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펨부르크 호수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요정들의 땅이라고 하더니, 펨부르크 호수와 가까워질수록 바람의 온도가 바뀌기까지 했다.
진은 몸속에 꿈틀거리려 하는 드래건의 힘을 느끼며, 이 땅이 신성한 곳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때 앞서 달리던 로엔이 갑자기 속도를 늦추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지?’라고 생각한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귀족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펨부르크 호수 근처가 귀족들 사이에서 유명한 피크닉 장소라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로엔에게 무시하고 지나치자고 말하려던 때, 귀족들 중 하나가 두 사람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록스버그 공작님과 로이슈덴 공작님이시군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라우렐이 승전기념일 파티에서 소개해 주었던 에런 홈볼트였다.
성격이 좋고 붙임성이 있었던 것이 기억나자, 날카롭게 섰던 신경이 조금 누그러졌다.
“홈볼트 백작이군.”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공작님. 두 분만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차를 드시는 게 어떨까요?”
에런 홈볼트의 제안에 진이 의중을 묻듯 로엔을 보았다.
로엔의 시선에는 에런 홈볼트 뒤에 있는 몇몇 귀족들 중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다. 루빈 제라르 백작이었다.
‘뭐,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뒤이어 조금 떨어진 커다란 나무 아래서 차를 마시고 있던 레이디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필 캐서린 캔싱턴과 제인 무리였다.
그때 차를 마시던 캐서린이 뒤를 돌아보았고, 로엔과 눈이 마주쳤다.
캐서린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지더니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옆에 있는 진에게 향하며 이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캐서린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레이디들 역시 하나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놀란 표정으로 저들끼리 뭔가 수군거렸다.
“싫으면 거절해도…….”
“아니요.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도 말을 오래 달려 갈증이 나던 참이었거든요.”
로엔의 대답이 떨어지자, 진이 에런 홈볼트에게 고갤 끄덕였다.
“그럼 신세를 좀 져야겠군.”
“신세라니요. 오히려 저희가 영광입니다.”
에런 홈볼트는 진심으로 진과 로엔을 반겼다.
진이 말에서 내리자 에런이 진의 말을 나무에 묶었다.
“고맙군.”
에런 홈볼트에게 인사를 건넨 진이 말에서 내리려는 로엔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당연하다는 듯 로엔에게 손을 뻗었다.
“붙잡아. 익숙하지 않은 말이라 내리는 게 불편할 거야.”
로엔은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평소와 달리 순순한 로엔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로엔이 말에서 내리느라 가까워진 때를 이용해 로엔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지금이 장단을 맞춰야 할 때인 거지?”
뜻밖의 질문에 로엔이 고갤 들었다. 그 순간 진과 눈이 마주쳤고, 손을 잡지 않고 있던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로엔의 허릴 감쌌다.
그의 행동으로 인해 순식간에 연인 사이에 농밀한 스킨십을 하듯 두 사람의 몸이 아교처럼 달라붙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역시 지켜보는 사람들이 고갤 돌릴 만큼 끈적끈적했다.
땅에 발이 닿은 후에도 진은 로엔의 허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한시라도 손을 놓고 싶지 않다는 뜻이 담긴 명백한 행동이었다.
“그럼 준비되셨나요?”
로엔의 물음에 진이 로엔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고갤 끄덕였다.
정말 홀릴 것 같았다. 진이 장단에 맞춰야 할 때냐고 묻지 않았다면, 그의 눈빛이 너무도 다정해 진심인 줄로 착각을 할 뻔했다.
“준비됐어.”
진이 로엔의 손을 제 팔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도 없이 전쟁터 한복판으로 걸어가는 중이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설레기까지 했다.
* * *
“그럼 지금 두 분께서는 로이슈덴 공작가의 여름 사냥터에 계신 건가요? 펨부르크 호수로는 잠깐 승마를 나오신 것이고요.”
차를 마시던 에밀리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 그러니 곧 돌아가 봐야 한답니다. 여름 사냥터에 함께 온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일행과 함께 오셨으면, 오늘 칼라일로 돌아가시겠네요?”
“네. 내일 새벽에 대신전에서 타라 여신의 축원 기도가 있거든요.”
로엔의 대답에 레이디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제 오후 발간된 그레이트 모먼트지의 특별판에서 록스버그 공작과 로이슈덴 공작의 결혼 기사가 실렸다. 그것도 3주 후 대신전에서란 말에 귀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반적으로 대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리려면 최소 3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의식의 절차를 건너뛰고 3주 후에 결혼을 하다니.
