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15화 (116/201)

115화

대신전에 도착한 진은 신관의 안내로 접견실로 향했다.

“록스버그 공작은 도착했나?”

“아니요.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신관의 대답에 진이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 정확히 10분이 남아 있었다.

신관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던 진은 밖에서 들려온 마차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그의 기척을 느낀 신관이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작님?”

“조금 기다렸다가 가는 게 좋겠군.”

“……?”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한 신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복도를 따라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또 다른 신관과 함께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복도를 걸어오는 게 보였다.

“왔군.”

진의 목소리에 신관은 그제야 진이 걸음을 멈추고 기다린 상대가 록스버그 공작임을 눈치챘다.

신관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진 로이슈덴과 록스버그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검술 시합장에서 제국민들이 앞으로 10년은 두고두고 회자할 만큼 떠들썩한 청혼을 했다더니, 과연 맞는 말인 듯했다.

검을 베일을 써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진 로이슈덴은 아름다운 레이디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열렬한 눈빛이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고 하더니.’

딱 진 로이슈덴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제게 걸어오는 그 짧은 순간을 참을 수가 없어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빠져도 단단히 빠진 듯했다.

신관은 대체 괴물 공작의 어떤 점이 냉혹하고 잔인한 기사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인지 궁금했다.

1년 전에 대신전의 행사에 참석한 록스버그 공작을 딱 한 번 본 것이 다긴 했지만, 검은 베일을 쓴 록스버그 공작에 대한 인상은 딱히 없었다.

약간의 혐오와 두려움 정도랄까?

신관으로서 편견에 사로잡혀선 안 될 일이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불행을 몰고 다니는 괴물 공작이란 소문이 두려움을 부추긴 듯했다.

아무튼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진 로이슈덴처럼 괴물 공작이 절대로 아름다운 레이디처럼 보이진 않았다.

“로이슈덴 공작님.”

생각보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 신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서둘러 로엔에게 예를 갖췄다.

로엔 역시 신관에게 살짝 고갤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다시 진에게 고갤 돌렸다.

“저를 기다리신 건가요?”

복도에 서 있던 진을 보며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밖에서 마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서, 혹시나 네가 아닐까 했지.”

로엔이 베일 안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 소리만 듣고 제가 아닐까 생각했다는 말이 꼭 제 주인의 소릴 알아듣는 강아지 같아서였다.

‘그렇다는 건, 그의 목줄은 내가 쥐었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예상보다 좀 늦은 것 같군. 대신전에 함께 가자고 공작저로 사람을 보냈는데, 벌써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아서.”

“잠깐 들를 데가 있었어요.”

“어딘지 물어도 될까?”

“그레이트 모먼트에 갔었어요. 5시면 특별판이 발간되는 시간이라.”

“아, 네가 나에게 공개 구혼을 했던 그 신문을 말하는 모양이군. 이번엔 무슨 일을 꾸민 거지?”

진이 관심이 생긴 듯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로엔이 짓궂게 웃더니 고갤 가로저었다.

“제가 나중에 특별판을 드릴 테니, 직접 확인해 보세요. 귀족들 사이에서 ‘괴물 공작과 아름다운 기사’라는 칼럼이 굉장히 인기가 많은 모양이에요. 이제 갈까요? 대신관께서 기다리실 테니까요.”

진은 더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대신관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로엔과 함께 나란히 접견실로 향했다.

쏟아져 내리는 햇살과 대신전의 긴 회랑을 따라 불어온 바람이 두 사람을 휘감고 돌았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똑똑. 접견실 문을 두드린 신관이 고했다.

“대신관님, 로이슈덴 공작님과 록스버그 공작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여보내세요.”

명령이 떨어지자 신관이 문을 열고는 옆으로 물러섰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수고했어.”

진이 신관에게 예의상 인사를 건넨 뒤 로엔 쪽으로 고갤 돌렸다.

“먼저 들어가는 게 좋겠군.”

로엔이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선 손을 내밀었다. 다른 건물과는 달리 대신전의 접견실로 들어가기 위해선 2단 계단을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로엔은 한 손은 드레스 자락을,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론 자연스럽게 진의 손을 잡고는 계단을 올랐다.

“고마워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 수 없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소리를 알아들은 듯 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로엔이 앞서 안으로 들어가자, 진 역시 뒤따라 들어갔다.

밖에 남은 신관은 입까지 벌린 멍청한 표정으로 진 로이슈덴을 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 로엔을 안내했던 동료 신관이 그의 팔을 툭 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접견실 문을 닫았다.

“자네도 보았나? 내 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군.”

