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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09화 (110/201)

109화

“헙―.”

너무 놀란 나머지 로엔의 입술 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당황한 얼굴로 대체 왜 이러냐는 듯 휙 하고 고갤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도망치지 마.”

불쾌한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정곡이 찔리자, 로엔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작게 속삭였다.

“제가 언제 도망치려 했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로엔의 대답에 진의 입매가 삐딱하게 말려 올라갔다. 속일 생각 하지 말라는 경고처럼 보였다.

“그럼 너는 네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이 나타났는데도, 순순히 놓아주는 성격이었나 보군.”

진이 로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시비조로 말했다.

순간 로엔 역시 발끈했다. 제 딴엔 아름다운 여인이 유혹하니 즐길 기회를 주려는 것뿐이었다.

무엇보다 진 역시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흥미가 있는지 집시 무희가 춤을 추는 동안 시선을 떼지 않고 쳐다보기까지 했으니까.

그랬는데, 도망치지 말라니. 대체 누가 할 소릴 하는 건지.

“전혀요. 만약 누군가 내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몇 배로 갚아 주죠.”

로엔이 그를 쏘아보며 불쾌한 듯 대답했다. 그러자 지금껏 서늘하던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럼 왜 지금은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군.”

“무슨 말이죠?”

“지금 저 여자가 네 것인 날 빼앗으려 하잖아. 그런데 넌 몇 배로 갚아 주는 대신 비켜 주기나 하고.”

진의 목소리에 연주 중이던 루트의 선율이 멈췄다. 집시 무희 역시 움직임을 멈추고 두 사람을 응시했다.

비단 집시 무희뿐이 아니었다. 공연을 보던 사람들 역시 로엔과 진을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또 망했다.

오늘은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검술 시합장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오늘은 망신살이 호되게 붙은 날인 모양이다.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 사람들이 봐요.”

로엔이 진만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속삭였다.

하지만 진은 그만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로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집시 무희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진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마치 진의 말처럼 그를 빼앗기라도 하려는 듯 진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의 어깨를 쓸어내리는 집시 무희의 새하얀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곤 유혹하듯 들려온 달콤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원치 않으시면 제가 갖고 싶군요. 그래도 될까요?”

집시 무희의 도발에 로엔의 시선이 여인에게 향했다. 진은 제 어깨에 떡하니 올려져 있는 집시 무희의 손을 떼어 낼 생각조차 없는지 로엔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선택을 하라는 뜻이었다.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로엔은 지금까지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진의 어깨에 놓여 있는 무희의 손을 떼어 냈다.

“당장 그 손 좀 치워줬으면 좋겠군요. 손가락이 부러지고 싶지 않다면요.”

집시 무희에게 경고를 한 뒤 손을 뻗어 진의 턱을 붙잡곤 저를 보게 했다.

“그 눈으로 다른 여잔 쳐다보지 말아요. 웃지도 말고, 말도 건네지 말아요. 한 번만 더 다른 사람을 쳐다보면, 아예 아무도 보지 못하게 눈을 파 버릴 테니까.”

달콤 살벌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진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게 떠올랐다.

“무섭군. 이제부터 멀쩡한 상태의 눈으로 생활하려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겠어? 네가 말해 주면 다 할 테니까.”

로엔의 경고는 조금 전 먹은 설탕시럽이 잔뜩 묻은 과일보다 더 달콤했다. 그땐 입만 녹아내릴 것 같았다면, 지금은 심장까지도 같이 녹아 없어질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당연히 지금부터 나만 봐요. 나한테만 웃고, 나한테만 말해요.”

그의 도발에 넘어가 막상 뱉어 놓고 나니 이건 경고가 아니라 열렬한 고백처럼 들렸다. 사랑하는 연인이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주자, 질투에 눈이 멀어 화를 내며 매달리는 것처럼.

순간 제 행동을 깨닫자 귓불이 붉어졌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좋아. 약속해. 그렇지 않아도 재미도 없는 춤을 구경하느라 지루해 죽는 줄 알았거든.”

진이 느른하게 웃으며 눈앞에 서 있는 집시 무희에게 시선을 줬다. 이제 제 연인이 제게 마음이 있음을 확인했으니, 더는 필요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연인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집시 무희를 이용이라도 한 것처럼.

‘설마? 그릴 리가…….’

로엔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얼른 부정했다. 하지만 진이 내뱉은 다음 말에 설마가 진짜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는 필요 없으니 빠져 주겠어? 내 연인이 싫다는군.”

방해꾼을 쫓아내듯 진의 목소리엔 서늘함이 묻어 있었다. 졸지에 이용당한 꼴이 된 집시 무희는 화를 내며 불쾌해하는 대신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물러나 주죠. 대신 약속한 금화는 주셔야죠.”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로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진이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집시 무희에게 건넸다.

