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다행히 창문을 등지고 있는 상태라 그에게 얼굴을 들키진 않았지만 목욕 후라 얼굴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등 뒤에서 바닥으로 내려서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진이 방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무례하군요. 돌아가 주세요. 약속도 없이, 그것도 밤에 찾아오다니…….”
로엔은 눈으로 검은 베일을 찾았다. 그러다 의자 위에 걸쳐져 있는 베일을 발견하곤 손을 뻗었다.
“이상하군. 내가 알기론 분명 대신전에서 내가 내킬 때면 언제든 널 만나러 와도 된다고 허락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거야 당연히 방문 전에 전갈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밤에 찾아올 것이란 생각은 못했고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럼 이제부터 익숙해지면 되겠군. 계속해서 이럴 계획이니까. 그리고 대부분 연인이 예고 없이 방문하겠다고 말하는 건, 밤을 틈타 은밀하게 찾아오겠다는 뜻이란 것도 알아 두고.”
손에 쥐고 있던 베일을 쓴 로엔이 진을 향해 돌아섰다.
“정말 뻔뻔하네요.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굴 줄 알았다면 약속 같은 건 안 했을 거예요.”
“알아. 그래서 숨긴 거니까.”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로엔의 불쾌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진은 전혀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목욕을 한 모양이군.”
진의 시선이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로엔의 머리카락에 닿아 있었다.
“이제 아셨으면 그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다음 방문은 낮에 해 주시고, 도착하기 1시간 전엔 꼭 연락을…….”
“알았으니 말은 그만하고, 이리 와. 머릴 말려 줄 테니까.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잖아.”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가 달라고? 정말 박정하다니까.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하지 못할 거야. 그나저나 저택의 담은 왜 이렇게 높은 건지. 넘다가 다리가 부러질 뻔했다니까. 거기다 침실이 2층에 있어서 벽을 타고 올라오는 것도 쉽지가 않더군.”
칭찬이라도 바라는 것처럼 진이 구구절절 제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로엔은 젖은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어깨를 적시고 바닥의 카펫까지 젖는 걸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빨리 그를 쫓아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여기 있고 싶다면 제 규칙을 따라야 하는데, 하시겠어요?”
“규칙?”
“싫으면 돌아가시든가요.”
아쉬울 것 없다는 로엔의 태도에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여긴 진이 고갤 끄덕였다.
“좋아.”
“내가 뭘 할 줄 알고 허락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순순한 태도에 로엔은 어이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 예민하게 날 서 있던 신경이 누그러지며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선 앉아 봐요.”
앉으란 명령에 진이 당연하다는 듯 로엔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무해한 표정으로 로엔을 올려다본다.
“여기면 될까?”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절대 안 되죠. 여기 의자에 앉으세요.”
“난 여기가 더 좋은데.”
하지만 규칙을 따른다고 약속했으니 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로엔이 말한 의자에 앉았다.
“기다려요. 금방 올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있어요.”
“알았어.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
진이 손까지 들어 보이자, 로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곤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그리곤 서랍 안에서 검은 천을 꺼내 들고는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제 공간에 있을 때, 이렇게 계셔야 해요.”
로엔이 검은 천으로 진의 눈을 감싼 후 뒤에서 매듭을 지어 고정했다.
“이게 네가 말했던 규칙인가?”
“맞아요. 공작님이 제 모습을 보는 게 불편해요.”
겉으론 흉터가 있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인피면구를 떼어 낸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니까. 이런 걸 규칙이라고 내세우다니.”
“싫으면 가세요. 붙잡는 사람도 없는데.”
로엔의 말에 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누가 싫대? 이상하다고만 했지. 그럼 이제 이리 와서 앉아. 머릴 말려 줄 테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주셨으면 좋겠네요.”
“어차피 눈을 가려 널 볼 수도 없잖아. 그리고 사과도 하고 싶고. 내 생각만 한 건 사실이니까.”
로엔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진을 보았다. 진 로이슈덴에게 사과를 받다니. 요즘 믿기지 않은 일투성이라 로엔은 더는 예민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서툴면 당장 쫓아낼 줄 알아요.”
로엔은 짐짓 으름장을 놓으며 쓰고 있던 베일을 벗었다. 그리곤 마른 수건을 진의 손에 놓아 주곤 그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처음인 건 감안해 줘야 할 거야.”
미리 포석까지 까는 걸 보니 처음이 맞는 모양이다.
수건을 든 진이 조심스럽게 로엔이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짜고 털어 말리는 행동이 서툴긴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왜 온 거예요?”
