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순간 캐서린의 푸른 눈동자가 더욱 매섭게 로엔을 쏘아보았다. 제 말속에 담긴 뜻을 정확히 이해한 모양이다.
모두가 원하는 진 로이슈덴 공작을 차지한 건, 그 누구도 아니 괴물 공작인 저라는 걸.
“정말 우습군요. 어차피 귀족들의 결혼이야 정략혼일 뿐인데, 마치 뭐라도 된 양 굴다니. 로이슈덴 공작님이 공작님 말씀처럼 그렇게 다정하시다면 앞으로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다정함이 공작님이 아니라, 다른 레이디에게 적용될 수도 있으니까요.”
악의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만약 그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진 로이슈덴을 유혹해 손에 넣겠다는 추악한 욕망이 담겨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제인이 놀라 캐서린의 옆구리를 찌르며 그만하라고 눈치를 줬지만, 캐서린은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잘 알고 계실 테지만, 아드리안 제국에선 이혼이 흠도 아니거든요.”
결국 캐서린이 선을 넘었다. 캐서린이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로엔을 쏘아보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닿았고, 레이디들은 날 선 긴장감에 서로 눈치를 살피며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처한 기색이었다.
“이혼이라니, 누가 이혼이라도 하나?”
불쑥 끼어든 진의 목소리에 레이디들이 놀란 표정으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 로이슈덴의 등장으로 팽팽하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로엔은 캐서린에게서 눈을 떼곤 천천히 진을 돌아보았다.
“별일 아니었어요. 아드리안 제국의 결혼 제도에 대해 잠깐 얘기하느라.”
“너와 내가 이혼한다는 내용은 아니고? 거기다 듣자하니 내가 결혼 후에 바람이라도 피울 거라는 내용이던데. 아닌가?”
진의 지적에 캐서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곤 당혹감에 주먹을 움켜쥐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연한지, 로엔마저도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저는 그러니까…….”
캐서린은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설마 내가 내 연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상대가, 너는 아니겠지? 캐서린 캔싱턴.”
진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캐서린이 놀라 고갤 들자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은청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검이 있다면 목이라도 내려칠 기세였다.
“그런 게 아니라…….”
캐서린이 또다시 말끝을 흐리며 눈물을 흘릴 것처럼 진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맺힌 푸른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만약 사내라면 누구나…….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내 다정함과 친절은 천박한 여인에게 나눠 줄 만큼 하찮은 것이 아니다. 오직 내가 인정한 내 연인에게만 허락된 거지. 그러니 꿈 깨. 더러운 욕심에 구역질이 날 것 같으니까.”
창백하던 캐서린이 얼굴이 절망적으로 일그러졌다. 제 아름다움이 무기인 걸 알고 있던 캐서린으로서는 진의 차가운 태도가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죄송합……. 저는 이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 캐서린은 결국 모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고갤 숙였다. 그리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가 있는 쪽으로 뛰어가 버렸다.
“기다려요, 레이디 캐서린!”
제인이 캐서린을 불렀지만 뒤따라가진 않았다.
로엔은 그제야 레이디들이 이 상황을 즐기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걱정스러운 듯 캐서린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 제인의 갈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로엔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친구의 얼굴을 하고 곁에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사교계에서 최고의 남편감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일 뿐이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캐서린이 창피를 당해 자릴 떴으니, 경쟁자가 한 명 준 것이다.
“공작님, 심하셨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로엔의 말에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심하긴. 더한 말을 해 줄까 하다 참았는데. 지루하군. 이제 돌아갈까?”
진이 코웃음을 치며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돌아가고 싶으세요?”
로엔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귀족들 쪽으로 시선을 줬다. 그들은 좀 더 진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눈치였다.
그래, 이번 기회에 귀족들과 친분을 쌓으면 진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너는 어떤데?”
진이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듯 다시 물어 왔다. 그리곤 바람에 흐트러진 로엔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쓸어내려 주기까지 했다.
그의 다정한 손길에 옆에 서 있던 레이디들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아직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사실 당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진을 위해 남는 걸 선택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새로운 소문을 만들어 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산책이라도 할까? 저쪽에서 산책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더군.”
진은 영 마땅찮은 듯 보였지만 로엔이 원하니 따를 모양인 듯했다.
“그랬나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로엔이 고갤 돌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레이디들에게 시선을 줬다.
“저희도 일어나 산책을 하려던 참이었답니다. 그렇지 않나요?”
제인이 수줍게 웃으며 레이디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네, 맞아요. 산책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럼 잘됐군.”
