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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21화 (122/201)

121화

스미스가 마차 문을 열어 주자, 진이 로엔을 마차에 먼저 태웠다. 그리곤 맞은편에 자릴 잡자, 기다렸다는 듯 세실이 로엔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덩치가 큰 라이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진 옆에 앉는다.

라이칸이 제 옆자리에 앉자마자 진의 이마에 불만스런 주름이 잡혔다. 라이칸 역시 불쾌하긴 마찬가지라는 듯 자리에 앉자마자 반대쪽으로 고갤 돌리는 게 보였다.

두 남자 사이에 감도는 싸늘한 냉기에 로엔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고, 세실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삼켰다.

이내 록스버그 공작가에서 세 명의 손님을 태운 마차가 칼라일을 빠져나갔다.

로이슈덴 공작가가 소유한 마구간은 황실 소유의 금원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가는 곳이 금원 쪽인 모양이네요.”

“맞아. 금원의 북쪽에 있지. 아마 너와 만났던 펨부르크 호수도 말을 타고 달리면 20분 만에 도착하는 거리일 거야. 출발하기 전에 메리언이 간단히 음식 준비를 했다고 하니까 원한다면 호수에서 먹어도 되고.”

“혹시 호수에서 피크닉을 하자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진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세실이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 채 슬쩍 물었다.

“맞아. 네 주인이 원한다면 말이야.”

진의 시선은 질문한 세실이 아니라 로엔에게 닿아 있었다. 이 모든 게 로엔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듯이.

“주인님 생각은 어떠세요? 펨부르크 호수에서 피크닉을 할 수 있대요.”

세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로엔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알았으니 그만 보채. 기대되네요. 지난번엔 시간이 없어서 호수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아, 그리고 이제야 말할 기회가 생겼네요. 그때 감사했어요.”

진이 처음엔 이해를 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이내 기억이 났는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반응에 세실은 물론 내내 표정 없이 앉아 있던 라이칸까지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때도 베일이 문제였지.”

“바람이 문제였죠. 펨부르크에 산다는 요정들이 심술을 부리는 줄 알았거든요. 바람에 날아간 베일이 나무에 걸릴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니 요정들의 심술이 맞았던 것 같군.”

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다 로엔의 시선이 진의 셔츠로 향했다. 단정하게 묶인 타이가 어딘가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설마……? 아니겠지. 그래, 아니야.’

로엔은 진의 셔츠에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외곽을 달리던 마차가 숲길로 들어서자 이내 아름다운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도착한 모양이네요.”

라이칸이 먼저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곤 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세실에게 손을 내밀었다.

“감사해요, 라이칸 님.”

세실이 마차에서 내리자 이내 로엔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로엔은 내가 하지.”

진이 마차에서 내리며 라이칸을 밀어내고는 로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라이칸과 진을 번갈아 보던 로엔이 진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마차에서 내린 로엔은 진의 손을 놓고는 눈앞의 큰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마구간이라고 하기엔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건물 역시도 저택 못지않게 화려했다. 귀족가의 여름 별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여름에 사용하던 사냥 별장이었다고 들었어. 선대 공작부처는 매해마다, 가족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이곳에 머물며 사냥과 피크닉을 즐겼다고 하더군.”

과거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었다는 걸 보니, 진은 가족과 함께 이곳에 온 적이 한 번도 없는 듯했다. 아니면 너무 어려 기억이 없거나.

“아름답네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안은 나중에 구경하고 마구간부터 보러 갈까? 네가 탈 말을 보여 줄게.”

“그러는 게 좋겠어요.”

로엔이 세실과 라이칸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 거냐고 의중을 묻기 위해서였다.

“저흰 별장 안을 구경하고 있을게요. 두 분이서 함께 다녀오세요. 그리고 피크닉은 조금 쉬었다가 오후에 가는 게 좋겠어요. 잠깐 마차를 탔다고 멀미가 좀 나서.”

세실이 눈치 빠르게 빠졌다.

“저는 함께…….”

“라이칸 님, 함께 계셔 주시지 않겠어요? 낯선 곳이라 혼자 있으려니 조금 무섭거든요.”

세실이 라이칸의 팔을 붙잡고는 제 쪽으로 당겼다. 눈치 없이 두 사람 사이에 끼려 하는 라이칸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게 좋겠군. 그럼 우린 갈까?”

기회를 포착한 맹수처럼 진이 세실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리곤 라이칸이 따라붙을세라, 로엔의 팔을 붙잡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 * *

마음 편히 말을 타고 달린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캠벨 후작가의 가든파티에서 잠깐 동안 승마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땐 에드윈의 부담스러운 계획에서 벗어나기 위해 골몰하고 있던 터라 마음껏 즐기지 못했었다.

