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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10화 (111/201)

110화

펑, 펑, 퍼펑!

축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어둡던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꽃처럼 피어났다. 진과 함께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걸어가던 로엔이 걸음을 멈추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축포가 터지는 모습을 홀린 듯 구경하던 로엔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처음이에요. 축포가 터질 때까지 축제에 남아 있었던 적은 없었는데.”

“나도 그래.”

진의 목소리에 로엔이 고갤 돌렸다. 나란히 서서 함께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이 상황이 낯설고도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진이 로엔의 시선을 느낀 듯 눈을 마주쳐 왔다.

“너와는 뭐든 처음 한 것투성이군.”

그래서 불만인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 혼자여서 편하고 안락하게 느끼던 진의 삶에 조금씩 균열이 일고 있었다.

이젠 혼자 있는 시간에도 누군가를 떠올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낯선 감각에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모처럼 전쟁도 끝났는데 수도사처럼 살 순 없잖아요. 오히려 저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처음인 순간마다 제가 함께해 주는 것이니까.”

으스대는 모습이 밉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웃게 만들었다.

“그렇게 되나?”

“네. 앞으로 더 많은 처음을 저와 함께하게 될 테니까요.”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지만, 로엔은 애써 가볍게 말했다.

“너와 많은 처음을 함께 한다라. 썩 괜찮을 것 같군.”

과연 괜찮은 것뿐일까? 오히려 기대가 된다. 그리고 제가 처음이듯 눈앞에 서 있는 로엔 역시 처음인지 궁금해졌다.

“너는?”

“네?”

“너도 나와 네 처음을 함께하는 게 맞느냐고 물었다.”

진의 대답에 로엔이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에메랄드빛 눈동자 역시 의미심장한 빛을 담고 반짝이고 있었다.

“아닌가?”

로엔의 침묵에 기분이 상했는지 진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참고 있던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어떨 것 같은데요?”

대답 대신 또다시 질문으로 응수하자, 이번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 네가 누굴 만나, 뭘 했는지.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하자면 지금부턴 안 돼. 너도 나만 봐. 나만 보고 웃고, 나만 보고 말해.”

그의 목소리에 로엔의 입가에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다.

이건 정말 범죄였다. 저렇게 잘생긴 얼굴을 하고, 여인의 심장을 폭행하는 말들을 무자비하게 내뱉다니.

지금껏 억누르고 있었지만, 어쩌면 타고난 바람둥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볼게요.”

로엔이 심장을 내리누르며 다시 불꽃놀이가 한창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조금 전보다 감흥이 덜했다. 대신 고갤 돌려 화를 삭이고 있을 그를 살펴보고 싶었다.

‘연인들의 밀당도 아니고.’

괜스레 귓불이 뜨거워졌다.

“허락 못 해. 난 욕심이 많은 자라, 네가 딴 놈을 보게 된다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모르다니…….”

“눈을 파 버리는 것으론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일이 일어나게 될 테니, 일을 벌일 생각이면 그 전에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거야.”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잔혹하게 빛났다. 진심인 모양이다.

화를 내거나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게 맞는데, 미친 것인지 심장이 뛴다.

등줄기에 나른한 열기가 흘러내리자 로엔은 마른침을 삼키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웃기지 말아요. 누가 그렇게 하게 둔대요? 정말 어이가 없어서는.”

로엔이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그를 툭 쳤다. 그리곤 그를 지나쳐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뒤쫓아 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자꾸만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려 했다.

그러다 줄지어 늘어선 자판 옆에 쭈그려 앉은 늙은 노파를 발견하곤 고갤 갸웃했다. 화려한 축제의 분위기와는 너무도 다른, 굉장히 이질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점을 보시나요?”

로엔은 노파 앞에 놓인 수정구를 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노파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제야 노파의 눈동자가 불투명한 막을 씌운 듯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래를 점치지. 아가씬 가면을 썼군.”

로엔이 상아로 만든 제 가면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순간, 눈이 보이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뒤에 있는 남잔 누구지? 아가씨 남편인가?”

노파의 불투명한 눈동자는 로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함께 온 진의 기색을 눈치채다니. 영 가짜는 아닌 모양이었다.

“비슷해요.”

“지독한 걸 삼켰군. 그걸로 모든 게 시작됐고.”

노파의 목소리에 로엔과 진의 표정이 가면 아래서 살짝 굳어졌다. 그냥 떠돌이 점술사로 치부해 버리기엔 노파의 말속에 담긴 뼈가 너무도 의심심장해서다.

그리고 로엔이 쓰고 있다던 가면 역시도, 지금 쓰고 있는 상아 가면이 아니라 어쩌면 얼굴에 붙인 인피면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을 봐 줄까?”

“그 값으로 얼마를 드려야 하는데요? 너무 비싸면 볼 수가 없어서요. 저흰 가난한 연인들이라.”

