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날카로운 시선에 문득 가슴이 서늘해졌다.
대체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만에 하나 그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게 내 정체라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정말 그가 그런 의심을 했다면 조금 전 대화에서 시모네타가 제 정보원이라고 했을 때, 더 꼬치꼬치 캐물었어야 했다. 집요하고 냉정한 성격의 그가 쉽사리 물러서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결론은 하나였다. 제 추측이 틀렸다는 것.
로엔은 밀려드는 불안감을 떨쳐 내며 여상하게 말했다.
“그래서 이제 확인해 보고 싶은 것에 대한 의문은 풀렸나요?”
“대부분은.”
진이 모호하게 대답하며 가면에 닿아 있던 손을 거둬들였다. 대신 로엔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에 채워진 타라의 연을 손끝으로 쓰다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놓았다.
로엔은 그런 진을 눈으로 좇았다. 다행히 뭔가 의심하는 것 같진 않았다. 지나치게 예민했던 모양이다. 로엔은 그제야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던 불안감까지 완전히 밀어낼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장소가 있는데, 보여 주고 싶었다고 하면 믿을 텐가? 그리고 그 전에 쓰고 있는 가면 좀 벗는 게 어때?”
“아, 잠깐만요.”
로엔이 서둘러 진에게 등을 돌렸다. 조금 전 그의 손이 가면에 닿았을 때, 벗겨질 것이란 불안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제안에 순순히 동의했다.
서둘러 가면을 벗은 로엔은 준비해 온 베일을 썼다.
“이제 됐나요? 공작님이 말씀하신 장소에 갈 준비는 끝난 것 같은데.”
로엔이 별생각 없이 돌아서다 숨을 삼켰다. 진이 진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온몸의 신경 역시 예민해져,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뜨겁게 열이 나는 듯했다.
“갈까?”
로엔이 대답 대신 고갤 끄덕였다. 목소리를 냈다간 떨림이 고스란히 드러날 것 같았다.
“어딜 가는데요?”
“공작새의 둥지. 그 아래 나만 아는 비밀 장소가 있거든.”
공작새의 둥지라면 폭포가 있는 곳이다. 또한 그곳은 진 로이슈덴을 처음 만났던 장소이기도 했다.
“둥지 아래 비밀 장소가 있었나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나는 왜 못 봤지?’
매달 그믐이면 공작새의 눈물을 받으러 갔었지만, 진이 말하는 비밀 장소 같은 건 보지 못했다.
“폭포 뒤쪽에 숨겨져 있어 찾기 힘들었을 거야. 나도 갑자기 비가 내리는 바람에 비를 피할 장소를 찾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거라.”
마치 로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진이 상세히 설명을 덧붙였다.
“비밀 장소라니, 기대되네요.”
로엔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자, 진이 로엔을 돌아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오늘 정말 이상하다. 검술 시합장에서 시작해 축제가 열리는 유리엘라 광장, 그리고 은둔자의 숲까지. 진 로이슈덴은 작정하고 다정하게 굴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떨림도, 입가에 걸린 미소도, 그리고 매 순간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눈빛이 연인을 대하듯 애틋했다. 그래서 자꾸만 심장이 뜨거워졌다.
그가 손을 뻗어 로엔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그의 옆으로 잡아끌며 낮게 속삭였다.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야.”
* * *
공작새의 둥지가 있는 절벽에는 언제나 그렇듯 은빛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비밀 장소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이쪽이야.”
진이 로엔을 폭포 뒤쪽으로 이끌었다.
“잠깐, 드레스가…….”
뒷말을 다 뱉어 내기도 전에 진이 당연하다는 듯 두 팔로 로엔을 안아 올렸다.
“이제 괜찮지?”
“…….”
불편하지 않게 고쳐 안기까지 한 진이 폭포 뒤쪽으로 이어진 바위를 성큼성큼 건너기 시작했다. 그의 품에 안겨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얼마나 갔을까.
쏴아아, 하고 시원하게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의 굉음이 한순간 사라졌다. 고갤 들어 앞을 보자, 어느새 폭포수 뒤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로엔은 이곳이 진이 발견했다는 비밀 장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려 줘요.”
땅에 발이 닿자마자 로엔은 폭포수 안에 숨겨져 있던 비밀 동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달빛을 받아 커튼처럼 쏟아져 내리는 은빛 폭포수 때문인지 어둡지 않았다.
동굴은 아늑했고, 신비로웠다. 기대 이상의 모습에 로엔은 아이처럼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놀라긴 아직 일러. 안으로 들어가면 좀 더 아늑한 공간이 나오거든. 들어가 보겠어?”
“가 봐요. 얼른요.”
로엔이 열심히 고갤 끄덕이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두우니 조심해.”
