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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26화 (127/201)

126화

양발 모두 맨발이 되었지만, 선뜻 그를 부르지 못했다.

맨발을 남자에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질 만큼 민망했다. 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이 부끄러운 순간을 참고 의식을 끝까지 치렀는지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다 됐나?”

로엔이 망설이는 사이, 초조해진 진이 물어 왔다.

“네. 이제 돌아서도 돼요.”

등을 보이고 서 있던 진이 로엔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곤 성수 그릇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앉았다.

그의 시선이 로엔의 새하얀 맨발에 닿는 게 느껴졌다.

‘이게 뭐라고.’

아직 시선밖에 닿지 않았는데도 온몸에 불이 나는 듯 뜨거웠다.

순식간에 귓불이 붉어져 로엔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도저히 그가 성수로 제 발을 씻기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였다.

팽팽한 성적 긴장감과 함께, 기도실에 때 아닌 야릇한 침묵이 흘렀다.

첨벙, 첨벙.

성수가 튀는 소리가 들렸다. 진이 손을 넣어 물의 온도를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시작할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손이 로엔이 한쪽 발에 닿았다. 그의 손이 발에 닿자, 로엔은 흠칫 몸을 떨며 발을 뒤로 물리려 했다.

하지만 진의 커다란 손에 붙잡힌 로엔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금방 끝날 거야. 그러니 긴장할 것 없어.”

남자에게 맨발을 붙잡힌 상태에서 어떻게 긴장하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로엔이 뾰족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치밀었던 항의의 말은 목구멍 속으로 삼켜졌다. 그의 귓불이 제 귓불보다 더 붉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제 발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긴장하지 말라고 하더니, 그는 저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다.

순간 맥이 탁 하고 풀리듯 안심이 됐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첨벙, 첨벙.

물소리와 함께 성수가 발을 적셨다. 민망해서 계속 시선을 피하고 있던 로엔은 어느 순간부터 의자에 앉은 채 홀린 듯 진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손에 붙잡힌 제 새하얀 발이 묘하게 적나라했다. 발일 뿐인데, 그에게 가장 내밀한 부분을 점령당한 느낌이었다.

“앞으로도 말해 줘.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난 모르니까.”

로엔은 뒤죽박죽된 머리로 지금 그가 별장에서의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게요.”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고요한 기도실 안에 물소리만 가득했다.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몸과 마음의 정화를 위해 타라 여신의 축원 의식을 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건 정화는커녕, 오히려 잠들어 있던 욕망을 부추기고 있었다.

외면하려 했지만 그의 커다란 손이 발에 닿을 때마다, 야릇한 열기가 아랫배 안쪽에 고였다. 짙은 갈망과 함께 그와 나눴던 키스가 떠올랐다.

‘미치겠네. 그나저나, 남자 입술이 왜 저렇게 야한 거야. 먹고 싶어지게.’

로엔의 시선이 모양 좋은 입술에 닿아 떨어질 줄 몰랐다.

그 순간 깨끗한 수건으로 발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낸 진이 고갤 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을 핥듯 바라보고 있던 로엔과 눈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불길이 일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열기가 어리며, 기도실 안을 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짙은 욕망이 두 사람을 삼킬 듯 일렁였다.

“제길.”

욕설을 뱉어 내는 그의 목소리에선 억눌린 욕망이 느껴졌다. 로엔은 얼굴을 붉힌 채 재빨리 그에게서 고갤 돌렸다.

“흠흠.”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정화 의식을 끝낼 때가 되었음을, 대신관이 알리고 있었다.

그제야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팽팽한 긴장감이 깨어졌다.

“돌아서 주시겠어요?”

로엔이 옆에 놓아두었던 실크 스타킹을 집어 들자, 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돌아섰다.

스타킹을 신는 로엔의 손끝이 떨렸다. 깨끗하게 씻긴 발이 발긋해진 걸 보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로엔은 진의 손이 닿았던 때에 느꼈던 감각을 외면하며 서둘러 가터벨트로 스타킹이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시켰다.

구두까지 마저 신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긴 드레스 자락이 가느다란 발목을 가려 주었다. 그제야 로엔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 됐어요.”

로엔의 목소리에 진의 넓은 어깨가 흠칫 떨렸다. 하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은 듯 다시 펴지더니, 로엔을 향해 돌아섰다.

서로에게 이끌리듯 또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아직 채 갈무리되지 않은 열기가 몸 안에서 일렁거렸다.

로엔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숨을 삼켰다.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맹렬한 감정을 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정말, 계속 화난 척하려고 했더니…….”

그가 뱉어 낸 말에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힘들겠지만, 최대한 참아 볼 생각이야.”

약속하듯 뱉어 내는 말들이 스스로 다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제 욕망을 눌러 삼키는 게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였던 탓이다.

무엇보다 그의 다리 사이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묵직하게 부풀어 있었다.

