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주인님, 비둘기가 모자에서 나왔어요.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까요?”
흥분으로 가득 찬 세실의 목소리에 로엔이 정신을 차렸다. 고갤 들자, 마술사가 모자에서 꺼낸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있었다.
“어, 그러게 대체 어디에 있다 나타는 건지 나도 궁금하네. 하하.”
세실의 말에 호응하긴 했지만, 열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로엔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제 반응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바로 눈치챘을 터였다.
다행인 건 제 흥에 겨워 그 사실을 세실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세실은 마술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즐거운 듯 속삭였다.
“그런데 마술보다, 마술사가 너무 잘생기지 않았어요? 요즘 칼라일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꽃미남이잖아요.”
“뭐야? 칼라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건 우리 대장 아니었어?”
세이지가 불쑥 끼어들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로엔 역시 고갤 돌려 진을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그는 전혀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그때, 세실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후까진 그랬죠. 하지만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 되셨잖아요. 그러니 이젠 선호도가 확 떨어졌거든요.”
“아아, 그랬지? 우리 대장은 이제 주인이 있었지?”
세이지가 그제야 납득이 된다는 듯 진과 로엔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에 닿았다.
“뭐야, 두 사람? 엉큼하게 손 도 잡고 있었어?”
당황한 로엔이 슬쩍 그의 손을 놓았다. 그리곤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피하며 목덜미를 쓸었다.
“제발 그 입 좀 닥쳐.”
경고인 건 분명한데, 진의 목소리엔 냉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방해받아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다.
‘왜 이리 덥지?’
진의 뻔뻔한 반응에 난처한 건 로엔뿐인 것 같았다.
세이지가 알 만하다는 듯 음흉한 눈빛으로 진을 보았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딱 우리 대장을 두고 한 말이었네. 전쟁터에 있을 때 여자한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니까.”
“세이지.”
경고하듯 부르는 진의 목소리에 세이지가 알았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마술 공연이 끝나자 일행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자연스럽게 집시들의 공연장을 향해 움직였다.
“이리 와.”
진이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게 로엔의 팔을 붙잡곤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아요. 혼자가도 충분해요.”
간질간질한 그의 태도가 민망해져 로엔이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곤 세실의 팔에 팔짱을 끼곤 앞으로 걸어갔다.
세실이 제 팔을 잡은 로엔과 뒤따라오는 진을 번갈아 보며 연신 웃음을 삼키는 게 보였지만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걷고 있음에도 제 등에 따라붙는 진의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져서다.
가면을 쓰고 있었기 망정이지, 얼굴이 붉어진 걸 사람들에게 다 내보일 뻔했다.
“벌써 시작했나 봐요. 잠깐만 여기 계세요. 자리 좀 맡고 올게요.”
세실이 톰과 함께 사람들이 있는 쪽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가 딱히 정해지지 않는 노천공연이었기 때문에 구경꾼들은 이미 집시 무희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원을 만들어 관람 중이었다.
기다리라고 했지만 이러다간 세실을 놓칠 것 같아 그녀를 따라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던 로엔은 커다란 덩치의 사내에게 밀려 휘청거렸다.
“조심해.”
진이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아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두근.
등에 닿는 단단한 느낌과 함께 청량한 체향이 훅 끼쳐 들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 때문인지, 로엔은 그가 지나치게 의식이 됐다.
“고마워요. 이제 괜찮아요.”
로엔이 진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그리고 우린 저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 일행을 따라가기엔 너무 늦은 것 같거든.”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하지만 기다릴 텐데.”
“괜찮아. 그들도 사람들 때문에 그쪽으로 못 가는 걸 알 테니까.”
진이 순식간에 몰려든 사람들을 가리켰다. 로엔 역시 이젠 사람들 틈에 섞여 잘 보이지 않는 세실을 눈으로 좇으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공연히 끝나면 만날 수 있어.”
그의 말에 고민은 끝이 났다. 함께 구경하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세실도 이해할 것 같았다.
로엔은 진과 함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쪽에 자릴 잡았다.
무대의 정면이 아닌 옆쪽이라 아름다운 집시의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공연을 보는 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로엔은 공연을 보며 진을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암살의 위협을 받아 온 터라 사람이 많은 것보단 공연의 질은 떨어지더라도 사람이 없는 게 마음이 편했다.
두 사람만 외떨어진 상황이라 공연을 보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뭔가 말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축제는 처음인가요?”
“내내 전쟁터에 있었으니까. 너는?”
“저도 자주 구경하진 못했어요. 최근 들어서 두 번 정도?”