옆을 보니 동료 신관 역시 저와 똑같은 표정으로 넋이 나가 있었다.

“나 혼자 보았다면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을 정도라니까.”

그나마 둘이 봐서 환상이 아니라고 자각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내 생전에 친절하고 예의 바른 로이슈덴 공작님을 뵐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건만.”

동료 신관의 말에 그 역시도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전에 한 번 전쟁터로 승리를 축원하는 기도를 해 주러 갔을 때, 나는 사신이 땅에 내려온 줄 알았다니까.”

“온몸에 피 냄새가 진동했는데 눈빛만은 형형했었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그때 땡땡땡, 땡땡땡― 6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신관은 6시에 누군가와 했던 약속을 떠올리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 그러나?”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서. 먼저 기도실에 가 있어. 나도 곧 뒤따라갈 테니까.”

“곧 기도 시간인데 늦으면 어쩌려고.”

“난 괜찮을 테니, 걱정 말고 가기나 해. 늦으면 자네는 혼꾸멍이 날 테니까.”

신관이 조금은 초조한 표정으로 복도를 따라 걸어가자, 동료 신관이 이상한 듯 고갤 갸웃했다. 곧 기도 시간인데 약속이라니.

사실 그것보다 기도 시간에 늦었는데도 괜찮다는 말에 더 놀랐다. 동료 신관은 신관이 사라진 쪽을 보며 묘한 눈빛을 보냈다.

* * *

“어서 오십시오, 록스버그 공작님. 그리고 로이슈덴 공작님.”

접견실로 들어온 두 사람을 대신관이 맞았다. 3주 후가 결혼식이었지만 그 전에 타라 여신의 축원을 받아야 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대신관님.”

로엔이 먼저 대신관에게 인사를 건넸다.

“공작님께서도 타라의 연은 받으셨습니까?”

대신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로엔이 고갤 들어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뜻으로 타라의 연에 대해 묻는지 의문이 들어서다.

“성인 의식에 참석해 대신전에서 준 타라의 연을 받았습니다.”

“혹시 타라의 연의 장식이 공작새였습니까?”

순간 로엔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분명 대신전에서 타라의 연에 매단 장식은 모두 다르다고 들었다. 그러니 누가 어떤 장식을 받게 될지는 우연이라고밖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대신관은 마치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걸 왜 묻는 거지, 대신관? 무엇보다 타라의 연은 반려가 될 자에게만 보이는 것으로 아는데. 대신관에게 말할 의무는 없지 않나?”

진이 로엔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대신관을 향해 말했다.

그의 행동이 그녀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느껴져, 로엔은 혼란스럽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로이슈덴 공작님. 별 뜻이 있었던 게 아니라, 오늘 새벽 기도 중에 록스버그 공작님께서 공작새가 매달린 타라의 연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혹시나 그것이 맡는다면, 신탁이 아닌가 해서 여쭌 것이었습니다.”

대신관의 설명에 치켜 올라갔던 진의 눈썹이 제자릴 찾았다.

“신탁이라고?”

“사실 신탁과는 조금 다른 것이라, 저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록스버그 공작님을 뵙고 사실 관계를 먼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대신관이 숨김없이 대답하자, 로엔이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앉아서 얘기해도 될까요?”

“아, 제가 경황이 없었군요. 여기 앉으세요. 차는 뭘로 드시겠습니까?”

“차는 괜찮아요. 공작님은 드실래요?”

대신관의 안내로 소파에 앉은 로엔은 옆에 앉은 진에게 물었다.

“나도 괜찮아.”

맞은편에 자릴 잡은 대신관이 그런 두 사람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신뢰가 눈에 보여서다.

특히 진 로이슈덴은 무의식적으로 로엔을 제 영역 안에 두고 보호하려 하고 있었다. 맹수가 제 암컷을 살피듯 그의 행동에는 소유욕과 진득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대신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가 받은 타라의 연에 공작새가 달려 있었어요. 이제 새벽에 보셨다던 신탁의 내용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로엔의 대답에 대신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직 신탁이라고 결정 내릴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제가 본 내용이 신탁이라면, 폐하께도 보고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대신관의 말에 진의 얼굴에 서늘한 냉기가 떠올랐다.

대신관의 말처럼 개인에게 내려진 신탁이라고 할지라도 대신전에 내려진 이상 그 내용은 무조건 황제에게 보고해야 했다. 신탁의 경중과 상관없이 아드리안 제국과 연관이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제가 본 건 록스버그 공작님이 타라의 연을 손에 쥔 채 커다란 나무 아래 서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본 것은 공작님의 얼굴이 흉터 없이 깨끗한 모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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