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진정해. 나도 지금 미치겠으니까.”
진이 그녀를 달래듯 귓불을 잘근잘근 씹으며 힘껏 빨아 당겼다.
“흐읏.”
나른한 전율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 로엔은 진한 쾌락에 못 이겨 그의 입술을 먼저 찾았다. 그리곤 그가 했던 것처럼 입술을 핥고 삼키며 욕심껏 빨았다.
채워지지 않는 안타까운 욕망이 너무도 절박했다.
갖고 싶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 손에 쥐고 싶었다.
처음으로 들끓는 지독한 탐욕에 로엔은 몸을 떨었다.
“쉬―, 쉿!”
연신 신음을 뱉어 내는 로엔에게서 입술을 뗀 진이 젖은 혀로 귓불을 짓씹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로엔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공작새의 둥지가 있는 거대한 나무 아래로 공작새의 깃털이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욕망에 미쳐 키스에 정신없이 빠져 있는 사이, 제 신음 소리에 놀란 공작새가 날갯짓을 한 모양이다.
“들킨 건가요?”
열기로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아닌 것 같아. 이젠 움직임이 더는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그냥 둥지 안에서 날갯짓을 하다 깃털이 떨어진 것 같아.”
로엔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공작새의 깃털에서 눈을 떼 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한 모습이었다.
끝까지 약속을 지키는 그를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양감에 눈가마저 뜨거워졌다.
‘대체 이 감정은 뭘까?’
울컥울컥 목구멍을 치받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의 정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로엔은 애써 감정을 삼키며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만 방해하고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돌아가자는 말에 진이 아쉬운 듯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낮게 한숨을 내쉬는 그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듯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 귀엽게만 느껴졌다.
“가기 싫어. 더 있고 싶어.”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그가 제 체향을 맡는 듯 숨을 한껏 들이 마시는 게 느껴졌다. 로엔은 간지러워 몸을 비틀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간지러워요.”
로엔의 웃음소리에 진이 고갤 들었다. 꼭 감은 눈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눈을 뜨고 로엔의 웃는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눌러 참는 모습이었다.
“하아, 제길!”
결국 욕설을 뱉어 내며, 다시 로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가야겠지?”
“더 방해했다간 들키고 말 거예요. 다음에 다시 와요.”
로엔이 그를 살짝 밀어내자, 진이 더는 버티지 않고 고갤 들었다. 그리곤 아쉬움을 떨쳐 내듯 로엔의 콧등에 제 코를 문지르더니 이내 온 얼굴에 쪽쪽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의 입맞춤은 오리가 알을 깨고 나온 순간 처음으로 발견한 상대에게 애정을 느끼듯 맹목적인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의 키스를 받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진이 제 주머니 속에 넣었던 검은 베일을 꺼내 로엔의 얼굴에 씌웠다.
얼굴에 익숙한 천의 감촉이 느껴진 순간, 베일을 사이에 두고 그의 입술이 진하게 얽혀 왔다.
촉촉하게 젖은 살갗 대신, 까슬까슬한 천이 방해물이 되다 보니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에 거친 키스가 계속되었다.
“하아, 아하―.”
아교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던 입술이 마침내 떨어졌다.
거칠게 뱉어지는 숨소리에선 욕망의 여운이 진득하게 남아 있었다. 정말 이렇게 있다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동굴에서 일을 치를 것 같았다.
로엔이 고갤 들자 검은 베일 사이로 진이 보였다. 정말 끝까지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보니 픽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진 로이슈덴은 드래건의 힘을 몸에 품고 있는 위험한 자였다. 아드리안 제국엔 반역자였고, 어쩌면 신탁이 예언한 자일지도 몰랐다.
‘그런 자인데, 과연 괜찮을까?’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풀기 위해 그가 필요하긴 했지만, 그가 가진 위험성까지 모두 품고 가도 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중에라도 제가 그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획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다만 처음과는 달리 마음 밑바닥에서 생겨난 생경한 감정이 문제였다.
‘괜찮을까? 모든 게 끝났을 때, 내가 그를 제대로 쳐다볼 수 있을까? 그를 끊어 낼 수 있을까?’
“이제 떠도 될까?”
진의 물음에 로엔은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재빨리 밀어냈다.
“네, 떠도 돼요.”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그가 눈을 떴다.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아는 듯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로엔에게 시선을 맞춰 왔다.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
베일 안에서 로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다 로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대답을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다행이네요. 그게 뭐든. 이제 갈까요? 갑자기 도망치듯 빠져나와서 다들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로엔이 진을 지나쳐 동굴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진이 따라오는 기척이 들리지 않았지만, 로엔은 멈추지 않았다.
어두운 통로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커튼처럼 드리워진 은빛 폭포수가 보였다.
로엔은 이곳으로 오기 위해 그의 품에 안겨 왔던 게 떠올라 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나갈 때는 그의 품에 안겨 나가고 싶지 않았다.
