로엔이 시모네타로서 진 로이슈덴을 찾아갔을 때 그가 했던 말이었다.
아마 제 이상 반응의 시작을 찾는다면, 이때부터인 듯했다. 그에게 이유 모를 갈증을 느끼고, 또 그 갈급한 열기에 안달이 나기 시작했던 건.
로엔이 여전히 입술만 달싹이자, 허락으로 받아들인 진이 로엔의 발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리곤 제 무릎 위에 그녀의 발을 올려놓고는 발끝에 스타킹을 신겼다.
“처음이라 서툴 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상 여인의 스타킹을 신겨 주고 다닐 만큼 살갑지도 않았으니까.
“처음치곤 괜찮은데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다. 하지만 실크의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발을 감싸자, 느낌이 이상했다.
맨살에 그의 뜨거운 손과 차가운 천이 닿는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열기가 온몸으로 확 번져 나갔다.
이젠 익숙해진 아랫배의 아릿한 감각이 그가 붙잡고 있는 발끝까지 빠르게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