이러다 사흘에 한 번씩 타라 여신의 축원을 받는 동안 일을 치르는 건 아닌지, 불안할 정도였다.

똑똑.

그때 닫혀 있던 기도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식이 끝났으면,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밖에서 두 사람이 나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대신관이 급기야 두 사람을 부른 것이다.

“돌아갈 시간인 모양이군.”

진이 한발 앞서 기도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로엔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대신관과 신관 한 명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의식은 사흘 후 이 시간입니다.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대신관이 자릴 뜨자, 신관이 두 사람 앞에 섰다.

“입구까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신관이 앞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진은 신관을 따라 계단을 오르려다 걸음을 멈추고 로엔을 돌아보았다. 이내 조금 전 보았던 로엔의 구두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생각보다 높은 구두 굽이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조심해. 계단이 생각보다 가파르니까.”

로엔이 고갤 끄덕이자, 그가 한 발짝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반쯤 몸을 돌리곤, 아예 로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되겠어. 내 손을 잡아. 그 신발로 걷다간 발목이 부러질지도 모르니까.”

“아니요, 그렇게까지…….”

“내 품에 안겨 올라가고 싶지 않다면, 얼른 잡아.”

로엔이 진을 응시했다. 정말 손을 잡지 않으면 품에 안고 계단을 오를 기세였다.

결국 로엔은 진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계단 입구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신관의 시선이 그들의 맞잡은 손에 닿았다 서둘러 고갤 돌리는 게 보였다.

분명 전 같으면 민망해 손을 놓았을 테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붙잡고 있는 손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알아 버린 탓이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신관이 자릴 뜨자, 진은 로엔의 손을 잡고 긴 회랑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로엔이 곁눈으로 진을 보았다. 평소의 보폭이 아닌 로엔이 보폭에 맞춘 걸음이었다. 무엇보다 그 사실을 진 자신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마차는 어디에 있지?”

“라이칸이 시간 맞춰 돌아왔다면, 입구 바로 앞에 있을 거예요.”

“어딜 갔었나 보군.”

“랑케의 벤투스를 만나러 갔거든요.”

“흐음,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게르피온의 광산 채굴권에 대해 조언을 구했던 게 생각나는군.”

“교역 사업을 하려는 건가요?”

로엔이 그의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해야지. 정복 전쟁도 끝났으니 할 일도 없고. 말레 상단도 록스버그 공작가의 것이던가?”

“네. 소금과 후추 무역의 독점권을 갖고 있어요. 공작님 말씀처럼 정복 전쟁이 끝나면서 게르피온까지 그 영역을 확대할 계획이고요.”

“대단하군. 돈에 팔려 간다는 게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야.”

진의 목소리에 담긴 씁쓸함에 로엔이 고갤 돌렸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그 정도로 공작님이 가치 있다는 거죠. 록스버그의 돈은 넘치도록 많지만, 동전 하나라도 허투루 사용되진 않거든요. 그 가치만큼 값을 지불하죠. 라이칸이 왔네요. 그럼 사흘 후에 뵐게요.”

로엔이 진에게 예를 갖춘 뒤, 그가 붙잡을세라 서둘러 자릴 떴다. 더 진과 있다간 얼굴은 물론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다.

진은 멀어져 가는 로엔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 전까지 온기로 가득하던 제 손이 벌써 허전하게 느껴져서다.

‘중증이군.’

진은 제 감정에 어이없다는 듯 고갤 가로젓고는 그 역시 마차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제 손에 가득 찼던 새하얀 발의 감촉과 별장에서 그와 함께 보내고 싶었다던 로엔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정말 미친 모양이었다. 곁에 없어도 환영과 환청이 되어 그를 맴도는 걸 보면.

“의식 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라이칸의 질문에 로엔이 천천히 고갤 들었다.

얼굴 가리개를 쓴 로엔은 겉으로 보기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봐 온 라이칸은 지금 제 주인이 침착함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게 보였다.

“의식엔 아무 문제 없었어.”

타라 여신의 축원 의식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마치 다른 것엔 문제가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럼 진 로이슈덴인 건가?

“아니야, 문제는 나야.”

마치 라이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로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금은 궁금해져서. 내 몸속에 혈독화가 없었다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타라 여신의 축원 의식을 받는 동안 진 로이슈덴은 로엔에게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게 했다.

한 번도 갖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삶.

그 삶이 궁금해졌다.

“혹시 로이슈덴 공작님을…….”

라이칸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표정에서 그가 뭘 묻고, 뭘 걱정하고 있는지 분명히 보였다.

“좋아하냐고? 글쎄,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라이칸에겐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로엔은 제 감정이 정확히 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사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음 밑바닥에선 그를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솟아나고 있었다.

특히나, 질투심은 애정이 없다면 가질 수 없는 종류였고.

‘안 되는데. 이 감정의 정체가 사랑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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