앞장서 걷던 진이 로엔이 쓰고 있는 검은 베일을 보았다. 그리곤 아예 로엔의 손을 잡곤 좁은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달빛이 새어 들지 않는 안쪽으로 들어가자, 진의 말처럼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걱정 마. 조금만 더 가면 밝아질 거야.”
로엔의 불안을 감지한 듯 진이 낮게 속삭였다. 그의 잔잔한 말소리에 로엔은 안심이 됐다.
그의 말처럼 어둠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자 푸른빛이 눈앞에 나타났다.
“저건 야광석이네요. 너무 신기해요.”
마치 어두운 동굴을 밝히기 위해 누군가 가져다 놓은 것만 같았다.
“가 봐. 더 특별한 게 있으니까.”
진이 옆으로 비켜서 로엔이 먼저 갈 수 있도록 했다.
동굴 안에 야광석이 있는 것도 신기한데, 더 특별한 게 있다니. 기대감을 안고 로엔이 천천히 야광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몇 걸음 가지 않았는데 좁던 시야가 갑자기 넓어졌다. 놀라 고갤 들어 보니 위에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달빛을 통해 위쪽에 자리한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놀랍게도 그 나무 위에 둥지를 튼 공작새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공작새의 둥지 바로 아래군요.”
예민한 청각을 지닌 공작새에게 들킬세라 로엔이 작게 속삭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제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던 진이 다시 로엔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와. 내가 말한 건 그게 아니야.”
진이 로엔을 야광석이 깔려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곤 턱짓으로 동굴 안의 작은 옹달샘을 가리켰다.
“이건 뭘 것 같아?”
“샘 아닌가요?”
로엔의 대답에 진이 옆에 있던 마른 꽃잎을 뜯어 야광석이 있는 샘 안으로 던졌다. 그러자 마른 꽃잎이 물에 젖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생명을 얻은 듯 물 위에서 다시 붉은 꽃을 피워 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설마 공작새의 눈물로 만들어진 샘인 건가요?”
“맞아. 이젠 그믐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공작새의 눈물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지.”
로엔이 작은 샘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공작새의 눈물을 뜨기 위해 손을 뻗었다.
“조심해.”
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그가 손을 뻗어 흘러내리는 검은 베일을 붙잡았다.
사락, 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시야를 가렸던 베일이 사라졌다. 물을 뜨기 위해 고갤 숙인 탓에 베일이 흘러내린 모양이다.
“아.”
로엔이 당황한 듯 재빨리 고갤 돌렸다. 그리곤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로엔이 외투에 넣어 놓았던 얼굴 가리개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긴장해서인지 자꾸만 헛손질이다. 초조함이 극에 달할 즈음, 뒤에서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 막사에서처럼 네가 말할 때까지 눈을 감고 있을 테니까.”
부산스럽게 얼굴 가리개를 찾던 로엔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홀린 듯 진 쪽으로 고갤 돌리자, 젖은 베일을 들고 얌전히 눈을 감고 서 있는 그가 보였다.
그 순간, 긴장으로 굳어졌던 어깨가 스륵 풀렸다.
잔혹한 맹수 주제에 얌전히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아리게 박혀 들었다.
안도와 신뢰.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점점 실체화되는 순간이었다.
평정심을 되찾은 로엔이 주머니에서 얼굴 가리개를 꺼내 양쪽 귀에 걸었다.
“이제 눈 떠도 되요.”
로엔의 명령이 떨어지자 약속대로 꼭 감겨 있던 눈꺼풀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 아름다운 은청색의 눈동자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로엔에게 날아들었다.
“고마워요.”
“약속했으니까. 네가 불편해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
그러니 안심하란 뜻인 것 같았다. 별일 아닌 듯 여상하게 말하는 진에게 로엔은 감동했다.
그때, 진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베일을 제 얼굴에 쓰는 게 보였다. 그리곤 베일을 쓴 채,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불편해. 시야도 어둡고. 넘어지기 딱 좋겠어.”
진은 다시 베일을 벗었다. 그리곤 로엔에게 주는 대신, 제 주머니 안에 밀어 넣었다.
“위험하니 앞으론 쓰지 않는 게 좋겠어. 지금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진이 로엔이 쓰고 있는 얼굴 가리개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손을 뻗어 만지작거렸다. 불편한지 알아보기 위해서인 듯했다.
“저야 편하지만 사람들이 불편해할 거예요.”
로엔은 얇은 레이스를 움켜쥔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약속 때문인지 그가 얼굴을 가린 천을 벗길 것이란 불안은 없었다.
다만 다른 의미로 긴장이 됐다. 연신 천을 만지작거리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이 제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아서다. 만지고 싶은 건 천이 아니라 입술이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