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죄송합니다, 공작님.”
로엔은 우선 사과부터 했다.
“무엇에 대한 사과지?”
이 남자, 이렇게 서늘하고 냉정한 성격이었나?
로엔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저를 쏘아보는 진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해 보니 진 로이슈덴은 처음부터 냉혹하고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그동안 다정한 모습만 보여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어이없게도 로엔은 지금의 서늘한 태도를 통해 진 로이슈덴에게 로엔이 얼마나 예외적인 존재였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설명할 생각이고요.”
로엔이 평정심을 되찾은 듯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진 역시 로엔의 변화를 읽은 듯 날카롭게 세웠던 날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좋아.”
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책상을 돌아 소파에 자릴 잡고 앉았다.
“네 얘길 들어 보도록 하지. 그러니 너도 앉아. 문 앞에 서서 여차하면 도망갈 것처럼 굴지 말고.”
“제가 언제 그랬다고…….”
로엔이 발끈하자 진의 입가에 설핏 장난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순간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땐, 그의 미소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럼 여기 와 앉아.”
로엔이 진을 쏘아보며 성큼성큼 걸어와 그의 맞은편에 자릴 잡고 앉았다.
“됐죠?”
“믿도록 하지. 이제 이유를 말해 보실까?”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제야 그의 도발에 제가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아서다.
‘제길, 성질을 죽였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후회해도 늦은 뒤였다. 그의 의도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은 탓에 여차하면 도망치려던 계획은 이미 어그러진 것이다.
“소문을 들었어요. 공작님과 록스버그 공작님이 결혼하신다는.”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예요. 오해받기 싫어서 제가 록스버그 공작저로 공작님이 보내신 편지를 보낸 거죠. 마침 봉투엔 누구한테 보냈는지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더라고요.”
로엔이 뻔뻔하게 턱까지 치켜들곤 진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차분해 보였지만, 심장은 긴장으로 무섭게 뛰었다.
‘속을까? 속아 넘어갈까? 아니, 제발 속아 넘어가라.’
로엔은 눈을 질끈 감고는 간절하게 빌었다.
진은 그런 로엔을 보며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로엔은 조금 전 그녀가 뱉어 낸 말속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눈치였다.
무엇보다 제가 친 계략에 넘어갔다는 사실 또한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이제 그만 모르는 척 넘어가 줄까?’
진은 그만 놀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재빨리 지웠다. 그리곤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 때문이란 거지?”
“네.”
로엔은 밀려드는 안도감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공작님은 모르시겠지만, 질투라는 게 꽤 치졸한 감정이거든요. 만약에 나중에라도 록스버그 공작님께서 제가 공작님을 은둔자의 숲에서 몰래 만났다는 걸 알게 되신다면, 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져서요.”
“록스버그 공작이 질투에 눈이 멀어 널 죽이기라도 한다는 뜻인가?”
“당연하죠. 제 남자가 야심한 밤에 아무도 없는 숲에서 딴 여자를 만난다는데, 그걸 그냥 놔두겠어요? 사지를 찢어발겨도 속이 안 풀리죠.”
로엔이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진을 쏘아보았다.
그런데 진의 표정이 묘했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가 자꾸만 밀려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지? 왜 웃는 거지? 내 말이 그렇기 웃긴가?’
로엔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갤 갸웃했다.
“흠흠, 그래서 넌 랑케의 정보원은 아니란 뜻인 건가?”
“랑케의 정보원이요? 제가요? 당연히 아니죠.”
로엔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펄쩍 뛰었다.
“하지만 넌 랑케의 주인인 벤투스와 잘 아는 것 같던데?”
진의 물음에 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다.
“부채. 네가 페이라스모스들과 춤을 추며 내게 부채를 줬을 때. 그때…….”
“아아, 그때요? 당연히 벤투스 님과 친하죠. 제 의뢰인들 중에서도 가장 돈이 많으신 분이니까요.”
“랑케의 벤투스가 네 의뢰인이라는 건가?”
“네. 벤투스 님께서 이번에도 제게 아주 중요한 걸 의뢰하셨거든요. 사실 그래서 제가 당분간 칼라일을 떠나 있을 것 같아서, 공작님을 찾아온 것이고요.”
“칼라일을 떠나 있는다고? 대체 무슨 의뢰를 했기에 상점까지 닫고 간다는 건지 모르겠군.”
아직 의심을 내려놓지 않은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로엔을 살폈다.
“그건 의뢰인의 비밀이라 절대 알려 드릴 수는 없어요.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정말 거짓말에 소질이 있는 모양이었다.
“타이밍이 굉장히 절묘하군.”
진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마땅찮은 듯 로엔을 쏘아보았다. 그녀가 한 말들이 진실인지 알아내기 위해서인 듯했다.
