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아무리 생각해도 돌려주는 게 맞았다. 아드리안 제국에서 타라의 연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반려에게 주는 특별한 증표였다. 1년간 계약 결혼을 할 제게 함부로 줄 물건이 아니었다.
“그럼 주인님은요? 주인님 건 공작님에게 주실 거죠?”
“아니. 그리고 받고 싶어 하지도 않을 거야.”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공작님이 주인님에게 타라의 연을 달라고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는데.”
“그건…….”
“또 이러신다, 우리 주인님.”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난 그냥…….”
“평소대로 철벽을 치시는 거잖아요. 혹시 그것 아세요? 주인님은 항상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철벽부터 치며 밀어내시잖아요. 라이칸 님한테도 그랬고, 저한테도 그러셨어요.”
세실의 지적에 로엔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랑케의 벤투스 님이나 에스테 님. 그리고 그레이트 모먼트의 파엘라 님에게도 그러셨고요.”
“그건 이유가…….”
“당연히 알죠. 주인님은 우리가 주인님 때문에 위험해질까 봐 곁에 두고 싶지 않은 거잖아요.”
“잘 알겠지만, 내 곁에 있으면 누구든 위험해져. 그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라 통제할 수도 없어.”
로엔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지금껏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도 항상 제 영역 밖으로 밀어내기만 한 것이다.
“언제나 현명하고 똑똑하신 주인님이지만, 주인님이 한 가지 모르는 일이 있어요. 우리는 주인님이 아니더라도 매 순간 위험해요. 오히려 주인님 때문에 이나마 안전하게 살고 있는 거죠. 파엘라 님을 보세요. 5년 전에 파엘라 님이 주인님을 찾아왔을 땐, 파산 직전이셨잖아요. 주인님이 도와주지 않으셨으면 거리에서 폐인으로 죽었을 거예요.”
평소 가볍고 장난스럽던 세실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모습에 더는 겁쟁이처럼 굴 수는 없었다.
“세실, 넌 무섭지 않아? 내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내 피 속에 있는 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 라이칸처럼 말이야.”
“하지만 라이칸 님은 죽지 않으셨죠. 주인님이 라이칸 님을 살리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잠도 주무시지 않고 치료에 매달리셨기 때문이고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지. 하지만 매번 내가 살릴 수는 없어.”
“알아요. 매번 운이 좋을 순 없다는 것쯤. 하지만 주인님은 언제나 최선을 다하실 거잖아요. 제가 죽지 않도록요.”
“맞아,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로엔의 단호한 대답에 세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전 괜찮아요. 주인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 테니까.”
막말로 제 집안의 하인이 죽는다고 애가 닳아 안타까워할 귀족이 어디 있을까?
신분제가 있는 아드리안 제국에서 하층민의 목숨은 깃털만큼 가벼웠다.
하지만 제 주인은 아니었다. 괴물 공작이라 불리는 로엔 록스버그는 절대 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것으로 충분한 보상을 이미 받은 것이다.
“세실, 넌 바보야. 나에게 도망칠 기회를 여러 번 주었는데도 놓쳤잖아.”
“놓친 게 아니라, 가지 않은 거예요. 저희들 모두.”
세실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제 주인을 보았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하던 아름다운 얼굴엔 화상 자국을 본떠 만든 인피면구가 가면처럼 씌워져 있었다.
일렁이는 등불 아래 서 있는 모습은 사람들이 말하는 괴물 공작의 모습이었다.
‘제발 주인님 앞에 누군가 나타나기를. 소문과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온전히 주인님을 마음에 담을 분이 나타나 록스버그의 저주를 풀어 주기를.’
세실은 이젠 습관이 된 기도를 주술처럼 읊조렸다.
“세실, 앞으로 기회는 없을 거야. 이제는 내가 너희들을 놓을 수가 없게 되었거든.”
“주인님, 그게 저희들이 원하는 일이에요.”
세실의 갈색 눈동자가 등불에 일렁였다.
“대신 약속할 수 있어. 절대 내 의지로 너희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을 거야.”
“네, 주인님. 저흰 그걸로 충분해요.”
마음 같아선 로엔 록스버그 때문에 위험에 빠져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뱉었다간 제 주인이 부담스럽고 안타까워할 걸 알기에 꾹꾹 눌러 참았다.
“이제 그만 가자. 벌써 약속 시간이야.”
로엔의 말에 세실이 벽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저녁 6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톰이 현관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얼른 가요. 그런데 로이슈덴 공작님과는 어디서 만나기로 하셨다고 했죠?”
“유리엘라 광장의 종탑 앞이야.”
* * *
같은 시각, 유리엘라 종탑 앞에 서 있는 진은 제게 날아드는 사람들의 시선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장, 여기서 만나기로 한 것 맞아?”
“광장에 종탑이 두 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여기가 맞아.”
진의 대답에 세이지가 작게 한숨을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여기 너무 눈에 띄는 것 같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한 번씩 쳐다보잖아. 광대가 된 기분이야.”
때마침 축제를 구경하러 나온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종탑 앞에 서 있는 진과 세이지를 쳐다봤다.
“뭘 봐? 구경났어?”
눈이 마주치자마자 세이지가 시비를 걸었다. 세이지가 뿜어내는 살벌한 분위기에 사람들이 재빨리 시선을 피했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종탑 앞엔 빈 공간이 생겼고, 누구 하나 진과 세이지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이제 좀 났네.”
