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그건…….”
로엔이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관이 준 봉투 안엔 사흘마다 한 번씩 대신전에서 만나는 것 외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었다. 타라 여신의 온전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 몸은 물론 마음의 정화를 위해서라고 쓰여 있었고.
“유감이지만 그건 안 될 것 같군요. 대신관님께서 주신 봉투 안엔 결혼식까지 단둘이 있는 것도 금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키스라니. 안 될 일이었다.
“아님, 손이라도 잡게 해 주든가.”
진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고집을 피웠다.
“지금 제 말을 듣지 않으신 건가요? 대신관님께서 만나는 것도 안 된다고…….”
“내가 내 여인에게 키스 좀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진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로엔의 강경한 태도에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자 퇴폐미가 더해지며 매혹적으로 변했다. 로엔은 홀린 듯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나도 하고 싶다. 키스가…….
“뭐, 좋아. 그럼 매일 얼굴이라도 봐. 그 이상은 절대 안 돼. 나도 더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니까.”
진이 아주 많이 양보한다는 양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
저도 모르게 로엔의 입술 새로 실망스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진 역시도 그렇게 느낀 듯 묘한 눈빛으로 로엔을 봤다.
“뭐야, 그 한숨은. 나만 원했던 게 아닌 모양인데?”
단정적으로 말하는 진의 목소리에 놀라 로엔이 재빨리 부정했다.
“아니요. 그런 적 없어요.”
딱 잡아떼긴 했지만,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는 이미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없긴 뭐가 없어. 딱 봐도 견적이 나오는데. 혹시 키스보다 더한 걸 원한 건…….”
“그런 적 없대도요. 그리고 여기서 한 마디만 더 하시면, 얼굴 보는 것도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하세요.”
말을 뱉어 낸 순간, 로엔은 혀를 깨물고 싶었다. 이건 숫제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대놓고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고백하는 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누가 엉큼한지 모르겠군. 머릿속에 야한 생각들로 가득 차선.”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로엔이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확신으로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잠깐만요, 공작님. 제 말 좀 들어……. 어?”
로엔이 뭔가를 발견하곤 재빨리 말을 삼켰다. 그리곤 진의 팔을 끌어당겨 대신전의 거대한 원통형의 주랑 뒤에 몸을 숨겼다.
“뭐 하는…….”
“쉿!”
로엔이 손가락을 입 근처에 대곤 턱으로 숲 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시종장과 함께 대신전의 비밀 문에서 나오는 에드윈을 볼 수 있었다.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은 에드윈이 마차로 걸어가는 걸 지켜봤다. 시종장이 마차의 문을 열자 이미 마차에 누군가 타고 있는 듯 검은 옷자락이 보였다.
‘누구지? 감히 황제의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라니.’
좀 더 마차 안을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갤 들었지만, 에드윈과 시종장에게 가려 더는 볼 수 없었다.
이내 에드윈이 마차에 오르자 시종장이 마부석에 올랐다.
황실의 소속의 마부가 아니라 시종장이 직접 마차를 몰다니. 아무리 봐도 뭔가 비밀스럽고 석연치 않은 구석이 느껴졌다.
“황제군. 대신관이 너에 대한 신탁을 이미 황제에게 알린 모양이야.”
진이 로엔을 돌아보았다.
“이미 그럴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현 대신관은 책임감이 강한 자라 신탁을 받은 순간 황궁으로 사람을 보냈을 거예요.”
하지만 의외인 건 에드윈이 직접 대신전까지 와서 신탁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했다는 점이었다.
‘대체 뭐가 불안한 거지? 아니, 대체 그가 알고 있는 게 뭘까?’
확신할 순 없지만 그가 제 생각보단 제 비밀이나 진의 비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차가 숲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요. 너무 늦었어요.”
몸을 숨겼던 주랑에서 나온 두 사람은 대신전의 입구로 향했다.
“데려다줄까?”
“아니요. 마차에서 라이칸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럴 필요 없다고 대답하며 로엔은 걸음을 재촉했다. 로엔의 머릿속은 이미 황제의 마차 안에 있었던 검은 로브를 입고 있던 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깐, 아직 대답하지 않았잖아.”
“뭘요?”
로엔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진이 불만이라는 듯 로엔을 보았다.
“내가 원할 때마다 만나는 것 말이야.”
그제야 로엔이 걸음을 멈추곤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공작님은 대체 얼마나 자주 만나야 만족하실 건데요?”
“말만 하면 다 되는 건가?”
“뭐, 그렇지 않을까요? 얼굴을 보는 것뿐인데. 그러니 얼른 약속이나 정해요. 언제 볼까요?”
로엔의 질문에 진이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대답을 회피한다.
“말해 주고 만나면 재미없잖아. 기다려. 내가 내킬 때 찾아갈 테니까.”
조금 불안하기도 했지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니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진 않을 터였다. 그리고 방문하기 전에 당연히 사람을 보내 연락을 취할 테고.
로엔은 상황을 가볍게 생각하기로 결심한 뒤,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좋아요. 기대되네요. 그럼 저는 가 볼게요.”
진은 로엔이 라이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불만스러운 듯 혼잣말을 되뇄다.
“나 외엔 손을 잡는 것도 안 된다고 해야겠군.”
* * *
“오늘은 목욕물에 허브를 좀 더 넣을까요?”
욕실에서 들려온 세실의 목소리에 로엔은 생각 없이 대충 대답했다.
“그렇게 해 줘.”
