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대신관과 약속한 6시가 되기 10분 전에 록스버그 공작가의 마차가 대신전 앞에 멈췄다.
마차에서 내린 라이칸이 뒤따라 내리는 로엔의 손을 붙잡았다.
“고마워.”
“몇 시에 끝나시는지 알려 주시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축원 기도니까 1시간 남짓이 아닐까 해.”
“그럼 7시까지 돌아오겠습니다.”
“늦으면 기다릴 테니까 서두를 것 없어. 그리고 벤투스에게 가면 내가 말했던 것에 대해 더 알아보라고 해.”
얼마 전 게르피온의 북쪽 마을의 대장간에 나타났다던 미치광이 노파의 행방을 쫒는 일이었다.
“그리고 건국기념일을 기점으로 칼라일에 들어온 점성술사에 대해서도 알아봐. 특이점은 눈이 먼 노파였고, 검은 구슬을 갖고 있었어.”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
로엔은 라이칸을 뒤로하고 대신전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로이슈덴 공작가의 여름 사냥터에서 돌아온 뒤, 진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매일매일 찾아올 것처럼 굴더니.’
아닌 척했지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날, 별장에 도착했을 때 세실과 라이칸도 함께 묵게 될 것이란 사실을 진에게 전했다. 그는 조금 놀라는 듯했으나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자 괜스레 긴장이 됐다. 괜한 일을 벌인 건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사냥터에서 하루를 보낸 후 저택으로 돌아왔다.
로이슈덴가의 마차가 록스버그 공작가에 도착한 후에도 진은 로엔이 마차에서 내리는 걸 묵묵히 도울 뿐, 그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급기야 그의 눈치를 살피며 떠나려는 그를 붙잡고 차를 마시고 가지 않겠느냐고 권한 건 로엔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로엔을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그를 태운 마차가 저택을 빠져나갔다.
로엔은 그제야 제가 너무 심했던 건 아닌가, 후회가 됐다.
‘처음부터 말했어야 했어. 단둘이 밤을 보내는 건 아직 부담스럽지만,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고.’
그랬다면 일부러 그를 속인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오늘도 무시하겠지?’
로엔은 그를 만날 생각을 하자 괜스레 긴장이 됐다.
“록스버그 공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기도실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신전의 정문에서 로엔을 기다리고 있던 신관이 예를 갖췄다.
“고마워요. 그런데 로이슈덴 공작님은 오셨나요?”
“20분 전에 도착해 대신관님과 기도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로엔은 신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전에 대신전에 왔을 땐 진 로이슈덴이 복도에 서서 그녀를 기다렸던 걸 생각하면, 제 걱정이 기우는 아닌 모양이었다.
휴우, 힘든 시간이 될 듯했다.
“계단이 가파릅니다. 조심하십시오.”
앞서가던 신관이 뒤를 돌아보며 주의를 줬다. 로엔은 신관의 행동에 의문이 생겼지만, 우선은 고갤 끄덕였다.
‘일부러 알려 주기까지 하다니. 전에도 이렇게 친절했었나?’
신관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로엔은 연신 고갤 갸웃했다.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여깁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신관님.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계단도 내려올 수 있었고요.”
“아. 그것이라면 제가 아니라, 로이슈덴 공작님께서 부탁하신 일입니다.”
“……로이슈덴 공작님이요?”
“네. 공작님을 모시러 간다고 했더니 저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공작님께서 얼굴에 베일을 쓰고 계서서 새벽엔 계단을 내려오시는 게 위험하다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계단에 등 하나를 더 켜 놓았답니다.”
“아.”
신관이 자릴 뜨자, 로엔은 기도실 앞에 서서 주먹을 꼭 쥐었다.
‘내게 화가 난 게 아니었나?’
진이 그녀를 걱정해 신관을 불러 세심하게 일렀을 것을 생각하니 묘하게 심장이 간질거렸다.
로엔은 머리에 쓰고 있던 검은 베일을 벗어 외투에 넣었다. 진이 폭포수 안의 비밀 동굴에서 했던 말이 떠올라서다.
「위험하니 앞으론 쓰지 않는 게 좋겠어. 지금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아직도 걱정으로 가득하던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로엔은 서둘러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곤 베일 대신 얼굴 가리개만 한 채 기도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문을 두드린 사람은 로엔이었지만, 단단한 껍질로 뒤덮여 있던 제 심장에 처음으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설렘으로 가득 찼다.
* * *
혼약 예식을 위한 타라 여신의 축원 의식은 대신관의 집전하에 이뤄졌다.
두 사람은 몸을 정화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 놓은 성수로 손을 씻었다.
첫 단계가 끝나고 나자, 대신관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두 사람의 몸에 성수를 뿌렸다. 그리고 순서에 맞게 대신관이 축원을 위한 기도문을 읊었다.