“충분한가?”

“넘치죠. 연인들을 위한 일인데.”

금화를 받아 든 집시 무희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뒤, 다시 무대로 돌아갔다.

“그게 무슨 말이죠? 금화는 또 뭐고요.”

“나도 몰라. 눈이 마주치고 눈짓을 하기에 난 그냥 고갤 끄덕였을 뿐인데, 이렇게 돼 있었으니까. 아마 공연의 일부였던 게 아닐까? 연인들을 위한 이벤트 같은.”

진이 여상하게 대답했다.

로엔은 진이 집시 무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사이 두 사람 간에 이런 계획이 오간 모양이었다.

무대에 선 집시 무희가 루트 연주자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끈적끈적하던 선율이 달콤한 음률로 바뀌었다.

“조금 전 보셨겠지만 제가 실연을 당했답니다. 가슴 아프게요.”

집시 무희가 매우 슬프다는 듯 심장을 움켜쥐며 연극조로 말했다. 그러자 지금껏 세 사람을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관객들이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뜨리는 게 보였다.

집시 무희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걸 다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를 헌신짝처럼 버린 분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해도 될까요?”

여인의 제안에 진이 아니라 지금껏 그들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더 신이 나서 먼저 대답하고 나섰다.

“당연히 들어줘야지. 사랑싸움에 죄 없이 휘말렸잖아.”

기다렸던 대답인 듯 집시 무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리곤 진과 로엔을 향해 말했다.

“그럼, 두 분 여기서 키스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잘생긴 기사님을 깨끗하게 단념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집시 무희의 말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당장, 키스해!’를 연호하며 분위기를 한껏 데웠다.

그제야 로엔은 집시 무희가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음을 눈치챘다. 진의 말처럼 이것 역시 공연의 일환이었던 모양이다.

당황한 로엔이 진의 옆구리를 찌르며, 빨리 수습 좀 해 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어떻게 좀 해 봐요.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공작님이 벌이신 일이잖아요.”

하지만 당황한 로엔과는 달리 진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뭘 어쩌겠어? 나도 방법이 없는데.”

진 역시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이렇게까지 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아니, 방법이 없다고만 하지 말고…….”

“그럼 내가 하는 대로 할 건가? 그게 뭐든?”

사람들 앞에서 키스하는 것만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로엔이 고갤 끄덕이며 재빨리 그게 뭔지 물었다.

“그게 뭔데요? 차라리 도망갈까요?”

“아니,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야.”

“좋아요. 빨리 말해 봐요. 이러다 진짜로 키…… 읏!”

제 턱을 붙잡은 진의 손에 놀라 말을 멈췄다. 그리곤 저를 내려다보는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설마, 집시 무희의 말처럼 여기서 하려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진이 고갤 숙여 왔다.

‘어쩌지? 피할까?’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제 시선은 가면 밖으로 보이는 진의 입술에 못 박혀 있었다.

입으로 싫다고 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그와의 키스 생각뿐이었다.

“금방 끝나.”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너무도 달콤해 긴장으로 굳어졌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그리곤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멍하니 응시했다.

정말 미친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키스라니.

당장 그를 밀어내야 했다. 하지만 입술을 겹칠 것처럼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그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끝이 야릇하게 곱아 들었다.

심장 부근이 자꾸만 뜨거워져 숨을 쉬는 게 버거웠다.

그의 입술이 바로 앞에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로엔은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더니 진이 낮게 속삭였다.

“타라의 연을 하고 왔군.”

순간 그의 말에 놀라 로엔이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저택을 나오기 직전 세실의 성화에 못 이겨 타라의 연을 팔에 차고 나왔던 게 생각났다.

“생각이 바뀌었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장난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걸리더니 낮게 속삭였다.

“네 말대로 도망가는 게 좋겠어. 달려. 잡히기 전에.”

달리라는 그의 말이 주술이 된 듯 그의 손에 이끌려 공연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당황해 머뭇거리던 발걸음이, 시간이 지나자 그의 속도에 맞춰 빠르게 움직였다.

“주인님!”

멀리서 세실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어왔다. 살짝 뒤를 돌아보니 당황한 라이칸이 저를 따라오려는 듯 걸음을 옮기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내 세이지에 의해 제지당했고,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서둘러. 따라잡히기 전에.”

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들떠 있었다. 로엔 역시 그의 감정이 전염된 듯 흥분되기 시작했다. 일행을 따돌리고 도망치는 동안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남자와 도망이라니.

축제의 흥겨움과 특유의 자유로움이 로엔에게 평소와 다른 용기를 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도망치는 연인처럼, 군중 속으로 섞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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