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그가 말하려는 게 뭔지 눈치챈 로엔이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공작새의 눈물 외에 그의 몸속에서 날뛰는 드래건의 힘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또 하나 있어서다.
“다행이네요. 힘을 통제하게 되었다니. 하지만 힘들었겠어요. 혼자서 뭐든 견뎌야 했을 테니까.”
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로엔을 응시했다. 가면으로 가려진 로엔의 얼굴과 그리고 장갑을 낀 손에 시선이 내려앉았다. 마치 그녀의 상처를 핥듯 그의 눈길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넌 어땠는데? 사고 후에 말이야. 몸에 화상을 입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하던데. 지금은 괜찮나?”
“상처야 아무는 법이죠. 지금은 이 가면으로 숨기면 그만이고. 이제 괜찮은 편이죠.”
“아니, 내가 알고 싶은 건 겉에 드러난 상처가 아니라, 네 마음을 묻는 거야. 부모님이 돌아가셨잖아. 그것도 이제 괜찮은 편인가?”
로엔이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며 그녀의 안부를 물어 온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로엔은 입술만 달싹였다.
몸의 상처가 아니라 마음의 상처라. 사실 혼자 견디고, 버티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제 마음이 어떤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제 마음을 돌아보기엔 시간이 모자랐고, 삶이 너무도 잔혹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제 피가 곁에 있는 사람을 죽일 수 있었으니까.
문득문득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그녀의 신경은 예민해졌고, 그만큼 실수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른 이에겐 그저 실수지만, 제겐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었으니까.
그 중압감이 가끔 숨통을 죄어 올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몸속에서 날뛰는 혈독화가 저를 삼킬 듯 온몸이 독으로 잠식됨을 느꼈다.
제 운명이 저주스러웠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부모님의 목숨 대신 이어진 삶이었으니, 그 대가를 꼭 치러야 했다. 가문의 저주를 완전히 끊어 내는 것으로.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하지만 괜찮은 것 같아요.”
만약 괜찮지 않다고 해도, 괜찮아야 했다. 지금은…….
“대단하군. 난 아직도 견디기가 힘든데. 20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일이 너무도 생생해서, 망각이란 독을 삼키고 싶을 정도지. 혹시 내가 드래건의 심장을 어떻게 삼키게 되었는지 말을 했던가?”
“아니요. 하지만 알고는 있어요. 제 정보원에게 공작님에 대해 전해 들었거든요.”
“정보원이 있나?”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경계하는 빛을 띠며 로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랑케가 록스버그 공자가의 소유예요.”
진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시모네타군.”
순간 그의 입속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숨을 삼켰다. 다행히 놀란 기색을 밖으로 내비치진 않았지만,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그게 누군지 모르겠군요.”
“내 비밀을 너에게 전했다는 정보원 말이야. 아마 시모네타일 거야.”
의심의 여지도 없다는 듯 단호한 말투였다.
“그런가요? 하지만 저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 벤투스는 아는지 모르겠지만, 랑케는 원칙적으로 정보를 제공한 정보원에 대한 신원은 비밀에 붙이는 게 규칙이어서요.”
로엔은 랑케의 규율을 읽듯 진에게 시모네타와 제 사이의 접점을 차단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랑케의 주인인 그대가 정보원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건 의외군.”
“가끔 라이칸이 제 대신 일을 처리할 때가 있어요. 아마 최근에 들어온 정보원인 모양이에요.”
라이칸이란 말에 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라이칸과는 얼마나 됐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긴 했지만, 로엔으로서는 난처한 질문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오히려 반가웠다.
“라이칸은 러셀 백작가의 장남이었어요. 2년 전에 작위를 물려받아 백작이 되었고요. 그러니 러셀 백작가와 록스버그 공작가는 200년 동안 가신 관계였던 거죠.”
진이 낮게 욕설을 뱉어 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뭐, 상관없어. 오래됐든 아니든 상관없이 앞으론 내가 네 곁에 있을 테니까. 하지만 시모네타는 그냥 넘어갈 순 없겠어. 내 비밀을 알게 된 것도 모자라, 맹랑하게도 내게 계약을 제안하기까지 했거든. 아무리 랑케의 정보원이라고 해도 내 비밀을 발설한 이상, 그 대가를 치러야지.”
진의 말에 로엔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장갑 안에서 손이 차갑게 식어 있는 게 느껴졌다.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니.
“잠깐만요. 공작님께 대가를 치르기 이전에 시모네타는 랑케 소속의 정보원이에요. 아무리 공작님이라도 제 정보원을 죽이는 건 허락할 수 없을 것 같군요.”