타인이 머릴 만져 주자 긴장감이 풀리는지 로엔은 의자에 편히 등을 기댔다.
“말한 것 같은데?”
“농담 그만하시고요. 왜 오신 건데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늦게 방문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그야…….”
말이 안 되는 소리여서다. 마음이 내킨다는 뜻은 보고 싶어 왔다는 말처럼 들렸다.
진 로이슈덴이 저를 보고 싶어 한다니. 그것도 대신전에서 헤어지고 난 뒤로 5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야, 이상하니까요.”
젖은 머릴 말려 주던 진의 손길이 멈췄다.
“그렇게 이상한가? 내가 보고 싶어서 널 찾아왔다는 게.”
“당연히 이상하죠. 죽고 못 사는 연인도 아니고. 무엇보다 우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서로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제 상식으론…….”
말끝을 흐리며 어깰 으쓱해 보였다. 이제 농담 그만하고 방문한 목적을 털어놓으라는 뜻이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군. 이상하긴 해.”
멈췄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커다란 손이 로엔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그의 손이 예민한 귓불과 목덜미를 스쳤다.
눈을 가리고 있어서 감각만으로 움직이다 보니 벌어진 일일 테지만, 그의 손끝이 여린 살에 닿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의자에 기대 있는 게 불편해졌고, 그의 손길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몸속의 다른 감각을 일깨우는 느낌이었다.
“이제 된 것 같아요.”
로엔이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떼자,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진의 손이 떨어졌다.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도 진은 수건을 든 채 앉아 있었다.
“밤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로엔이 이젠 돌아가라는 듯 진의 손에 들려 있는 수건을 잡아당겼다. 순순히 제 쪽으로 딸려 오던 수건이 한순간 팽팽하게 당겨지더니, 순식간에 끌어당겨졌다.
“어엇!”
균형을 잃은 로엔이 수건과 함께 그의 품 안으로 딸려 들어갔다. 아차, 하는 순간에 진의 단단한 허벅다리에 올라앉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잡아당기기에 나는 같이 잡아당기라는 줄 알았지.”
이 남자가 정말, 나랑 장난하나!
무해한 듯 웃고 있는 진을 보자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거기다 그의 손이 제 허리에 자연스럽게 감겨 있어 그가 놓아주지 않으면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정말…….”
로엔이 쏘아붙이기 위해 입을 연 순간……,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를 내려던 것도 잊은 채 로엔은 그의 허벅다리에 앉은 그대로 굳어졌다. 그리곤 재빨리 두 손으로 그의 입을 막은 다음 낮게 속삭였다.
“조용히 해요. 누가 왔나 봐요.”
똑똑. 노크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공작님, 라이칸입니다.”
라이칸이 갑자기 방을 찾아오다니.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 터라 로엔은 당황했다.
“정원에서 침입자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침입자라니.
라이칸의 설명에 로엔은 진을 보았다. 라이칸이 찾고 있는 침입자가 바로 진 로이슈덴인 모양이었다.
로엔이 손으로 진의 입을 틀어막은 채 제 허리를 감싼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곤 그의 몸에서 내려와 그를 잡아끌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으려 하자, 진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와요. 라이칸에게 붙잡혀서 도둑으로 몰리고 싶지 않으면.”
꼼짝도 않던 그가 로엔의 경고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엔은 어디에다 진을 숨길까 고민했다.
“공작님, 이미 다른 곳은 다 살펴보았지만 침입자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제가 방으로 들어가 확인해 보면 안 되겠습니까?”
로엔은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진을 숨길 방법에 골몰했다. 라이칸은 안에서 이상한 낌새라도 느껴진다면,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태세였다.
어떡한다?
결국 로엔은 진을 제 침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얼른요.”
밖에 들리지 않게 낮게 속삭인 다음, 그가 침대로 들어가 눕는 걸 도왔다. 그리곤 그녀 역시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렸다.
“공작님!”
침묵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지 라이칸의 목소리가 성급하게 들려왔다.
“라이칸? 무슨 일이지?”
최대한 잠을 자다가 깬 듯 잔뜩 쉰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이불 아래서 진이 웃는지 이불이 들썩이는 게 보였다. 로엔은 손으로 얌전히 있으라는 뜻으로 그의 몸을 꼬집어 경고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침입자가 들어온 것 같아서 저택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혹시 공작님 방에 누군가 침입한 건 아닌지 들어가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피곤해서 자던 참이었어. 보니까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그러니 그만 가 봐.”
로엔의 대답에도 라이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