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로엔은 제가 왜 로이슈덴 공작가의 마차에 타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에드윈이 타라 여신까지 들먹이며 축원을 해 준 것까진 좋았는데, 건국기념일 파티에 참석할 필요 없다고 했다.
이유는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누가 들어도 두 사람을 내치는 광경이었다. 그곳에 있던 귀족이라면 에드윈의 말속에 숨겨진 뼈를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로이슈덴 공작과의 결혼이 결정된 순간, 두 가문 모두 황제에게 내쳐진 것이다.
로엔은 제 손목에 채워진 타라의 연을 만지작거렸다. 진 로이슈덴이 티핏의 보답으로 준 것이었다. 또한 혼약의 증표이기도 했다.
“불편한 모양이군. 아니면 나와의 결혼을 후회하는지도 모르고.”
진의 목소리에 로엔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진 로이슈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게 아니라 생경해서요. 제 건 붉은색이거든요. 그리고 장식은 대신전에서 준 건데 가문의 문장이 아니라, 공작새였고요.”
결혼을 후회하다니.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반대로 진 로이슈덴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후회하면 모를까.
“보여 줄 수 있나? 꼭 보고 싶군.”
“아, 그게…….”
보여 주면 끝날 일인데 그게 뭐라고,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로엔은 선뜻 대답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리곤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오늘 새벽 성인 의식에서 받았던 타라의 연에 매달린 장식이 닿았다. 공작새였다.
“첫날밤까지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군.”
“그게 아니라…….”
로엔이 베일 안에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첫날밤이라니.’
두 사람의 결혼은 1년간의 계약 결혼이었다. 무엇보다 결혼 조건엔 남편과 아내로서의 의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진은 부부의 의무를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설마 내게 아내의 의무를 원하는 건 아닐 테지?’
“후계자를 남길 생각은 없어.”
마치 로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후계자를 남길 생각이 없다니. 조금 뜻밖이었다. 귀족가에서 태어난 자라면 응당 가문의 후계 생산은 고유한 의무였다. 그런데 그는 그 의무를 지킬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납득이 갔다.
‘1년간의 계약 결혼일 뿐이니, 나에게선 상속자를 낳고 싶지 않다는 뜻이군.’
당연했다. 로엔 역시도 진과의 계약 결혼을 계획하면서 록스버그 공작가를 이을 후계자에 대한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참 이상했다. 저 역시 진과의 사이에 아이를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필요 없다고 하자 괜스레 속이 쓰렸다.
“의견이 맞아서 다행이군요. 저 역시 후계자를 낳을 생각이 없거든요.”
“생각이 같다니 기쁘군. 하지만 아내로서의 의무는 충실히 해 줬으면 좋겠는데. 나 역시 약속대로 남편으로서의 의무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니까.”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에 느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의미가 너무도 모호해, 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뜻이죠?”
“뭐긴. 정략결혼이라고 할지라도,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뜻이지. 그러니 너 역시 원할 때마다 아내의 권리를 내게 요구하도록 해. 난 언제든 응할 생각이니까.”
그의 표정과 말투는 정말 제게 아내의 의무를 원하기는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건조했다. 억지로 의무를 이행한다는 표정이랄까?
하지만 진득하게 따라붙는 은청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의 노골적인 욕망이 그대로 읽혀서다.
베일을 쓰고 있기 망정이지, 그의 눈빛에 동요하는 걸 들킬 뻔했다.
“그런 조건은 계약서에 없는 걸로 아는데요.”
다행이었다. 혼란스러운 감정과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거야 계약서에 언급할 필요도 없는 사항이라 뺀 거지. 상식적으로 봤을 때, 결혼이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게 포함된 것 아니었나?”
“그렇긴 하지만, 우린 상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특수한 상황이니까요.”
“뭐가 특수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기한이 정해지든, 정해지지 않든 결혼은 결혼인데 말이야. 아무튼 지금에라도 서로의 생각 차이를 알게 되어서 다행이군.”
진은 더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결론을 내렸다.
“난 일반적인 결혼을 원해.”
“만약 제가 그걸 거부한다면…….”
“당연히 결혼은 없는 걸로 할 생각이야. 그리고…….”
그때까지 마차에 편하게 몸을 기대고 앉아 있던 진이 허릴 세웠다. 그리곤 로엔이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그의 손이 닿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탐색하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우린 여러모로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베일을 사이에 두고 그의 손끝이 로엔의 입술을 건드렸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그의 시선에 로엔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에서 그가 막사에서 나눴던 키스를 떠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떤 부분이 그를 금욕에서 무장해제시킨 건지 알 수가 없군. 고삐 풀린 망아지도 아니고.’