로엔의 말에 노파가 인상을 썼다. 그렇지 않아도 주름져 있는 얼굴에 더 깊은 주름이 만들어지더니, 작게 한숨을 내쉰다.

“날 의심하는 모양인데, 상관은 없다우. 하지만 영민한 아가씨이니 알 텐데?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노파는 로엔이 저를 떠보기 위해 한 말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뭐, 이것도 인연이니 한 마디 하자면 낮이 밤이 되고, 하늘 위에 붉게 빛나는 반지가 떠오르는 시기. 그때를 조심하는 게 좋아. 가장 믿는 자에게 배신을 당할 운명이거든.”

낮이 밤이 되는 건, 일식이었다. 그리고 로엔이 태어나던 날 하늘에 떠오른 반지는 금환월식의 모습이었고.

‘혹시 록스버그의 저주에 대해 아는 건가?’

로엔이 천천히 숨을 고르며 뭔가를 물으려는 순간, 진이 로엔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노파가 안고 있는 구술 옆으로 던졌다.

“그만 갈까?”

“그게…….”

“더 물어볼 게 있나?”

진이 노파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제야 로엔은 이곳이 축제가 한창인 유리엘라 광장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하마터면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노파에게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에 대해 아는 것이 있냐고 물을 뻔했다.

“아니요. 없어요.”

로엔이 고갤 가로저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아 바로 그 자릴 떠나지 못했다.

“어디서 왔지? 못 보던 얼굴이라.”

“게르피온에서 왔지. 별을 따라서. 아마 우린 또 보게 될 거야. 하늘의 질서가 어그러지고 있거든. 곧 여신의 파수꾼이 눈을 뜨게 될 거야. 그럼, 그땐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노파가 고갤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축포가 터지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노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까지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마지막까지 의미 모를 말을 주절거린 노파는 붙잡을 새도 없이 구슬을 들고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묻고 싶었던 게 더 있었나 보군.”

“그냥, 재미있는 말을 해서요.”

로엔은 노파가 사라진 쪽을 응시했다. 이젠 노파의 흔적은 찾을 수도 없을 만큼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늘의 질서는 뭐고, 여신의 파수꾼이 눈을 뜬다니?’

로엔은 노파기 한꺼번에 뱉어 냈던 말들을 곱씹었다. 그리고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란 의미심장했던 말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심장을 옥죄었다.

금환일식이 있는 날에 가장 믿었던 존재에게 배신을 당한다니. 진만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노파를 쫓아가 되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곧 자정이군.”

자정?

상념에서 벗어난 로엔이 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인 건가?’

로엔은 진과 헤어져 집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아쉬웠다. 그리고 이제 곧 세실이 말한 연인들만을 위한 가면 축제가 있을 터였다.

“그만 가지.”

진의 단호한 말투에 더 있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로엔은 하는 수 없이 진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축제가 끝날 시간이었다.

놀랍게도 유리엘라 광장에서 벗어나 말을 타고 도착한 곳은 은둔자의 숲이었다.

그가 자정이라고 했던 의미가, 바로 약속을 지킬 때라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실망으로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내 손을 잡아.”

말에서 먼저 내린 진이 로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문득 캠벨 후작가의 콘티아나 숲에서 에드워드가 제게 손을 내밀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땐 생각할 필요도 없이 거절했지만, 이번엔 제게 내밀어진 그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로엔의 발이 땅에 닿은 후에도 진은 아쉬운 듯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은둔자의 숲엔 자주 오시나요?”

그의 손길과 눈빛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로엔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머릿속으로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밀어낼 생각으로 가득했다.

“최근에 자주 왔지. 전쟁터에 있을 땐 오지 못했거든.”

로엔이 고갤 끄덕이며 그의 손을 놓고는 어둠에 묻혀 있는 은둔자의 숲을 둘러보는 척했다.

“그렇겠네요. 그럼 전쟁터에 있을 땐 어떻게 하셨는데요? 드래건의 비늘이 자라날 때마다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텐데.”

로엔의 질문에 진이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그러자 달빛 아래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고통은 견딜 만했어. 어차피 전쟁터에서 적과 싸우다 보면 상처가 생기는 건 다반사였으니까. 오히려 전쟁이 끝나서가 문제지.”

“그게 무슨 뜻이죠?”

“드래건의 힘은 피를 원해. 그러니까 전쟁터는 드래건에게 딱 맞는 장소였던 거지. 다행히 그곳에서 힘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긴 했지만, 가끔씩 이성이 마비될 만큼 충동이 몰려올 때가 있어.”

진의 말에 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과는 달리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어 제 표정을 그가 볼 수는 없는데도, 제 감정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눈을 마주쳐 왔다.

“걱정 마. 대부분은 억누를 수 있으니까. 그리고 공작새의 눈물도 있고.”

진의 시선이 로엔의 입술에 들러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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