세실이 욕조에 허브가 든 주머니를 넣으며 열린 문 사이로 로엔을 돌아보았다. 탁자에 앉아 라이칸이 랑케에서 가져온 서류를 보는 중인지 내내 표정이 심각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표정이 심각해 보이셔서요.”
“게르피온에서 보내온 정보들인데,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뭐가요?”
“심각한 내용은 아닌데 게르피온 북쪽 마을의 대장간에서 미친 노파 하나가 철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냐고 했대.”
현재 랑케의 정보원을 통해 황제와 접촉한 흑마술사에 대해 조사 중이었다. 그러던 중 게르피온에서 이상한 자료를 보내온 것이다.
“철이 아니면, 뭘로 만드는데요?”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나 봐.”
“아니, 그 비싼 걸로 무기를 만들어요? 바보도 아니고. 그런데 호리우스의 눈으로 무기는 만들 수 있는 건가?”
세실이 고갤 갸웃했다. 제 머리로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직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호리우스의 눈에 진실을 보는 힘뿐만 아니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 특별한 힘이 있다고 알려져 있거든. 아마 그 노파는 숨겨진 힘을 이용해 무기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
“아아, 그런 게 있었나 보네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 노파가 미친 건 확실한 것 같아요. 호리우스의 눈으로 무기라니. 황당한 소리처럼 들려서요.”
세실이 욕조에 손을 넣어 물의 온도를 체크한 다음 욕실에서 나왔다.
“준비 다 됐어요. 그만하시고 어서 들어가세요.”
“수고했어. 너는 그만 들어가서 자.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그래도 돼요? 사실 요즘 결혼식 준비로 정신이 없거든요. 요즘 같아선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에요.”
세실의 말에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얼른 가서 쉬어. 내일도 바쁠 것 아냐.”
“죄송해요, 주인님. 제가 눈이 너무 감겨서…….”
“걱정 말고 가 봐. 나도 뜨거운 물에 몸 좀 담갔다가 바로 자러 갈 거야.”
세실은 방을 나갈 때까지 미안한 얼굴을 했다.
로엔은 문이 닫히자 욕실로 들어갔다. 입고 있는 드레스를 벗어 옆에 내려놓고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첨벙, 첨벙. 로엔의 움직임에 물방울이 밖으로 튀었다.
세실이 허브 주머니와 함께 띄워 놓은 장미 꽃잎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결혼 날짜가 잡힌 후론 목욕을 할 때마다 욕조에 장미꽃을 띄워 놓았던 것이다. 몸에 장미 향이 베이게 해야 한다나 뭐라나.
거추장스러워 싫다고 했더니, 칼라일의 모든 레이디들이 다 하는 것이니 불편해도 참으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꽃 향이 몸에 배다니.”
로엔은 제 가슴 위에 새겨진 혈독화를 내려다보았다. 쓸데없이 장미 꽃잎을 띄우지 않아도, 제 몸에선 꽃 향이 났다. 불행히도 그 향이 세상에 알려진 적 없는 독초에서 나는 향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물에 젖은 혈독화를 내려다보는 로엔의 표정이 어두웠다.
최근 들어 혈독화가 있는 부근이 이유 없이 아플 때가 있었다. 몸속에 흐르는 피가 뜨겁게 날뛰며 맹독을 뿜어낼 때면 사라졌던 두통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최근에 세실이 바빠진 탓에 눈치채진 못했지만 로엔은 불안했다. 공작가의 지하 서고에서 혈독화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성년까지 혈독화를 몸에 품고도 살아남았던 자가 없었기에 변화에 대한 원인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축제에서 만난 노파가 금환 일식에 대해 알고 있었어.”
로엔은 축제에서 보았던 특이한 구술을 안고 있던 노파를 떠올렸다.
노파의 불투명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이유 없이 긴장했다. 시력을 잃은 눈이었지만 내면 깊숙한 곳을 꿰뚫린 느낌이었다.
“거기다 대신관에게 내려진 신탁이라니.”
베일을 벗어 대신관에게 흉터를 보인 순간,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제 얼굴을 훑던 대신관이 눈이 빠르게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얼굴에 붙인 인피면구가 가짜라는 걸 알아차렸다면 지금쯤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커다란 나무 아래 타라의 연을 쥐고 서 있었다니.’
그곳이 대체 어딜까? 아니, 그것보다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첨벙, 첨벙. 로엔은 욕조 안으로 깊숙이 몸을 가라앉혔다. 물속에 갇혀 숨을 참으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하지만 머릿속엔 대신전에서 빠져나가던 에드윈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정체불명의 사내 역시도.
‘황제가 숨기고 있는 게 뭘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는 만년설을 제련해 무기를 만드는 금지된 주술을 이용해…… 잠깐!’
물속에 잠겨 있던 로엔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첨벙, 첨벙, 쏴아아―.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로엔이 욕조 밖으로 나왔다. 손을 뻗어 세실이 놓아 둔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아 냈다. 서둘러 커다란 잠옷을 대충 걸친 다음, 젖은 머릴 수건으로 감싸며 욕실을 나왔다.
탁자로 다가간 로엔은 양피지 더미 안에서 조금 전까지 보고 있었던 자료를 집어 들었다.
‘미친 노파가 철이 아닌 호리우스의 눈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겠냐고 했다고 했어.’
이건, 연금술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연금술은 금기된 주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뭘 그렇게 심각하게 쳐다보고 있는지 모르겠군.”
창문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로엔의 어깨가 굳어졌다.
진 로이슈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