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턱을 붙잡고 있던 진의 손끝이 얇은 천 위에서 입술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고갤 돌리려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렇게 뻔뻔한 사내였나?’
진이 로엔의 항의에도 아랑곳 않고 얼굴 가리개 안에 숨겨진 로엔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입을 맞추고 싶다는 욕망이 느껴져, 로엔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후회돼. 그냥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갔어야 했는데.”
“뭐가요?”
로엔은 당혹감을 감추며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괜히 저들과 차를 마셔서는. 이렇게 되면 여름 사냥터에 남아 있는 자들을 따돌릴 이유가 없어지잖아.”
진은 단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못내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사냥터에 남은 사람이라면, 세실과 라이칸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정말 두 사람을 따돌릴 계획이셨던 건가요?”
로엔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진을 보았다.
“그럼 왜겠어? 너와 단둘만 있고 싶은데, 너는 아닌 것 같고. 그러니 방법을 찾을 수밖에.”
당연한 것 아니냐는 그의 태도에 로엔은 어이가 없었다.
사람들을 따돌려 놓고, 이렇게 당당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그녀 역시 눈에 단단히 뭔가가 쓰인 모양이다. 그의 말이 불쾌하기는커녕 심장이 간질거리는 걸 보면.
“멀리 가지 못하셨네요. 저희에게 붙잡히시다니.”
에런 홈볼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로엔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 진 역시 더는 고집 피우지 않고 로엔을 놓아주었다.
로엔은 귓불이 붉어지려 하는 걸 머리카락으로 감춘 채, 무리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다 지금까지 두 사람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던 귀족들이 헛기침까지 하며 재빨리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고갤 돌리는 귀족들의 얼굴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목격한 사람들처럼 붉어져 있었다.
‘또 소문이 돌겠군. 이번엔 부끄러움도 없이 사람들 앞에서 남자를 유혹했다고.’
이제 더는 놀랍지도 않았다. 로엔은 얼굴 가리개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귀족들에게 말을 건넸다.
“저희만 따로 움직이는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저는 혹시나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걱정을 하던 참이라.”
에런이 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진은 에런의 말처럼 방해받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 남자가.’
로엔이 진에게 재빨리 눈치를 줬다. 하지만 그는 제 눈짓을 보지 못한 듯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방해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나요, 로이슈덴 공작님?”
결국 로엔이 그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제발 표정 관리 좀 하라고 말했다. 그제야 진이 로엔 쪽으로 고갤 돌렸다.
“흐음, 로엔 말이 맞아.”
다행히 제 눈짓을 이해한 듯 진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분위기가 사라지자, 숨을 죽인 채 서 있던 귀족들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는 게 보였다.
‘잠깐, 로엔이라고?’
은근슬쩍 제 이름을 부른 걸 뒤늦게야 알아차린 로엔이 진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우린 이쯤에서 돌아갔으면 하는데.”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제야 다 같이 산책을 하나 싶었는데,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돌아가고 싶다니.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진이 로엔에게 한 발짝 다가서더니 고갤 숙여 왔다.
“로엔, 펨부르크 호수는 다음에 오는 게 좋겠군. 그땐 피크닉도 하고 좀 더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어서 돌아가고 싶은지 진이 로엔을 채근하기 시작했다.
잔혹하고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천하의 진 로이슈덴이 명령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귀족들을 더 놀라게 한 건 눈앞의 여인에게 푹 빠진 것처럼 구는 그의 태도였다.
마치 진 로이슈덴이 로엔 록스버그 공작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 네. 그러는 게 좋겠군요. 어서 돌아가 보십시오.”
에런 홈볼트가 충격이 가시지 않는 표정으로 재빨리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실 로엔을 바라보는 진 로이슈덴의 눈빛이 너무도 끈적끈적해, 당장 돌려보내지 않으면 사달이 날 것 같아서였다.
“가도 좋다는 군. 이젠 아무 문제될 것 없지?”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눈치 없는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지금까지 보여 준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정말 민망함은 로엔의 몫인 모양이었다.
로엔이 망설이는 사이, 진이 또다시 로엔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보세요. 여기서 끼를 부리시면 안 된다고요.’
하지만 작정하고 홀려 대는 진 때문에 로엔 역시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웃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알았으니 어서 가요.”
이번엔 로엔이 그의 팔을 붙잡고 채근하기에 이르렀다.
“홈볼트 백작, 라우렐을 통해 연락하도록 하지.”
진은 레이디들 쪽으론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로엔의 손을 잡곤 말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괜찮겠죠?”
“뭐가?”
“너무 무례하게 군 것 같아서요.”
“뭐가 무례했다는 건지 모르겠군. 오히려 눈치 없이 우릴 붙잡은 그들이 무례한 거지.”
그 뻔뻔함에 경악했지만, 그는 진심인 듯했다.
“공작님은 처음부터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당연한 것 아닌가? 말했잖아. 너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 함께 온 사람들도 따돌린 것이라고. 그나저나 이쯤이면 괜찮을 것도 같군.”
진이 걸음을 멈추곤 주위를 살폈다. 로엔 역시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한 채 덩달아 주위를 살폈다.