30분 동안 이어지는 기도가 끝나면 마지막 순서가 남아 있었다. 성수에 발을 담그고,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남자가 신부로 맞을 여인의 발을 성수로 씻겨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두 사람은 대신관의 설명이 끝나고 난 후에도 난감한 표정으로 얼어붙은 듯 앉아 있었다.
“축원 기도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로이슈덴 공작님께서 신부가 되실 록스버그 공작님의 발을 성수로 닦아 주시면 됩니다. 제가 자릴 피해 드릴 테니, 끝나면 문을 두드리십시오.”
대신관이 기도실을 나갔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신관이 성수가 담긴 그릇과 깨끗한 새하얀 천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걸 사용하시면 됩니다.”
신관 역시도 두 사람에게 예를 갖춘 뒤 기도실을 나갔다.
두 사람만 남게 된 기도실에 침묵이 흘렀다. 타라 여신의 축원 기도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두 사람만 남게 된 셈이었다.
“성수로 발을 씻기라는군.”
이틀 만에 처음으로 진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러게요.”
로엔은 난처한 듯 시선을 피했다. 진이 보는 앞에서 발을 보이며 성수로 씻는 것도 민망한데, 진이 제 발을 직접 닦아야 한다니.
그것보다 이 행위를 사흘에 한 번씩 꼬박꼬박 해야 된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제가 씻고, 대신관께는 공작님이 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로엔의 제안에 진이 오늘 처음으로 눈을 마주쳐 왔다. 깊게 가라앉은 은청색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로엔의 시선을 붙잡았다.
“지금 거짓을 고하자는 건가?”
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차갑게 들렸다. 별장에서의 일까지 에둘러 말하는 듯했다.
지금이라도 그런 게 아니었다고 말을 해야 할까?
“그런 게 아니라, 융통성을 발휘하자는 뜻이었어요.”
“이틀 전에 넌 타라 여신의 축원을 꼭 받고 싶다고 했었지. 그런데 지금 이 태도는 그때와 너무 달라서,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군.”
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때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융통성을 발휘했던 모양이군.”
그는 단단히 꼬여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진심이었어요. 결혼은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고, 이왕이면 축복받는 결혼을 하고 싶었으니까요. 공작님은 아닌가요?”
로엔의 질문에 허를 찔린 듯 진이 입을 다물었다.
“이왕이면 축복을 받는 결혼 쪽이 좋겠지.”
“생각이 같아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그날, 별장에서요. 불쾌하게 해 드렸다면 사과할게요. 제가 공작님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충분히 화를 낼 상황이긴 한데, 저도 그날 공작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사실이었어요. 서로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로엔이 슬쩍 진의 눈치를 살피며 그날에 일에 대해 사과를 했다. 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쏘아보는 게 느껴졌다.
“믿든 믿지 않으시든, 사실이에요. 사과도 진심이고.”
“그러니까 네 말은 나와 함께 있고 싶었다는 거지?”
“네. 타라 여신의 축원도, 공작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도 진심이에요.”
로엔이 다시 한 번 강조하듯 힘 있게 말했다.
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럼,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겠군.”
진이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기도실 구석에 놓여 있던 의자를 들고 왔다.
기도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웬 의자인가 싶었는데, 이런 용도를 위해 가져다 놓은 모양이었다.
“앉아.”
로엔이 진이 가져다 놓은 의자에 마지못해 앉았다. 그러자 진은 신관이 가져다 놓은 성수가 든 그릇을 가져와 로엔의 앞에 내려놓았다.
“구두와 양말도 내가 벗겨 줘야 하나?”
“아니요. 그건 제가 할게요.”
다행히 새벽 기도를 위해 일찌감치 목욕을 한 터라 발은 깨끗했다. 그리고 요즘 세실이 목욕물에 넣어 주는 장미 꽃잎 때문이지 몸에서도 향긋한 꽃 향이 났다.
귀찮다고 마다했었는데, 지금에서야 세실의 행동이 다 고마울 정도였다.
구두를 벗은 로엔은 무릎까지 오는 실크 스타킹을 벗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러다 스타킹을 벗기 위해선 드레스 자락을 올려야 한다는 게 떠오르자 다시 허릴 폈다.
“뭐지?”
“스타킹을 벗어야 하는데, 고갤 좀 돌려 주시겠어요?”
진의 시선이 드레스 밖으로 빼꼼 나와 있는 로엔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다.
“스타킹이 무릎까지 와요. 벗으려면 드레스를 무릎 위까지 올려야 하거든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진이 로엔에게 등을 돌렸다.
다시 허릴 숙인 로엔은 드레스 자락을 허벅지까지 올리곤 스타킹과 속옷을 고정시킨 가터벨트를 풀었다. 그리곤 무릎에서부터 실크 스타킹을 돌돌 말아 천천히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