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로엔은 몸속에 날뛰는 감각을 뒤로한 채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위치와 약속 시간을 알려 주세요.”
“그럴 것 없어. 내가 올 테니까.”
진이 휘장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로엔이 따라 나오려 하자, 진이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감기 걸려. 그리고 네가 나오면 내가 이걸 벗을 수도 없잖아. 내가 아무리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해도 눈을 가리고 2층을 내려가는 건 무리거든.”
진의 농담에 로엔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11시면 될까?”
“네. 충분해요.”
진이 눈에 묶인 천을 풀려는지 손을 올리는 게 보였다.
로엔이 아쉬워 입술을 깨문 순간, 그가 손을 내리고 다시 휘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로엔의 허릴 감싸 제 품으로 끌어당기더니 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어서인지, 로엔은 그의 키스에 화답하듯 입술을 열고 열심히 그의 타액을 삼켰다.
진득하게 달라붙어 영혼까지 삼킬 것처럼 농밀한 키스를 하던 진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하아, 이제 정말 가야겠어.”
진이 미련을 떨쳐 내려는 듯 로엔을 놓아주고는 서둘러 휘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제 눈을 가렸던 천을 풀고는 창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로엔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침대에 주저앉았다.
몸속에 남아 있는 열기를 참아 내는 게 버거웠다. 하지만 입가에 자꾸 미소가 떠오르려 했다.
잠시 후 줄을 당겨 휘장을 걷은 로엔은 창문으로 가 문을 닫았다. 그리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이상한 밤이었다. 요 며칠 밤마다 계속되던 두통이 사라지고 없었다. 거기다 몸속에 흐르는 독 역시 잠잠했다.
로엔은 손을 뻗어 잠옷 위로 제 가슴을 꾹 눌렀다. 무섭게 뛰던 심장이 시간이 지날수록 잠잠해졌다.
그제야 로엔은 눈을 감았다. 모처럼 잠 속으로 빠져들어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2층에 있는 로엔의 방에서 빠져나온 진은 어둡게 내려앉은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록스버그 공작가의 담을 넘던 기민함과는 달리 느긋한 모습이었다.
정원을 지나 담장 아래로 향하던 진이 걸음을 멈췄다.
“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군, 라이칸.”
이미 라이칸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는 듯 진의 태도는 태연하기만 했다.
사박, 나뭇잎이 밝히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 몸을 숨기도 있던 라이칸이 진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들을 테니 말해. 내게 할 말이 있어 기다리는 것 아니었나?”
“다시는 저택에 몰래 숨어드는 행동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라이칸의 경고에 진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하지만 어쩌지? 난 그렇기 싫은데.”
“공작님!”
라이칸이 불쾌한 듯 주먹을 쥐며 싸울 기세로 진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물러서.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로엔이 아끼는 자와 싸울 마음은 없거든.”
진의 태도에 서늘한 분위기를 뿜어내던 라이칸이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라이칸 역시도 지금 여기서 싸울 마음은 없었다. 여기서 싸움을 벌인다면 제 주인이 알게 될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로엔이 제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테고, 그걸 두고 내내 미안해할 게 분명했다.
“제가 물러서는 건, 공작님 때문이 아니라 로엔 님 때문입니다.”
라이칸의 말에 진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부터 거슬렸는데, 가신이면 가신답게 네 의무에 충실하는 게 좋아. 만약 조금이라도 선을 넘는 것 같으면 나도 두 번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거든.”
아무리 로엔이 아끼는 자라도 제 것을 넘보는 이는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이 첫 경고이고, 다음번은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제 의무가 록스버그 공작가를 지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서로를 쏘아보는 눈빛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두 사람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이게 내 경고에 대한 답인가?”
“공작님께서 말씀하신 선이 어떤 건지 모르지만, 저는 록스버그 공작가에 해가 되는 일이 생긴다면 절대 참지 않을 겁니다. 그것이 제 주군이 선택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라이칸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진을 응시했다.
그 순간 진이 픽 하고 웃었다.
“주인이나 기르는 개나 고집스럽긴 똑같군. 뭐, 상관은 없다. 네가 뭘 하든 나 역시 내 것을 탐하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그것이 내 사람이 아끼는 개라고 할지라도 예외는 될 수 없거든.”
서로의 뜻을 분명히 한 두 남자가 서로를 경계하듯 노려보았다.
