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서대륙에서 왔다는 기예단은 매년 건국제마다 오던 기예단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아직 공연 준비가 되지 않은 탓에 로엔 일행은 근처에서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축제 분위기는 정복 전쟁이 끝난 뒤에 열리기 때문인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화려했다.
특히 이번 축제엔 정복 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황제가 황실 금고를 열었고, 축제 동안 먹고 마실 수 있는 것들이 무료로 제공되고 있었다.
게다가 아드리안 제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말레 상단 역시 건국제를 맞아 지금껏 창고에 쌓아 놓았던 질 좋은 술과 가면들을 무료로 제공 중이었다.
그래서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말레 상단이 제공한 가면을 쓰고 건국제를 즐겼고, 그 덕분에 로엔 역시도 얼굴을 숨길 필요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주인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이것이 동대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간식이래요.”
세실이 갖가지 과일에 설탕시럽을 입혀 만든 간식을 로엔에게 건넸다.
“고마워.”
로엔은 나무로 만든 막대에 설탕시럽이 묻은 과일을 여러 개 꽂아 만든 간식을 내려다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혀가 녹을 것 같았다.
로엔이 기대감을 품고 과일 하나를 베어 물자, 향긋한 과일 향과 함께 달짝지근한 설탕시럽이 입안에서 녹아 없어졌다. 예상대로 달콤한 맛이었다.
“어때요? 맛있나요?”
“너도 먹어 봐. 굉장히 맛있어. 혀가 녹을 것 같아.”
혀가 녹는다는 말에 세실은 먹기 전부터 침을 삼켰다. 그리곤 가장 커다란 과일을 입 안 가득 베어 물었다.
“세사에, 어무 마이어요.”
세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달콤한 맛에 흠뻑 빠진 표정을 지었다.
“다 먹고 말해. 라이칸, 너도 먹어 봐.”
로엔이 제가 먹던 설탕 과일을 라이칸에게 내밀었다.
“아닙니다. 전 단 건 별로라서.”
“라이칸 님, 후회하지 말고 하나만 드셔 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세실이 톰에게 설탕 과일을 건네며, 라이칸에게도 어서 먹어 보라고 권했다. 단 음식은 질색하는 라이칸이 망설이듯 로엔이 내민 간식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진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먹고 싶지 않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권할 필욘 없지. 이리 줘, 내가 먹을 테니까.”
그와 동시에 말없이 서 있던 진이 손을 내밀어 로엔의 손에 들려 있는 간식을 빼앗듯 가져갔다. 그리곤 말릴 새도 없이 다디단 과일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안에 모두 밀어 넣었다.
“윽.”
과일을 입에 문 진이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씹어야 하는데, 씹는 것도 잊은 듯 꾹 다물어진 그의 입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표정만으로 괴로워하는 게 여실이 보였다.
“괜찮아, 대장? 대장도 단 건 질색하잖아.”
세이지가 걱정스러운 듯 진을 보았다.
“어떡해요. 혀가 녹을 정도로 엄청 단맛인데. 그러지 말고 뱉으시는 게 어떨까요?”
세실이 씹지도, 그렇다고 뱉지도 못하고 있는 진에게 나름의 해결책을 건넸다.
그런데 가만 보니, 가면 아래 드러난 세실의 턱이 자꾸만 씰룩인다. 웃음 참고 있는 눈치였다. 이 상황이 너무도 웃겼지만, 진 앞에서 웃을 순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 뱉는 게 좋겠어. 그런데 갑자기 왜 먹은 거야? 평소엔 간식거린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세이지의 타박에 순간 묘한 정적이 흘렀다. 다들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들 의아했던 것이다.
“호들갑 떨지 마. 충분히 먹을 만하니까.”
뱉어 놓은 말이 있어서인지 진이 입안의 설탕 과일을 짓씹기 시작했다. 세이지는 그런 진을 보며 자꾸만 입가를 씰룩 댔다. 그 역시 세실처럼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엔은 제게 향하는 세실과 세이지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여기. 이걸 마시면 단 맛이 사라질 거예요.”
로엔이 옆에 있는 냉차를 진에게 건넸다. 냉차를 받아 든 진은 서둘러 입안에 남은 과일과 함께 꿀꺽꿀꺽 삼켰다. 냉차를 마시는 동안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 정도로 단맛이 싫었으면서 왜 굳이 빼앗아 가며 먹었는지 의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에 로엔의 얼굴이 붉어졌다.
‘혹시 라이칸이 내가 먹던 걸 먹는 게 싫었던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세이지의 말처럼 지독히도 싫어하는 단맛 나는 음식을 억지로 먹을 이유가 없었다.
“고맙군.”
냉차를 단숨에 비워 낸 진이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아직 단맛이 사라지지 않는지 괴로운 듯 보였다.
