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대신관의 시선이 검은 베일로 향했다. 그제야 대신관이 신탁이라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실제와는 다른 로엔의 모습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순간 접견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지독한 고요에 세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락.
숨 막히는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베일이 벗겨지는 소리였다.
로엔이 제 얼굴을 가린 베일을 벗었다. 그러자 접견실 창문으로 들어온 오후의 햇살이 로엔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로엔은 대신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리개의 한쪽을 벗어 흉터를 내보였다.
대신관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천천히 숨을 삼키는 게 보였다.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록스버그 공작님. 공작님을 믿지 못한 게 아니라 신탁의 내용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절차였습니다.”
대신관이 로엔을 향해 고갤 숙였다. 그러자 로엔은 천천히 얼굴 가리개를 다시 귀에 건 다음 벗어 놓았던 베일을 집어 들었다.
“이리 줘. 내가 하지.”
불쾌한 표정으로 로엔이 하는 대로 지켜보던 진이 한 발 앞서 검은 베일을 가져갔다. 그리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로엔의 머리 위로 천천히 씌워 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경건해 보여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흉터는 로엔에겐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상처였다.
사고 이후, 지난 10년간의 시간이 점철된 제 멍에이자, 치욕을 견뎌 온 증거였다. 아무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만들어 낸 상처라 할지라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껍질 속에 숨겨진 여린 속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선 꼭 내보여야 할 상처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 로이슈덴이 제 상처를 가려 주려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지금껏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제 아픔과 그동안 묵묵히 견뎌 온 시간을 이해받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순간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마음속에 거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위험하고 휩쓸려서는 안 될 그런 변화의 바람이.
로엔은 햇살로 반짝이던 시야가 검은 베일로 가려질 때까지 진이 하는 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은 이미 진이 만들어 낸 바람에 집어삼켜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확인도 끝났으니, 폐하께 말할 필욘 없겠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또다시 그런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된다면, 우리에겐 말해 줘야 할 거야. 그것이 오늘의 무례를 갚은 일일 테니까.”
진은 로엔과 저를 우리라고 한데 묶어 표현했다. 이제부터 로엔 록스버그에게 하는 모든 행동은 진 로이슈덴에게 하는 행동과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진의 경고를 알아들은 대신관이 고갤 끄덕였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약속을 받아 내고서야 진이 노기를 누그러뜨렸다.
“그럼 결혼식 절차에 대해 논의하는 게 좋겠군. 3주밖에 남지 않아 내가 좀 급해서. 아마 그대도 사내이니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 생각되는군.”
진의 말에 대신관이 몸을 바로 했다.
분명 신관은 현세의 삶에서 벗어나 신성한 삶을 사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대신관에게 사내이니 충분이 이해할 것이라니. 이건 아직도 대신관의 행동에 화가 나 있다는 의미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테다.
평소의 근엄한 대신관으로 되돌아온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결혼의 절차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통상적으론 3개월의 예비 기간을 거쳐야 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만큼 빠르게 절차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우선은 사흘에 한 번씩 새벽 6시까지 대신전으로 오셔서, 타라 여신의 축원 의식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그것이면 되나요? 그것 외에 결혼식까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로엔의 질문에 대신관이 금색의 봉투를 두 사람 앞에 각각 하나씩 내놓았다.
“여기에 결혼식까지 지켜야 할 것들이 적혀 있습니다.”
진이 봉투를 들어 안에 있는 종이를 꺼냈다. 그리곤 천천히 읽어 내리더니, 불쾌한 듯 대신관을 보았다.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걸 다 지켜야 한다는 건가?”
대체 뭐가 쓰여 있기에 저렇게 화를 내는지 궁금해, 로엔도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화를 낼 만큼 특별한 내용은 없…….’
“특히 마지막 줄은 이해할 수가 없군. 결혼 전에 몸과 마음을 순결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니. 이건…… 헙!”
로엔이 종이를 내려놓고는 재빨리 두 손으로 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곤 제발 그만하라는 듯 낮게 속삭였다.
“그만해요. 대체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그것도 대신관님 앞에서.”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아직 3주나 남았는데…… 으읍.”
채 막지 못한 입술 새로 진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로엔은 곁눈으로 대신관의 눈치를 살피며 두 손으로 있는 힘껏 그의 입을 막았다.
“대신관님, 지켜야 할 다른 규칙이 없다면 저희는 그만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사흘 후 6시에 뵙겠습니다.”
어색함을 감추며 대신관에게 대충 인사를 하곤, 로엔이 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금 이렇게 가면 이 규칙을 꼼짝없이 지켜야 한다는 말인데, 순결까진 아니라도 키스 정도는 협상을…….”
아니, 지금 대신관과 무슨 협상을 한다고 이러는 건지…….
