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로엔은 밀려드는 초조함을 애써 갈무리했다.
제 감정이 뭔지 정의 내리는 걸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면 제 마음속의 감정들을 부정할 필요도 없었고, 또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이기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었다. 어차피 끝이 날 관계고 감정이니, 그때까지만 모른 척 외면할 생각이었다.
“그럼……?”
“말 그대로, 호기심. 타라 여신의 축원을 받다 보니 새삼 궁금해져서. 평범한 레이디의 삶이. 단지 그것뿐이야. 그리고 곧 사라질 호기심이기도 하고.”
로엔은 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그제야 라이칸이 얼굴에 서렸던 그늘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저주가 사라지면 공작님의 몸속에 흐르는 혈독화가 정화될 겁니다. 그럼 평범한 삶을 사실 수 있을 테고요.”
그러니 그때까지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래, 그럴 거야.”
로엔은 주머니에서 검은 베일을 꺼낼까 망설였다. 진 때문에 베일 대신 얼굴 가리개만 하고 있는 탓에 제 감정을 갈무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자꾸만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아릿했다. 자칫했다간 혼란스러운 제 감정이 흘러넘쳐, 그 감정을 라이칸이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흔들려선 안 돼. 그가 주는 달콤함에 취해 내가 할 일을 잊어선 안 돼.’
그 순간 심장 부근에 새겨진 혈독화가 뜨거워지며 욱신거렸다.
최근 들어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고통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유독 거슬렸다. 마치 진에 대한 감정을 자각할수록 고통이 더 심해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랑케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로엔은 짓누르는 고통을 애써 감추며 화제를 돌렸다.
“벤투스 님께 대장간에 나타났다던 미치광이 노파에 대한 정보를 모아 달라고 요청해 놓았습니다. 수일 내에 게르피온에서 정보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칼라일에서 본 점성술사에 대해선 알아봤어?”
“그게, 조금 이상했습니다. 랑케의 비밀 장부에 건국기념일을 기점으로 아드리안 제국의 국경을 넘은 자들의 명단이 하나도 빠짐없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명단 안에 눈이 먼 점성술사에 대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그럼 국경을 넘지 않고 칼라일에 왔다는 건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인데.”
로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랑케의 정보망은 거미줄처럼 퍼져 있어, 점성술사의 행방을 놓칠 리 없었던 것이다.
“혹시 타국인이 아니라, 아드리안 제국의 사람인 건 아닐까요? 시골 영지에 있던 자가 건국절을 맞아 수도로 왔는지도 모르는 일이라.”
라이칸의 말에 로엔이 고갤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거야. 그 점성술사가 입고 있던 옷은 아드리안 제국의 것이 아니었어. 그리고 점성술사가 들고 있던 수정구. 그 수정구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그날 밤, 어디서 왔냐는 제 질문에 점술사는 이렇게 말했었다.
「게르피온에서 왔지. 별을 따라서. 아마 우린 또 보게 될 거야. 하늘의 질서가 어그러지고 있거든. 곧 여신의 파수꾼이 눈을 뜨게 될 거야. 그럼 그땐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거지.」
별을 따라왔다라.
분명 점술사는 여신의 파수꾼이 눈을 뜰 때 다시 만날 것이라 말했다. 그 표정과 분위기로 봐선 허투루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마치 제 운명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르피온에서 국경을 넘지 않고 아드리안 제국으로 올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그렇게 하면 점성술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후엔 외출을 할 생각이야.”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아니야. 시모네타의 모습으로 외출할 예정이라.”
시모네타란 말에 라이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만물상점은 당분간 닫는 게 아니었습니까?”
“계약 결혼이 끝날 때까지 닫아 놓을 거야. 하지만 그 전에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로엔이 창문의 커튼을 밀어젖혔다. 순식간에 비쳐 든 아침 햇살이 로엔의 얼굴을 비췄다.
그녀의 얼굴엔 약간의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 * *
오후의 햇살이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바람이 부는지 며칠 전 메리언이 공작 부인을 맞을 준비를 한다는 이유로 평소와 달리 밝은색으로 바꿔 놓은 커튼이 미풍에 흔들렸다.
서재에 앉아서 게르피온의 광산 채굴권에 관련된 서류를 살피던 진은 창문 밖으로 들려온 마차 소리에 고갤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시모네타 님.”