지금껏 여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던 금욕적이던 사내가 고기 맛을 본 수도승처럼 작정하고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다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로엔은 제 입술에 진득하게 얽혀 오던 진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 순간, 덜컹하며 마차가 멈췄다.
“도착했군.”
창문 쪽으로 고갤 돌리자,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벌써 록스버그 공작가에 도착해 있었다.
집사인 스미스가 로이슈덴 공작가의 마차가 저택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놀라 계단을 내려오는 게 보였다.
“공작님, 오셨습니까.”
스미스가 서둘러 마차 문을 열었다. 그리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진을 발견하곤 재빨리 허릴 숙였다.
“로이슈덴 공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록스버그 공작가의 집사 스미스입니다.”
“그래, 스미스. 조만간 사람을 보내겠다. 한 달 후가 결혼식이니, 로이슈덴가의 집사와 함께 차질 없이 준비하면 될 것이다.”
진의 명령에 스미스의 시선이 로엔에게 향했다. 제 주인에게 먼저 의중을 묻는 눈치였다.
“그렇게 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스미스가 고갤 끄덕이곤 다시 진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리곤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보내 주신 분과 상의해 훌륭한 결혼식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미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진이 별말 없이 로엔을 보았다.
“저녁에 뭘 할 생각지?”
“건국기념일 파티에 참석할 생각이었는데, 폐하께서 친히 오지 말라고 하니 집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 맞다. 자정엔 약속이 있긴 한데.”
로엔은 새벽에 진이 보내왔던 편지를 상기했다. 자정에 은둔자의 숲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그럼 약속을 앞당기는 게 좋겠군. 어차피 그때까지 할 일도 없는데.”
“약속을 앞당기자는 말씀은?”
“축제라도 구경하는 건 어때? 폐하께서 함께 있으라고 준 시간이잖아.”
별일 아니라는 듯 툭 뱉어 내는 말에 로엔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진 로이슈덴과 축제에 간다니. 재미있을 것 같았다.
“폐하께서 명한 일이니 거절할 수도 없겠네요.”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축제에 가겠다는 뜻이었다.
“언제 볼까요?”
아, 실패했다. 마지막까지 즐거운 티를 태고 싶지 않았는데, 흥분을 감추지 못해 목소리가 떨렸던 것이다.
그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진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베일은 쓰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세실이 로엔의 손에 쥔 베일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위험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잖아.”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니 베일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이었어요. 칼라일에서 검은 베일을 쓴 분이 록스버그 공작님이란 사실을 모른 이가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거기다 오늘 검술 시합장에서 로이슈덴 공작님께 구애까지 받으셨다면서요. 벌써 소문이 파다하다고요. ‘내가 록스버그 공작이다.’라고 광고하고 싶지 않다면 절대 하지 마세요.”
세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죽거렸다. 그러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곧 시무룩해지며 한숨까지 내쉰다.
“왜 또 그러는 건데?”
“너무 아쉬워서요. 라이칸 님이 공작새의 눈물을 가지러 오셨을 때, 베일만 보내는 게 아니라 저도 따라갔어야 했는데. 가서 공작님이 주인님께 타라의 연을 주는 걸 직접 봤어야 했다고요.”
억울해 죽겠다는 듯 발까지 동동 구른다. 로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타라의 연으로 향했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세실이 옆에 답삭 붙어 왔다.
“하고 나가실 거죠?”
“뭘?”
뻔히 뭘 묻는지 알면서, 로엔은 시치미를 뗐다.
“뭐긴요. 공작님이 주신 타란의 연이죠. 축제에 하고 가세요. 주인님의 손목에 타라의 연이 있는 걸 보면, 분명 공작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돌려줄 거야.”
“아니, 왜요? 혹시 공작님과 결혼하지 않으시려고 그러는 건 아니시죠?”
사람들이 앞에서 타라의 연까지 받은 마당에, 이젠 빼도 박도 못했다.
당연히…….
“결혼은 할 거야. 하지만 타라의 연은 받을 수가 없어.”
세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로엔을 보았다. 하지만 심각한 제 주인의 표정을 보며 더는 캐묻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더는 묻지 말라는 듯 뭉뚱그려 대답하곤 로엔은 애써 타라의 연에서 고갤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