그것도 마음 편하게 축제를 즐긴 건 아니었다. 세실의 성화에 못 이겨 함께 나오긴 했지만 분위기상 잠깐 어울리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언제나 그렇듯 암살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서였다.
그러니 오늘처럼 여러 사람들과 축제를 즐긴 건, 로엔에게도 처음이라고 해야 했다.
“앞으론 자주 와야겠군. 생각보다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의외의 대답에 로엔이 고갤 돌려 진의 표정을 살폈다. 얼굴의 반을 가린 가면 때문인지, 그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가며 턱 근육이 느른하게 풀려 있는 걸 보니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재미있다니 다행이네요.”
로엔이 공연을 보기 위해 다시 앞으로 고갤 돌렸다. 조금 전까지 루트를 연주하던 집시가 루트를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건네곤,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딸랑, 딸랑. 손과 발목에 달아 놓은 방울이 화려한 축제의 밤을 울렸다. 이내 루트를 건네받은 남자가 연주를 시작했고, 그 선율에 맞춰 집시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얼굴에 쓴 붉은색의 베일과 몸에 맞게 재단된 투명한 붉은 천이 집시 무희의 움직임에 맞춰 일렁였다.
유리엘라 광장에 설치된 수십 개의 화려한 등불이 공연을 하는 집시 무희를 밝혔다.
루트의 끈적끈적한 선율 때문인지, 아니면 집시 무희의 매혹적인 움직임 때문인지 사람들은 홀린 듯 집시의 공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청명한 방울 소리가 격렬해질수록 집시 무희의 몸짓은 선정적으로 바뀌었다. 붉은 천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가느다란 발목이 묘한 색기를 품고 밤의 열기를 한껏 달아오르게 했다.
로엔 역시도 집시 무희의 선정적인 움직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랑케에서 페이라스모스들과 공연한 적도 있기 때문에 남자를 유혹하는 춤을 보고 순진한 레이디들처럼 반응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뒤에 서 있는 진의 시선이 의식이 되어서인지 자꾸만 목덜미가 홧홧했다. 그가 만들어 내는 성적 긴장감에 심장이 간질거린다.
밤을 울리는 청량한 방울 소리가 또다시 귓가를 울렸다.
그때, 허리를 유혹적으로 흔들며 나른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훑던 집시 무희의 시선이 진에게 닿는 게 보였다.
눈꼬리가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 집시 무희가 진을 발견하곤 나른한 미소를 짓자, 보는 이들이 숨을 삼키는 게 들려왔다. 그 정도로 등불 아래 요요한 미소를 짓고 서 있는 집시 무희의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특히 붉은 베일로 얼굴의 반을 가려서인지, 뭔가 굉장히 은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뜨겁고 은밀한 연인들의 밤.’
집시 무희가 뿜어내는 농밀한 색기는 그것을 약속하는 듯 보였다.
로엔은 집시 무희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진의 얼굴을 시작으로 탄탄한 몸을 핥듯이 훑어 내리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불쾌감이 울컥 차올랐다.
딸랑, 딸랑. 방울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다가오는 집시 무희의 눈빛에는 끈적끈적한 유혹의 빛이 담겨 있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성적인 분위기에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달콤한 치자꽃 향이 났다. 집시 무희에게서 나는 향인 듯했다.
집시 무희가 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애절한 루트의 선율에 맞춰 춤을 췄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여인의 몸짓에선 지독한 욕망이 읽혔다. 흔들리는 붉은 베일 사이로 붉게 칠한 입술이 유혹하듯 드러났다 사라졌다.
사내를 유혹하는 법을 아는, 욕망을 부추겨 감질나게 하는 여인의 몸짓이었다.
로엔은 집시 무희의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변하기 시작하자, 진과 닿아 있던 몸을 슬쩍 뗐다. 그리곤 거리를 두기 위해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왜?”
로엔의 움직임에 진이 그녀의 팔을 붙들며 이유를 물었다. 슬쩍 보니 집시 무희의 시선이 제게 닿는 게 느껴졌다.
“그냥, 조금 떨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왜?”
눈치도 없는지 진은 목소리까지 굳히곤 다시 이유를 묻는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걸까?
지금 저를 유혹하기 위해 여인이 춤을 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지금, 로엔은 두 사람에게 방해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를 위해 친절하게 자리까지 피해 준다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로엔이 제발 눈치 좀 챙기라는 듯이 집시 무희 쪽을 흘끗 보았다. 그리곤 다시 떨어지려 하자, 이번엔 진의 팔이 로엔의 허릴 단단히 감아올리더니 힘껏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