세이지가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미 세이지에게 겁을 먹은 사람들은 그의 미소에 몸을 떨 뿐이었다. 입꼬리만 올리고 웃는 모습이 마치 죽음을 예고하는 사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다물어. 아님 저쪽으로 떨어지든가.”
“가긴 어딜 가? 라우렐이 대장 옆에 딱 붙어 있으라고 했다고. 하드윅의 용병 말이야. 대장을 공격했던 그자. 알고 보니 게르피온에서 온 기사였더라고. 건국제를 틈타 몇 명이 함께 국경을 넘어온 모양이야.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알고 있어. 시합장에서 그자에게 전쟁터에서 맡았던 독초 냄새가 났었거든.”
“알고 있었어? 난 또 모르는 줄 알았지. 우승하자마자 낯 뜨겁게 구애하는 걸 보고.”
세이지가 검술 시합장에서 진이 로엔에게 했던 행동을 떠올리며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니까. 내가 용기를 내라고 부추기긴 했는데, 그렇게 당장 실행할 줄은 몰랐거든. 대장도 어지간히 몸이 달아 있었던 모양이지? 그렇게 넙죽 받아먹는 걸 보면 말이야.”
“헛소리하려거든 입 닥치고 꺼져.”
“왜 또 화를 내고 그래. 부끄러워? 부끄러울 게 뭐 있어. 원래 사랑이란 게 유치한 건데. 그리고 게르피온에서 넘어온 자들 때문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고 했잖아.”
“상관없으니까 당장 꺼져.”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선 살기가 번뜩였다. 하지만 세이지는 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나도 가고 싶은데, 못 가. 생각해 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자들이 공격이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어? 대장이야 아무 일 없겠지. 하지만 공작님은 괜찮을 거라 장담할 수 있겠어?”
세이지의 말이 영 틀린 건 아니라서, 꺼지라는 말을 입 속으로 삼켰다.
사실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서 적을 구분하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검술 시합장에서 제가 록스버그 공작에게 구혼한 걸 보았다면, 복수의 대상이 제가 아니라 공작 쪽으로 바뀔 확률이 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로엔 록스버그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눈 똑바로 뜨고 지켜.”
마지못해 세이지가 곁에 있는 걸 허락했다. 그러자 세이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걱정 마. 대장이 지금까지 고이 간직해 온 순결은 공작님이 꼭 가질 수 있도록 지켜 줄…… 윽!”
단말마에 흘러나온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세이지의 허리가 앞으로 꺾였다.
“경고했을 텐데. 그 입 좀 닥치라고.”
진에게 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세이지가 실실거렸다. 그리곤 사람들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장, 저기 봐. 대장의 신부야.”
진이 세이지가 가리킨 쪽으로 고갤 돌리자, 로엔이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쓰고 다니던 검은 베일 대신 상아로 된 가면을 쓴 채였다.
“저희가 좀 늦은 모양이네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딴 사람 같았다.
“그런데 무뢰배도 아니고 공공장소에서 폭력이라니. 좀 충격이네요.”
“이건, 그러니까…….”
로엔의 지적에 진이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사이 세이지가 재빠르게 태세전환을 했다.
“내 말이. 무뢰배도 아니고. 얼마나 아픈지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니까. 우리 대장, 정말 못됐지?”
대놓고 아파 죽겠다는 듯 엄살을 떨기 시작한 것이다.
“못된 주인이네요. 그러지 말고 이번 기회에 제 밑으로 들어오는 건 어때요?”
로엔의 제안에 세이지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미안, 그건 안 되겠어. 내가 개새끼긴 한데, 그중에서도 한 명의 주인을 섬기는 개새끼거든. 아쉽네. 대장을 알기 전에 공작님을 먼저 알았더라면 그 밑으로 들어가는 건데.”
입으론 아쉽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전혀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로엔은 거절의 말을 들었는데도 기분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어쩔 수 없죠. 그럼 이거나 써요. 두 사람, 지금 너무 튀거든요.”
로엔이 손에 쥐고 있던 가면을 두 사람에게 건넸다.
“이건 뭐야?”
“이번 건국제는 가면 축제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어서 써요.”
세이지가 가면을 받아 하나는 제 얼굴에 쓰고, 나머지 하나는 진에게 건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맨 얼굴이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양한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 축제라. 재미있을 것 같아.”
세이지는 가면을 쓰며 즐거워했다. 로엔은 진 쪽으로 고갤 돌렸다. 세이지에게 받은 가면을 쓴 진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요. 그럼 그만 가 볼까요? 아, 그리고 여기 있는 세 사람은 제 일행이에요.”
로엔이 뒤에 서 있는 라이칸과 세실 그리고 톰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일행이 여섯인가? 난 뭐, 인원이 많아도 상관없어. 축제는 사람이 많을수록 즐겁기도 하고. 대장은 어때?”
세이지가 로엔의 뒤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보며 어깰 으쓱했다.
“나도 상관없다. 어차피 세이지, 네가 할 일은 딱 하나니까.”
진의 말속에 담긴 뜻을 이해한 건 세이지 한 사람뿐이었다.
“그건 걱정 마. 그럼 가면 축제를 즐겨 볼까? 우리 어디부터 갈까?”
세이지의 목소리가 기대감으로 잔뜩 들떠 있었다.
“그럼, 서커스부터 보러 가요. 서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기예단이 왔거든요.”
세실의 제안에 일행은 서커스가 한창인 광장 북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