알렉의 목소리에 이어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알렉. 공작님과 약속을 했는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택 안으로 들어왔는지 더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자, 진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받은 후, 딱 1시간이 지난 시간이었다.
‘그렇게 강조하더니, 시간 약속 하나는 철저하다니까.’
회중시계를 다시 주머니 안에 밀어 넣고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복도를 따라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시모네타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와.”
이내 문이 열리고, 알렉과 로엔이 안으로 들어왔다. 진이 고갤 들자 알렉이 진을 향해 말했다.
“차를 준비할까요?”
“난 됐어.”
차갑게 울리는 목소리에 로엔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본능적으로 고갤 들어 진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고갤 든 것 같았는데, 그는 어느새 고갤 숙인 채 서류를 살피는 중이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의 태도에서 로엔은 제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불청객.
그리고 진 로이슈덴은 그 사실을 숨기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시모네타 님께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알렉이 고갤 돌려 로엔에게 의중을 물어 왔다. 분명 깍듯하게 예를 갖추고 있지만, 지난번 방문 때와는 달리 묘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시모네타가 불청객이 맞는 모양이네. 누가 같은 편 아니랄까 봐, 두 남자가 똑같이 거릴 두는 걸 보니.’
“저도 괜찮아요.”
로엔의 대답에 알렉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방문이 길어지는 걸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얼마 뒤에 있을 결혼식 준비로 바빠서.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굳이 덧붙일 필요 없는 말까지 꼭 집어 말한 다음, 알렉이 서재를 나갔다.
로엔은 입 안쪽을 깨물어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알렉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을 통해 시모네타가 로이슈덴 공작가의 불청객인 이유를 깨달아서다.
‘이 집 남자들, 은근 귀엽다니까.’
깍듯하게 예를 갖추면서도 마음을 준 사람에게 순종하는 모습이라니.
로엔은 웃음을 삼키며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러다 저를 쏘아보고 있던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바로 표정을 굳혔다.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시선을 마주친 채,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왜 왔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건 더는 나와의 계약을 유지하고 싶지 않다는 뜻 아니었나?”
은청색의 눈동자가 예리한 빛을 띠며, 그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리는 게 보였다.
‘약속과 계약이라.’
로엔은 재빨리 머릴 굴렸다. 그가 지금 말하는 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시모네타가 랑케의 정보원 신분으로 그의 비밀을 록스버그 공작에게 알렸다는 얘기일 테지?’
로엔은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하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설마 지금, 그 문제에 대해 추궁하려는 걸까?’
분명 시모네타가 랑케의 정보원이 맞는지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제가 약속을 지키지 않다니. 저는 그런 적…….”
우선 잡아떼는 게…….
“이젠 시치미까지 떼는군. 건국기념일 날, 은둔자의 숲에서 자정에 만나자던 전갈을 보냈는데 받지 못했다는 건가?”
“네?”
로엔의 눈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커졌다.
그가 말한 약속이 제가 알고 있는 그것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건국기념일 날 아침, 성인 의식에서 돌아온 제게 스미스가 진에게 온 편지를 건넸다. 그 편지엔 진이 말했던 약속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고.
그런데 지금 진 로이슈덴은 그 약속이 로엔이 아닌, 시모네타에게 보낸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이제야 생각이 나는 모양이군.”
“그러니까, 그게…….”
“랑케의 정보원이라고 하더니, 그 약속까지 주인에게 보고한 건가?”
“아니요. 저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뭐지? 약속 장소에 네가 아니라 록스버그 공작이 나온 이유 말이야. 아니, 아니다. 약속 장소에 나오기 전부터 록스버그 공작은 이미 그 약속에 대해 알고 있더군. 그리고 그 약속 대상이 네가 아니라, 공작이라고 단단히 오해하는 것 같았고.”
진의 말에 로엔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듯 혼란스러웠다.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군.”
“그런 게 아니라, 만나 뵐 수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우선 뭐라도 뱉어 놓고 봐야 했다.
“날 말인가? 왜지?”
“그게, 그러니까…….”
“머리 굴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그게, 그러니까.’란 말만 반복하지 말고. 그 말을 듣기 위해 네 방문을 허락한 게 아니니까.”
진의 서늘한 말투에 로엔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침착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의심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니 이렇게 바보처럼 구는 게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