로엔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진의 그녀의 팔을 잡고 돌려 세웠다.
“무슨 일……?”
“늦었어.”
“……”
“뭘 생각하든 늦었다고. 이미 널 내 영역 안에 들여놓기로 결정했거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깊고 서늘한 은청색의 눈동자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말처럼 그는 결정을 내렸고, 이젠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를 뼛속까지 이용해 먹으려고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면서 늦었다니.
사실, 늦었다는 말은 오히려 로엔이 진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후회나 하지 말아요.”
로엔이 화가 나 뾰족하게 말하자, 진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감하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자 로엔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미소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보면 그에게 단단히 홀린 모양이다.
로엔은 처음으로 위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빛 폭포수 아래 부서지는 그의 미소를 보며, 로엔은 어쩌면 제가 친 덫에 그가 아니라 제가 걸려든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녀를 뒤흔들려 하고 있었다.
* * *
오후 5시, 그레이트 모먼트지의 특별판이 발행되는 시간이었다.
신문사 건물 주위에서 특별판이 나오길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건물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유리엘라 광장의 종탑에서 5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소리가 끝이 날쯤, 굳게 닫혀 있던 건물의 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손에 신문 뭉치를 들고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익숙한 광경인지 사내는 높은 단 위에 올라서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그레이트 모먼트의 특별판입니다. 어서 와서 받아 가세요. 오늘도 100부 한정판이며, 한 사람당 한 개씩입니다.”
사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특별판을 받아 가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했다.
평소 난장판이던 모습과는 달리 신문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광경이 무척이나 낯설었지만, 서 있는 사람들은 며칠 동안 특별판을 차지하기 위해 뒷골목의 무뢰배들처럼 주먹다짐까지 해 가며 전쟁을 치른 탓인지 이젠 익숙한 듯 초연하기까지 했다.
내막이야 어찌 되었든, 겉으로 보기엔 내리 쪼이는 오후의 햇살처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신문을 받아 든 사람들은 특별판이 보물이라도 된 듯 품 안에 답삭 안고는 제 주인이 기다리고 있을 저택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건국기념일이 끝난 후로, 귀족들이 특별판에 실린 기사 내용을 읽는 데 혈안이 된 탓에 괜스레 고용인들만 죽어나고 있었다.
특별판의 배부가 끝나자, 건물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한산해진 거리를 보며 특별판을 배부하던 사내가 혀를 끌끌 찼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그 칼럼이 뭐라고 귀족들이 이렇게 특별판에 목을 매는 건지.”
그리곤 특별판이 나오자마자 미리 빼내 품 안에 꼭꼭 숨겨 놓았던 특별판을 꺼내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라는 칼럼을 눈으로 찾았다.
“그러니까, 귀족들이 그렇게 읽고 싶어 하는 칼럼이 이거라는 거지?”
사내는 손끝으로 기사를 한 줄 한 줄 짚으며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괴물 공작과 아름다운 기사.’라는 제목 아래 쓰인 칼럼은 오늘로 벌써 다섯 번째를 맞고 있었다.
『본지는 검술 시합장에서 로이슈덴 공작이 록스버그 공작의 공개 구혼에 대한 답으로 ‘타라의 연’을 준 사건을 기점으로, 지난 5일 동안 ‘괴물 공작과 아름다운 기사’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써 왔다. 오늘은 그 마지막 날로 3주 후 대신전에서 두 가문의 결혼식이 치러짐을 알린다.
이는 괴물 공작이라 알려진 록스버그 공작이 우리의 아름다운 기사, 로이슈덴 공작에게 공개 구혼한 지 세 달 만에 이뤄진 성과로…….』
“잠깐, 이게 뭐야.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생각 없이 칼럼을 읽던 남자가 신문에 코를 박을 듯 납작 고갤 숙였다. 그리곤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조금 전 읽었던 부분을 다시 소리 내서 읽기 시작했다.
“3주 후 대신전에서 두 가문의 결혼식이 치러짐을 알린다. 세상에!”
사내는 요 며칠 칼라일의 귀족들이 집사까지 보내 그레이트 모먼트지의 특별판을 받아 오는 데 혈안이 되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괴물 공작과 로이슈덴 공작이 결혼을 한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다 나눠 줬으면 들어올 것이지, 뭐 하고 넋을 빼고 섰어?”
사내는 저를 부르는 동료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 들어가.”
사내는 조금 전 특별판을 받아 들고 저택으로 향하던 집사들처럼 특별판을 품에 고이 안고는 서둘러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한적한 오후의 칼라일을 휘감고 돌았다.
“이제 출발할까요?”
그레이트 모먼트의 건물과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를 세우고,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라이칸이 제 주인을 돌아보았다.
“출발해. 약속 시간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할 거야.”
로엔의 대답에 라이칸이 마부에게 가야 할 장소를 말했다.
“대신전으로 간다.”
이내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대신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