이 일로 인해 귀족들 사이에선 록스버그 공작이 배 속에 혼수품을 미리 준비한 건 아니냐는 헛소문까지 나돌 정도였다.
사실 더 황당한 건 진 로이슈덴이 괴물 공작에게 홀딱 빠져 검을 들고 대신관을 찾아가 협박까지 했다는 말도 있었다.
궁금한 것이 산더미였지만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눈치를 살피다 제인이 레이디들의 무언의 압박에 못 이겨 결국 입을 열었다.
“축원 기도라면 결혼식을 기준으로 3개월 전부터 하는 것 아니었나요?”
“대부분은 그렇죠. 하지만 대신관님께서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라 배려를 해 주시더군요.”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제인이 자꾸만 로엔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뭐가 궁금해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실례가 되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가 있나요? 청혼 이후 한 달이라니. 빨라도 너무 빨라서요. 뭐, 돈이 있으면 결혼 준비야 걱정 없겠지만.”
결국 말을 꺼낸 건 에밀리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속엔 로엔이 로이슈덴 공작에게 돈을 무기로 결혼을 재촉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담겨 있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로엔은 어깰 으쓱해 보였다.
“결혼 날짜를 정한 건 로이슈덴 공작님이라, 궁금하시면 직접 물어보세요. 저도 이유가 궁금하던 참이라.”
로엔의 말에 그곳에 있던 레이디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나, 결혼을 서두르는 당사자는 로엔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흠흠.”
“로이슈덴 공작님도 참. 어지간히 결혼이 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게요. 급하셨던 모양이에요.”
로엔은 차를 마시며 레이디들의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적잖이 놀랐는지 대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침묵이 계속됐다.
“그런데 공작님과 사이가 정말 좋으신 모양이네요. 함께 외출도 하시고.”
제인이 남자들 사이에서 무료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는 진 로이슈덴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실 차를 마시는 내내 진 로이슈덴의 시선은 로엔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처음엔 ‘설마?’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진득하게 달라붙는 노골적인 시선 때문에 옆에서 지켜보는 제인의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였다.
진의 뜨거운 눈빛에 귀족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떠들어 대는 ‘혼수품’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글쎄요. 이게 사이가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생각보다 다정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세심한 부분도 있고.”
로엔은 말에서 내릴 때마다 저를 돕던 진을 떠올렸다. 그리고 베일을 벗을 때마다 눈을 꼭 감고 그녀가 눈을 뜨라고 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던 모습까지.
“다정하시다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그 로이슈덴 공작님이요?”
에밀리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다 제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재빨리 헛기침을 하며 고갤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진 로이슈덴이 들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믿기지 않으실 테지만 사실이에요. 아직 서툰 구석이 있지만 알려 드리면 꼭 고치시기도 하고. 소문과는 다른 부분이 많더군요.”
로엔은 진이 방문하기 1시간 전에 사람을 보내왔던 것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로엔이 즐거운 듯 웃자 레이디들이 또다시 눈빛을 교환했다. 믿기지 않은 일의 연속이란 듯이.
사실 그레이트 모먼트지의 특별판에 결혼이 발표되긴 했지만,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두 사람이 함께 외출한 모습을 보자 이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칼럼의 제목처럼 ‘괴물 공작과 아드리안 제국의 아름다운 기사’가 결혼을 하는 것이다.
“정말 놀랍군요. 그럼 앞으로 사교계 행사에서 로이슈덴 공작님을 만나 뵐 수도 있겠군요. 그 서툰 구석을 모두 고치신다면요.”
지금껏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차를 마시고 있던 캐서린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한껏 비꼬았다. 거짓말도 정도껏 하란 듯이.
무엇보다 진 로이슈덴이 사교계 행사에 절대 참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드리안 제국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결혼할 상대가 부탁한다고 해도 그것만은 변할 것 같지 않았다. 황제가 참석하라 몇 번을 권유해도 거절했던 진 로이슈덴이었으니까.
발끈한 캐서린과는 달리 여유롭게 차를 마시던 로엔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캐서린의 푸른 눈동자가 적의를 품고 부딪쳐 왔다. 감정을 꾹꾹 눌러 참고 있는지 꽉 쥔 주먹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이 상황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폐하께서도 설득하지 못하신 일인데, 감히 제 말 하나에 마음을 바꾸실 분은 아니시죠.”
로엔은 순순히 캐서린의 말에 동의했다. 캐서린을 비롯해 레이디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또 모르죠.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지.”
로엔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캐서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에게는 그를 변화시킬 기회가 있거든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