한동안 팽팽하게 대치한 채 서 있던 진이 턱짓으로 비키라고 명령했다. 라이칸 역시도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섰다.
진이 라이칸이 서 있던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넌 네 주인이나 지켜. 쓸데없는 생각 말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이 훌쩍 담장을 넘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진을 보며 라이칸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소리 없이 움직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사실 침입자의 흔적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기민한 그조차도 2층 창문에 비친 그림자가 아니었다면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정도였다.
“제길!”
라이칸은 욕설을 짓씹으며 불이 꺼진 로엔의 침실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한때, 제가 로엔에게 충성심이 아닌 다른 감정을 가진 건 아닌가 생각한 적 있었다.
하지만 2년 전 로엔의 독 때문에 사경을 헤매던 때 죽음 직전에서 살아 돌아온 그가 눈을 뜬 순간, 저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던 로엔을 보며 제 감정이 연정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맹종, 그리고 맹신.
절대자를 우러르듯 라이칸은 제 주인인 로엔 록스버그 공작을 따랐다. 그것이 오랫동안 록스버그 공작가를 따른 가신인 러셀 백작가의 의무였다.
깊은 어둠이 라이칸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라이칸은 다시 한 번 저택을 훑어본 뒤 제 방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정각 오전 11시.
진 로이슈덴이 록스버그 공작가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보낸 지, 딱 1시간째 되는 시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엔은?”
허릴 숙이고 있던 스미스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제 주인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진의 친근한 태도 때문이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작님도 차를 드시겠습니까?”
“아니, 난 됐어. 로엔에게 바로 출발했으면 좋겠다고 말해 주겠나?”
“직접 들어가지 않으시고요?”
“여기에서 기다리지.”
진의 대답에 스미스가 묵례 후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진은 현관에 서서 록스버그 공작가를 눈으로 좇았다.
어젯밤엔 어둠 때문에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면서도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정원이었다.
“주인하고 똑같군.”
진은 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 사실도 모른 채, 즐거운 눈빛으로 로엔의 침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검은 천으로 제 눈을 가리며 함께 있고 싶으면 규칙을 지키라고 으름장을 놓던 모습이 떠올랐다.
진이 타이처럼 목에 맨 검은 천을 손으로 툭 쳤다. 어젯밤 로엔이 제 눈을 가렸던 천이었다. 장난스럽게 반짝이던 진의 눈빛이 다시 무심한 듯 정원을 바라보았다.
“공작님!”
로엔의 목소리에 진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외출 준비를 마친 로엔이 현관문을 지나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검은 베일을 쓰지 않은 로엔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반짝였다.
“공작님?”
로엔이 다시 한 번 진을 불렀다. 무감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서 있는 그를 보자, 너무 늦게 나와 화가 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가 너무 늦게 나온 모양이군요. 많이 기다…….”
“흠흠, 아니야.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 늦지도 않았고.”
로엔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진을 살폈다. 타고나길 서늘하고 무감한 성격이라서 그렇지, 지금 보니 그의 입가가 미세하게 풀어져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이제 출발하면 될까요?”
“그러는 게 좋겠어. 내가 안내하지.”
진이 에스코트를 자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예의 바르고 세심한 성격이었나? 분명 처음 만났을 땐 인간미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새삼 로엔은 그의 변화를 절감했다.
“감사합니다.”
로엔이 진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그는 조금 전과는 달리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현관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흘끗 뒤를 돌아보자 라이칸이 서 있었다.
그럼 그렇지. 타고난 성격은 변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다행인 건 최근 들어 로엔에게만 예외가 되었다는 것뿐.
“함께 동행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양해를 구하듯 묻고 있었지만, 어딜 보나 통보였다. 로엔의 안전을 생각해 진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땐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할 테지만, 로엔을 지키는 자가 여럿일수록 안전성은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좋도록 해.”
“저기요, 공작님? 오늘 외출에 저도 함께 가야 하는데…….”
괜찮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현관 뒤에 서 있던 세실이 얼굴을 불쑥 내밀며 저도 함께 가야 한다고 나섰다.
순간이지만 미세하게 그의 얼굴에 균열이 가는 것 같더니, 이내 마땅찮은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더는 없겠지?”
“네, 이게 다예요.”
로엔은 베일 대신 얼굴 가리개를 한 채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진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억지로 참는 게 눈에 보여서다.
진 로이슈덴이 인내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다니. 대단한 발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