“기분이 좋을 걸 보니 말을 타고 나오길 잘한 모양이군.”

로엔이 옆에서 함께 말을 달리고 있는 진 쪽으로 고갤 돌렸다.

바람에 단정하던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서인지, 평소의 차갑던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

거기다 햇살 아래서 말을 달리는 그에게선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조각처럼 보이던 그의 얼굴에 인간미가 더해지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뭘 해도 그림이 되다니. 신은 불공평한 모양이다.

“함께 오지 못한 게 미안할 정도로 좋아요.”

세실과 라이칸을 두고 한 말이란 걸 깨달은 진이 되물었다.

“너에겐 그들의 행복이 굉장히 중요한 모양이군.”

로엔이 고삐를 당겨 말의 속도를 늦췄다. 그러자 진 역시 로엔의 속도에 맞춰 고삐를 당기는 게 보였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곁에 있는 이들은 고용인의 의미보단 가족이란 의미가 더 커요. 다른 귀족들이 비웃을 일이지만, 혈족이 없는 저에겐 그들이 가족이 되어 주었거든요. 그러니 공작님의 질문엔 그렇다고 대답해야겠네요.”

로엔이 제 영역 안의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듯 선을 그었다.

최근 들어 저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이 느껴졌지만, 아직 저를 그녀의 영역 안으로 받아들이진 않은 모양이다.

“나는 아직 네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 같군.”

진의 지적에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당혹스러움으로 흔들렸다.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경계의 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 모양이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서로에 대해 잘 몰라서요.”

“그럼 시간이 지나면 나 역시 네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과연 그의 말처럼 시간이 지난다면 그를 제 영역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을까?

세실이나 라이칸처럼 진을 믿고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게 가능할까?

굳이 대답을 내놓으라면 ‘아니다.’였다. 그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마음과는 달리, 상황이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가문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그의 심장에 돋아난 드래건의 비늘과 힘이 필요한 것뿐이다.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진실이 하나 있었다.

진의 몸에 돋아난 드래건의 비늘과 힘이 필요하다는 건, 그의 몸 안에 존재하는 드래건의 심장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바꿔 말해, 그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어 힘차게 뛰고 있을 드래건의 심장을 꺼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내가 저주를 풀기 위해 그의 몸속에 자릴 잡고 각성까지 한 드래건의 심장을 꺼낸다면, 그는 과연 살아 있을 수 있을까?’

로엔은 처음으로 마주한 진실에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마 살아 있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이미 진 로이슈덴은 그의 몸 안에서 눈을 뜬 드래건의 힘으로 인해 인간도, 그렇다고 드래건도 아닌 존재가 되어 있었다.

둘 중 하나가 소멸한다면 나머지 존재 역시 소멸될 게 분명했다.

궁극적으로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풀기 위해선, 진 로이슈덴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마지막 순간에 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고, 드래건의 힘을 취할 수 있을까?’

로엔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얼마 전이었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능하다고 답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심장에 검을 찌를…….’

로엔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재빨리 떨쳐 냈다. 이내 로엔의 시선이 진을 비켜 나갔다. 그리곤 앞을 주시하며 소원을 빌 듯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을 땐…… 가능하지 않을까요?”

“내가 말했었지? 네 장단에 원하는 만큼 놀아나 주겠다고. 하지만 내 인내심이 끝나기 전에 너 역시 결정을 내려야 할 거야. 나를 네 영역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밀어낼지.”

애써 외면했던 로엔의 시선이 다시 진에게 향했다. 흔들림 없는 은청색의 눈동자가 로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한 눈빛이었다. 한 번도 흔들린 적도 없고, 제 뜻을 꺾어 본 적 없는 포기를 모르는 눈이었다.

“무서운데요? 하지만 마음에 담아 둘게요. 그럼 이번엔 시합을 하시는 게 어때요? 펨부르크 호수까지 누가 빨리 도착하는지.”

로엔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재빨리 내기를 제안했다.

“좋아.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는 걸로. 어때?”

“혹시 도박에 관심 있으세요?”

“아니,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다행이네요. 도박에 중독된 남편은 이혼감이란 말이 있어서요. 고쳐서 쓸 수 없다는 것 같았어요. 그럼 정식으로 내기를 받아들이는 걸로 하고, 이럇!”

로엔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삐를 당겨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는 로엔을 보며 진이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도박에 중독된 사람은 싫다고 하더니. 본인은 반칙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이혼감이라니. 날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긴 했군.”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게만 느껴지는 게 문제였다.

“이럇!”

진 역시 고삐를 당겨 로엔의 뒤를 따라 펨부르크 호수 쪽으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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