“무슨 타이밍을 말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이에요. 당분간 칼라일을 떠나기 위해 상점 역시 닫아 둘 생각이거든요. 아마 오늘 자 신문을 보시면 제 말이 사실이란 걸 알게 되실 거예요.”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그레이트 모먼트지를 집어 펼쳤다. 그리곤 광고란에 떡하니 실린 기사를 진의 눈앞에 당당하게 내보였다.
신문 광고엔 시모네타의 만물상점이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문을 닫는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진은 눈으로 신문 광고 기사를 훑으며 웃음을 삼켰다. 오늘을 위해 신문에 광고까지 낸 그녀의 철저함에 혀를 내두른 것이다.
“그럼 내가 오해했다는 뜻이군.”
“당연하죠. 저는 절대 공작님과 한 약속을 깬 적이 없어요.”
“내 비밀을 랑케에 넘기지도 않았고, 정보원도 아니란 말이지?”
“네. 맹세해요.”
로엔은 단호한 표정으로 진을 바라보았다.
사실, 랑케가 제 소유이긴 했지만 제가 정보원인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도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게 아니라, 진에게 직접 들었으니 다른 누군가에게 비밀을 누설한 것도 아니었고.
“흐음.”
진이 생각에 잠긴 듯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진실 여부를 가늠하려는 모양이었다.
로엔은 초조함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생각보다 잘 풀려 가는 상황이었지만, 진 로이슈덴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니…….
“좋아.”
어? 지금 뭐라고 했지?
“널 믿도록 하지.”
말도 안 돼. 그가 내 말을 믿는다고? 이렇게 쉽게?
로엔은 너무도 쉽게 제 말을 믿겠다고 하는 진이, 반대로 믿기지 않았다.
‘뭐지? 왜 이렇게 불안하지?’
로엔은 그가 제 말을 믿겠다고 하는데도 초조함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제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더 있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내가 믿는다고 해도 불만인 것 같군. 아니면, 널 끝까지 의심해 네 목이라도 벨까?”
“아니요.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로엔이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했다. 그제야 사납던 진의 눈동자가 누그러졌다.
“언제 돌아오지?”
“네?”
로엔이 바보처럼 되묻자 진이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언제 돌아오냐고 물었다.”
“아아, 글쎄요. 아직은 정확하게 날짜가 정해지진 않았지만 의뢰자의 물건을 찾으면 바로 돌아올 생각입니다.”
로엔의 대답에 진이 고갤 끄덕였다.
“그런데 공작님.”
“말해.”
“그날, 약속이요. 왜 만나자고 하셨어요?”
이건 순수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그가 은둔자의 숲에서 만나자고 했던 이유가 너무도 궁금했다.
“소문 때문이지.”
소문? 갑자기 웬 소문?
“그게 무슨 뜻인지 저는…….”
“네 말대로 록스버그 공작과의 결혼이 결정된 마당에 너와 그런 계약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나도 곤란해지거든. 그래서 그 계약을 파기하려 했던 거야.”
계약의 파기라면, 서로가 곤란해질 때 서로를 돕자던 그 계약인 모양이었다.
“계약을 파기하자고 만나자고 한 거구나.”
바보처럼 그가 했던 말을 되뇌자, 진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당연한 것 아닌가? 너와 계약을 했을 땐 내가 신의를 지켜야 할 상대가 없었지만, 이젠 다르거든.”
한마디로 이제 진 로이슈덴에겐 신의를 지켜야 할 상대가 있으니, 계약을 더는 이행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돌려 말하자면 더는 딴 여자와 키스할 생각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순간 로엔의 귓불이 붉어졌다. 심장 위에 새겨진 혈독화 역시 뜨거워지며 짙은 꽃 향을 뿜어냈다.
“그렇죠. 이제 공작님에겐 결혼 상대가 있으니까요.”
“맞아. 내겐 결혼할 상대가 있지.”
서늘하던 진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 눈에 띄는 변화에 로엔은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궁금해졌다.
진 로이슈덴이 로엔 록스버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좋아하시나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진의 날카로운 시선이 로엔에게 못 박히듯 날아들었다.
로엔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게 왜 궁금하지?”
진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뜻인 것 같았다.
“호기심이 생겨서요.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으시던 분이 이 짧은 사이에 결혼을 결정하고, 그 상대에게 신의를 지키겠다고 하시니 당연히 호기심이 생기는 거죠.”
로엔은 최대한 가볍게 말하려 애썼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하셔도…… 읏!”
소파에 몸을 기대앉아 있던 진이 갑자기 몸을 세우더니, 로엔 쪽으로 몸을 기울여 왔다. 그리곤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강하게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