로엔은 진이 이렇게 대책 없이 구는 게 저와 키스를 못해서라고 생각하니 얼굴에 불이 날 것 같았다.
“당장 따라 나오세요. 3주 동안 키스는커녕 내 그림자도 못 보게 되는 수가 있으니.”
접견실 안에 로엔의 목소리가 울렸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경고였다.
감히 로이슈덴 공작에게 되지도 않는 협박을…….
“제길, 알았어. 나가면 될 것 아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진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타란 대륙의 최고의 기사라는 칭호를 받는 로이슈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저보다 작고 연약한 여인의 한마디에 꼼짝도 못하고 꼬리를 내리며 순종하는 진 로이슈덴이라니. 그 모습이 마치 주인에게 잘 길들여진 커다란 맹수 같았다.
대신관은 로엔의 손에 이끌려 접견실을 나가는 진을 충격받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금 전 광경을 떠올리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이내 제가 대신관이란 사실을 떠올리곤 ‘흠, 흠!’ 헛기침까지 하며 애써 웃음을 삼켰다.
그때, 접견실 벽이 균열을 일으키며 열렸다. 그리고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에드윈이 굳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한 대신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확인은 했나?”
비밀 벽장 안에서 접견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들었을 게 분명한데도, 에드윈은 다시 한 번 대신관에게 확인하듯 물어 왔다.
“확인한 결과 제가 본 것은 신탁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공작님의 얼굴에 있는 흉터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대신관의 대답에 에드윈이 고갤 끄덕였다.
오늘 새벽, 대신관으로부터 록스버그 공작에 관한 신탁을 받은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평소라면 개인에게 내려진 신탁 같은 건 무시할 테지만, 록스버그 공작에게 내려진 신탁이었다.
무엇보다 선대 황제가 제 반려로 점찍었던 여인이었던지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젠 진 로이슈덴과 결혼할 몸이라 더더욱 그랬다.
에드윈이 업무까지 팽개치고 그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대신전을 찾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가끔 잘못된 것을 보기도 하는 모양이군.”
에드윈이 이제 대신관으로서 신성력이 다한 건 아니냐는 듯 비꼬았다.
“신탁이란 것이 황실과 연관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다양한 상징성을 품고 굴절되어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이번 경우엔 결혼에 관련해 타라 여신께 축원 기도를 드리던 중이었으니, 제 무의식에서 록스버그 공작님의 모습을 변형시킨 듯합니다.”
대신관은 아드리안 제국의 황실인 존더부르크에 관련된 신탁이 아닌 이상 신빙성이 크게 떨어질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만약 공작과 관련해 또 다른 뭔가를 보게 된다면 즉시 나에게 알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
대신관이 허릴 숙이자, 에드윈이 조금 전 나왔던 비밀 문으로 다시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대신관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내려진 신탁으로 당황해 황제에게 알리긴 했지만, 두 사람을 만나고 나니 제 행동이 섣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황제의 태도가 평소와 달리 유난스러운 것도 있었다.
“직접 대신전까지 찾아와 확인을 하다니.”
대신관은 앞으로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접견실을 나섰다. 곧 기도 시간이었던 것이다.
* * *
“기다려.”
화가 난 듯 앞 서 걸어가는 로엔을 진이 불러 세웠다.
“그래서요?”
걸음을 멈춘 로엔이 뒤를 돌아보며 이제 말해 보란 듯 진을 바라보았다.
건국제 때 은둔자의 숲에서 헤어진 이후,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일주일 만이었다. 그런데 다시 만난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진의 시선은 로엔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고, 태도 역시도 한없이 물렀다.
“싫어.”
단호한 목소리였지만, 말투 때문인지 꼭 투정처럼 들린다.
‘로이슈덴이 투정을 부리다니.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로엔은 대신관 앞에서 당황했던 것도 잊고, 베일 사이로 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로엔의 침묵이 그의 얘길 들어주겠다는 의중으로 느껴졌는지, 진이 제 생각을 가감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참는 것도 죽는 줄 알았어. 그런데 3주를 기다리라니.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진이 불가능하다는 듯 다시 강하게 어필했다. 이젠 대신관이 아니라 로엔을 설득할 기세였다.
“그럼 대체 저와 3주 동안 뭘 하고 싶으신 건데요? 당연히 결혼 전까진 순결의 의무를…….”
“그걸 지키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군.”
갈수록 가관이었다. 이젠 지금껏 결혼식을 올린 모든 이들을 상대로 시비를 걸고 있었다. 시비의 이유는 ‘그들이 과연 결혼 전까지 순결했을까?’였고.
“그러니까 원하는 게 뭔지만 말씀하시라고요.”
살짝 짜증이 담긴 목소리였는지, 불만스럽게 말하던 진이 로엔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곤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원할 때마다 너와 키스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