허접한 핑계였다. 하지만 뭐든 해야 했다. 그가 시모네타를 찾아 대가를 치르게 하기 전에 그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조금 전엔 시모네타가 그대의 정보원인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허를 찌르는 질문에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급히 핑계를 대다 보니 실언을 한 모양이었다.
“맞아요. 하지만 랑케에서 전해 들은 내용과 공작님이 하신 말을 종합해 보니, 제게 공작가의 정보를 준 자가 시모네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진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로엔을 바라보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안해졌다. 로엔은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저에게 시간을 주셨으면 해요. 만약 공작님이 말한 시모네타라는 사람과 랑케의 정보원이 같은 사람이라고 밝혀진다면, 그때는 공작님이 뭘 하시든 상관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제가 상황을 파악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그리고 만에 하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시모네타라는 분도 억울할 것도 같고.”
로엔이 말끝을 늘리며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대 말처럼 만에 하나 아니라면 억울할 수도 있겠군. 비밀을 전하지도 않았는데 죽는다면 말이야. 그런데 내가 죽인다고 한 것 같진 않은데. 그저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라고 했지.”
“아, 그랬죠. 제가 잠시 착각을 한 모양이에요. 공작님의 이미지가 워낙…….”
“내가 너에겐 그런 이미지인가? 잘못을 저지르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자를 죽일 것 같은?”
진의 표정이 제법 심각했다. 치켜 올라간 눈썹이며, 굳게 다물린 입매까지.
로엔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는 맹수가 제 잔혹한 손톱을 털 속에 감추곤 얌전하게 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리 본성을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다는 걸 모른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아니요. 그것과는 조금 달라요. 두려운 존재란 생각은 하지만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
로엔의 대답에 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다행이군.”
“그리고 제 사람에겐 한없이 무르단 사실도 알죠. 그게 흔치 않은 일이라 문제지만.”
로엔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평가가 마음에 드는지 진이 고갤 끄덕였다.
“넌 어때?”
“네?”
“그 흔치 않는 일에 네가 속한다면…….”
“말도 안 돼요.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은 하지도 마세요.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
로엔은 순간 그가 뿜어내는 살벌한 분위기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대체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짐작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렇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나만 몰랐던 모양이군.”
진이 화가 난 얼굴로 로엔을 외면했다. 난처했다. 그를 달래야 할 것 같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기 잡히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계속됐다. 시간이 갈수록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버지야.”
긴 침묵 끝에 진이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로엔이 고갤 들자, 진이 무감한 눈빛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게 한 사람이, 내 아버지라고.”
“아, 그럼 황좌를 원했던 사람은 전 로이슈덴 공작님이셨군요.”
반은 맞지만, 반을 틀린 말이었다. 생각해 보면 로이슈덴 공작가가 유지되어 오는 동안 황좌를 욕심낸 자가 제 아버지만은 아닐 테니까.
무엇보다 드래건의 힘을 인간의 몸속에서 각성시키게 하는, 금기된 주술이 로이슈덴 공작가의 비밀서고에 들어 있는 걸 보면 제 짐작이 맞을 터였다.
“아버진 라딘의 숨겨진 예언에 심취해 있었지. 거기다 흑마술까지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집착이 광기로 변한 거야. 결국은 금기가 된 주술을 내게 걸어 반역자로 만들었고.”
“몇 살 때였는데요?”
“다섯 살이었어.”
“어렸네요. 진실을 판별하기 힘든 나이죠.”
그러니 진에겐 죄가 없었다. 하지만 죄와는 상관없이 진 로이슈덴은 반역자의 굴레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했다.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난 도망친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든. 그것도 최근에 널 보면서 깨달은 거야. 내가 겁쟁이라는 사실을.”
“나는…….”
로엔이 뭔가를 말하려다 그만뒀다. 조금만 더 말을 했다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서로의 영역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로엔은 무거운 분위기를 떨쳐 내기 위해 애써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내겐 내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괜찮을 수 있죠.”
“오늘 축제에 함께 왔던 사람들을 말하는 모양이군.”
“네.”
“다행이야. 믿을 만한 사람들이 있어 줘서.”
“공작님에게도 있잖아요. 믿을 만한 사람들이요.”
“맞아. 내게도 있지. 전쟁터가 내겐 지옥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제야 로엔 역시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은둔자의 숲에서 왜 만나자고 하셨어요? 이런 걸 물으려던 것이었다면 꼭 이곳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었을 텐데.”
로엔의 물음에 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리곤 아직까지 가면을 쓰고 있는 로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면을 벗기려는 듯 손을 뻗어 왔다.
“잠깐…….”
로엔이 피하려는 듯 고갤 돌렸다. 하지만 그의 손에 붙잡힌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진은 그녀의 가면을 벗길 생각이 없는 듯 상아로 된 가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