귀족들의 무리는 보이지 않았고, 어느새 두 사람은 커다란 나무 아래 서 있었다.
“그런데 뭐가 괜찮은 건데요?”
로엔의 순진한 질문에 진이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는 듯 바라본다. 그리곤 눈을 감은 것과 동시에 로엔의 허리에 팔을 감아 왔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끌어당겨진 로엔은 놀랄 새도 없이 입을 맞춰 오는 진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제야 이쯤이면 괜찮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는 내내 키스할 장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음란마귀라도 씐 건가?’
아니, 그보다 또 어떤 지점에서 불이 붙은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진 로이슈덴은 그녀가 키스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걸 안 후로 시도 때도 없이 키스를 해 왔다.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안달이 난 듯 보였다.
여름 사냥터로 오는 마차 안에서도 진의 시선이 제 입술에 달라붙는 통에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며 고갤 돌려야 했다.
좁은 공간에서 그가 보내오는 성적 열기가 노골적일 만큼 분명해, 마차에서 내린 게 고마울 정도였다.
“으음―, 하아.”
얇은 베일을 사이에 두고 이뤄지는 키스가 못내 아쉬웠다. 누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진이 눈을 감고 있다고 해도 얼굴 가리개를 벗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진은 키스를 방해하는 얇은 천에도 불구하고 농밀하게 혀를 얽으며 집요하게 입안을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감싼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커다란 나무 뒤에 있다지만, 이곳이 사방이 훤히 트인 장소라는 것도 잊은 채 키스에 몰두했다.
정말 미친 모양이다.
진이 열기를 참지 못하고 로엔의 아랫배에 제 몸을 얽어 왔다. 뜨겁고 단단한 것이 드레스를 뚫고 안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듯 연신 존재감을 드러냈다.
로엔이 나른한 신음을 삼키며 허릴 비틀자, 진이 로엔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은 몸에서 채워지지 않은 짙은 욕망이 느껴졌다.
“오늘 밤, 사냥터 별장에서 자고 갈까?”
진이 입술을 떼곤 로엔의 귓불을 빨았다. 예민해진 살갗이 그의 축축하고 뜨거운 혀에 무참하게 희롱당했다.
등줄기를 타고 야릇한 쾌락이 흘러내렸다. 그의 키스에 흥분한 몸이 열렬히 그를 반겼다.
“두 사람은 돌려보내고 우리만 있고 싶은데.”
그가 뭘 원하는지,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진은 오늘 밤 로엔과 밤을 보내길 원했다.
로엔이 그를 밀어냈다. 금방이라도 흘러넘치려는 열기를 삼키며, 최대한 냉정해지려 애썼다.
“타라 여신의 축원을 받고 싶어요.”
로엔의 속삭임에 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타라 여신의 축원을 받는다는 건 대신관이 건넨 규칙을 모두 지킨다는 뜻이었다.
특히 몸과 마음의 정화를 위해 결혼 전까지 순결을 지키겠다는 말이었으니, 사냥터에서 하루 더 머물자는 말을 에둘러 거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이제 돌아갈까?”
진이 로엔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곤 미련 없이 로엔에게 등을 돌리고 말이 묶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실망이 느껴졌다.
로엔은 입술을 꾹 눌러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한 번 거절당했다고 어깨까지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다니. 꼭 풀 죽은 대형견 같았다.
“같이 가요.”
로엔이 일부러 그의 곁으로 다가가 옷자락을 잡았다.
당연히 밀어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순순히 로엔에게 옷자락을 붙잡혀 왔다. 하지만 자꾸 로엔의 시선을 피했다.
‘삐쳤네. 삐쳤어.’
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행동했다면 신경도 쓰지 않고 무시했을 터였다. 그런데 진 로이슈덴이 아이처럼 구는데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역시 잘생겨서 그런 건가?’
로엔은 제 취향이 그 무엇도 아닌, 얼굴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나 좀 봐요. 화난 건 아니죠?”
로엔이 모르는 척 옆구리를 건드렸다. 고갤 돌린 채 걷던 진이 슬쩍 로엔을 보더니, 이내 고갤 휙 하고 돌린다.
“내가 왜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화가 난 게 분명한데도 진은 아니라고 시치미를 뗐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사실 저는 실망한 건 아닌가 해서, 오늘 밤 사냥터에서 묵고 가려고 했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이 로엔 쪽으로 고갤 휙 돌렸다. 눈빛에 감도는 이채를 숨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진심이야? 그러니까 정말 사냥터에서…….”
“당연히 진심이죠.”
로엔의 대답에 언제 그랬냐는 듯 진의 입매가 연신 씰룩였다. 웃음을 참기라도 하듯.
그가 감정 없는 냉혈한이라고 했던 자들에게 지금 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제 한 마디에 시시각각 변하는 진의 표정을 보자,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그나저나 사실을 알면 실망하려나?’
사냥터에서 하루 묵고 간다는 약속은 지킬 생각이었다. 그것이 진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이긴 했지만.
로엔은 그가 진실을 알았을 때, 황당해하는 그의 표정을 상상하며 로이슈덴 공작가의 여름 사냥터로 말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