진이 남자들을 향해 고갤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남자들이 레이디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우리는 먼저 갈까?”
진이 로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른 이들 무리에 껴서 산책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로엔 역시 마찬가지라 진의 팔 위에 놓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다른 사람들보다 한발 앞서 펨부르크 호수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오기 전에 무슨 말을 했지? 아주 심각해 보이던데.”
로엔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갤 들자, 진이 한숨을 내쉬며 뒤따라오는 레이디들에게 시선을 줬다.
“저 극악무도한 종달새들 말이야. 내가 바람을 피울 거라는 것 말고, 무슨 입방아를 찧어 댔나 궁금해서.”
진이 불쾌한 듯 인상을 쓰자 로엔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속 좋게 웃기나 하고. 화를 내야 하는 것 아니었나? 내가 너를 두고 바람을 피운다는데. 넌 한 마디도 하지 않더군.”
로엔은 그제야 진이 화가 난 이유가 제가 캐서린의 말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아서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야 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공작님이 나타나셨잖아요. 저 극악무도한 입들을 꾹 다물게 할 절호의 찬스였는데, 아쉽게 됐어요.”
정말 아쉬워 죽겠다는 듯 안타까워하자, 진이 픽 하고 웃었다.
“그런 것치곤 유하던데? 난 입이라도 찢어 놓을 줄 알고 긴장했었거든.”
진의 농담에 로엔이 어깰 으쓱했다. 그리곤 여상하게 답했다.
“하지만 저와 관련된 소문은 대부분이 진실이기도 해서요. 흉터도, 부모님을 죽게 만든 저주받은 운명도 그렇고. 사실이니 반박할 수가 없더군요. 그리고 공작님도 레이디 캐서린 말처럼 변할지도 모르고.”
진이 걸음을 멈추더니 로엔의 손목을 붙잡곤 저를 보게 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진의 목소리에 담긴 냉기에 로엔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화가 단단히 난 눈치였다.
“아니, 제 말은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약속했던 결혼 기간이 끝난 후에도…….”
“넌 나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는 모양이군.”
진의 목소리가 탐탁지 않은 듯 불퉁했다. 로엔은 제게 쏟아져 내리는 진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혼란스러운 제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였다.
“믿어요. 폐하보다 믿는 사람이 공작님이니까요. 아시잖아요. 공작님과의 결혼으로 제가 무엇을 잃었는지.”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검술 시합장에서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리던 에드윈이 떠올라서다.
“그러니 공작님도 귀족들을 너무 적대시하지 마세요. 그들을 굳이 적으로 돌릴 필욘 없잖아요.”
황제에게 등을 돌린 이상, 전략적으로 귀족들을 그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진 역시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들어.”
진의 불쾌한 목소리에 로엔은 웃음을 삼켰다. 제 일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 주는 이가 나타날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게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내 소문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해야 할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내 고갤 가로저었다.
제 소문의 대부분은 귀족들이 아니라, 로엔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이제 와 사실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많은 것들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그에게 진실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넌 어떤지 몰라도, 내가 싫어. 앞으로 너에 대해 말하고 다니는 자가 있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러니…….”
진이 로엔의 턱을 붙잡았다. 그리곤 고갤 들어 그를 보게 했다. 은청색의 눈동자가 여과 없이 그녀와 눈을 마주쳐 왔다.
“너도 네 스스로를 아껴. 이제부터 너를 모욕하는 것은 로이슈덴가를 모욕하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로엔은 어제 진이 대신관 앞에서 저희 두 사람을 한데 묶어 ‘우리’라고 했던 게 생각이 났다. 그는 약속대로 결혼이 유지되는 동안 저를 로이슈덴 공작 부인으로 인정하려는 모양이다.
진의 시선이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그의 눈빛은 집요했다.
“알았어요. 내 스스로를 아낄게요.”
“그리고?”
“앞으로 저도 공작님을 모욕하는 건 록스버그 공작가를 모욕하는 것이니 절대 용서하지 않을게요.”
“이번에야말로 ‘입을 찢어 버리겠다.’고도 해야지. 눈을 파 버린다고 했던 것처럼.”
그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로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으니 그만 놔주세요. 사람들이 쳐다봐요.”
로엔이 어느새 가까워진 귀족들의 무리를 돌아보며 진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진은 로엔을 놓는 대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 때문에 서로의 숨결이 뺨에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열기가 로엔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우린 결혼을 앞둔 연인이고, 서로밖에 보이지 않을 때인데. 민망하면 알아서 고갤 돌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