로엔은 그의 행동에 짐작되는 바는 있었지만, 굳이 아는 척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쏟아 내는 행동과 감정의 이유를 찾다 보면, 자꾸만 그녀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결론에 도달해 버릴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어머, 이제 공연히 시작되려나 봐요. 얼른 가요. 이러다 좋은 자릴 놓치겠어요.”
때마침 공연이 시작되려는지 사람들이 공연장으로 모여드는 게 보였다. 세실이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톰의 손을 잡고 먼저 움직였다.
“라이칸, 우리도 그만 가…… 엇?”
로엔이 라이칸과 함께 가려는 순간, 진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넌 나와 함께 움직이면 돼.”
진이 당연하다는 듯 로엔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가면 너머로 라이칸을 응시했다. 순간 세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괜스레 두 남자 사이에 낀 것 같아 민망해진 로엔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키려 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제 팔을 끌어당긴 진의 행동에 노골적인 질투심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특히 더했다.
“그래, 당연히 대장하고 가야지. 두 사람은 죽고 못 사는 연인이잖아. 사람들 앞에서 낯 뜨겁게 구애까지…… 헙!”
“입 닥쳐, 세이지.”
진은 옆구리를 움켜 쥔 세이지를 지나쳐, 로엔과 함께 공연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왜 자꾸 때리는지 모르겠다니까. 평소엔 내 실없는 농담에도 꿈쩍도 않던 사람인데.”
세이지가 뒤따라오며 계속 구시렁거렸다. 그러다 옆에 서 있는 라이칸을 보고는 그의 팔을 치며 말했다.
“자꾸 대장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우리 대장은 자기 것에 손대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거든. 난 미리 경고했다.”
라이칸은 앞서 걸어가는 세이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진과 함께 걸어가는 로엔에게 시선을 옮겼다.
세이지의 경고가 아니라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검술 시합장에서도, 그리고 조금 전 로엔이 건네던 간식을 빼앗아 갈 때도 그의 눈빛에는 명백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라이칸은 어렴풋이 진 로이슈덴이 두 사람의 결혼을 1년으로 끝낼 생각이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만에 하나 진 로이슈덴이 이번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면…….’
라이칸은 재빨리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절대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서커스 공연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공중그네를 탄 아름다운 여인이 보호 장비도 없이 나비처럼 하늘을 날아올랐을 땐, ‘어떡해!’를 외치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숨을 죽여야 했다.
다행히 함께 공중그네를 타던 곡예사가 아슬아슬하게 여인의 손을 붙잡았고, 그제야 공연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랐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로엔 역시도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환상적인 공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서웠던 모양이지?”
지척에서 들려온 진의 목소리에 놀라 로엔이 고갤 휙 돌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선 진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거지?’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기기 위해 평소보다 더 차갑게 말했다.
“제가 아니라 공작님이 무서우셨던 것 아닌가요?”
무서워 거릴 좁힌 게 진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자신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확신에서 나온 물음이기도 했다.
순간 진이 어이없는 듯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누가 다가온 건지 직접 확인하라는 듯 턱으로 세실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갤 돌리던 로엔은 세실과 저와의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보곤 깜짝 놀랐다.
분명 공연을 보기 전에 세실 옆에 바짝 붙어 서 있었는데, 지금은 진의 옆으로 옮겨 와 있었던 것이다.
“누가 겁을 먹은 건지 이제 알겠지?”
그리곤 진이 그의 손을 들어 보였다. 믿기지 않게도 그의 옷자락을 붙든 제 손이 보였다.
아니, 대체 언제 그의 옷자락까지 붙잡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에 없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랬나 봐요.”
로엔은 그의 옷자락을 놓으며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정말 민망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다.
“옷보단 손이 좋아.”
진이 떨어져 나가는 로엔의 손을 붙잡더니, 태연히 제 손에 움켜쥔다.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이지?’ 하는 생각에 로엔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로엔의 따가운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공연을 보는 데 집중해 있었다.
그의 태도로만 보면, 순전히 겁먹은 저를 돕는 모양새였다. 상대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데, 저만 너무 예민하게 군 것 같아 멋쩍어졌다.
로엔은 손을 빼며 호들갑을 떠는 대신, 그의 손을 붙잡은 채로 공연을 관람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흥미를 잃은 듯 제 손을 쥐고 있는 그의 손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서늘한 성격만큼 손도 차가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 손을 감싸 쥔 커다란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의외였다. 생각해 보면 진 로이슈덴은 은둔자의 숲에서 처음 만난 이후 시간이 갈수록 그 첫 인상을 새롭게 갱신 중이었다.
냉정하고 무심한 것은 그의 천성인 듯했지만, 최근에 그가 보인 모습은 그의 타고난 성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낯설었고, 또…….
‘혼란스러운 건가? 아니면 설레고 있나?’
그가 저에게만 특별하게 구는 것 같아서,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