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승자의 예를 취하겠다니.’
진이 에드윈을 향해 승자의 예를 운운했을 때부터, 관람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로엔 역시 긴장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대상이 누군지 콕 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검술 시합장에 있는 사람들 중 진 로이슈덴이 승자를 예를 취하려는 레이디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요.”
귀족들 사이에서 경악에 가까운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로엔은 귀족들의 시선 따위 안중에 없는 듯 저를 향해 걸어오는 진을 보며 침착하려 애썼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주는 낯선 고양감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꾸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경련이 일 정도였다.
“괜찮으십니까, 공작님?”
뒤에 서 있던 라이칸이 로엔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긴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라이칸.”
로엔이 고갤 끄덕이곤 진 쪽으로 고갤 돌렸다. 순간이긴 했지만 저를 향해 걸어오던 진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뭐지?’라고 생각한 순간, 그의 시선이 로엔의 어깨에 올려진 라이칸의 손에 닿아 있는 걸 깨달았다.
로엔은 본능적으로 라이칸의 손을 밀어냈다. 그제야 찌푸려졌던 진의 미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설마 라이칸에게 질투라도 하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로엔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무시했다. 에드워드 캐슬리우스라면 몰라도 진이 라이칸을 경계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로엔은 그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마침내 진이 로엔 앞에 섰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그의 눈높이에 맞춰 고갤 들었다.
그러자 진의 조각처럼 완벽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시합을 치르느라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흐트러진 모습까지 완벽하다니.’
로엔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 불어온 바람에 비릿한 피 냄새와 섞인 그의 체향이 훅 끼쳐 들었다. 자연스럽게 로엔의 시선이 그의 팔로 향했다.
임시방편으로 베일을 묶어 놓은 팔은 피로 젖어 있었다. 그의 몸에 또 상처가 났다고 생각하자 이유 없는 짜증이 솟구쳤다.
‘이길 거면 다치지나 말지.’
순간 진이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같군. 알렉에게 당부했던 말을 전해 들었거든.”
“그렇게 말했었죠.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이미 다친 걸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를 걱정했나?”
“…….”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 로엔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다행히 진 역시도 로엔의 대답을 바랐던 건 아니었는지 바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걱정할 정도로 깊은 상처는 아니거든. 그리고 그대가 내 막사에 놓고 간 이게 있어서 굉장히 유용했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진이 제 팔에 묶인 검은 베일을 무심하게 툭 건드렸다. 하지만 두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무심할 수 없었다.
냉혹하고 차갑다고 알려진 진 로이슈덴 공작이 마치 연인에게 하듯 괴물 공작을 대하고 있던 것이다.
거기다 두 사람이 막사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말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하지만 상처는 바로 치료하는 게 좋겠어요.”
로엔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태연한 척 말했다.
“그대가 또 치료해 주면 되겠군. 로열 에스콧에서처럼. 아니면 오늘 내 막사에서 했던 것처럼도 상관없고.”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진의 태도에 로엔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히 베일을 쓰고 있어서 망정이지, 라이칸이 베일을 가져오지 못했다면 제국민들 앞에서 얼굴을 붉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지금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해.’
아마 검에 제 베일을 묶고 나왔을 때부터 작정을 한 듯 보였다.
무엇보다 로열 에스콧에서 로엔이 약을 먹인다는 이유로 그에게 키스했다는 사실을 귀족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 그 사실을 다시 언급함으로써, 오늘 막사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 농밀한 사건이 있었음을 언급한 것이다.
지금 귀족들의 머릿속에서 저와 진을 대상으로 어떤 음흉한 상상이 벌어질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됐다.
“흠, 흠. 이번 상처는 그리 위험한 것 같지 않으니 알렉에게 부탁하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로엔이 헛기침을 하며 치료를 알렉에게 미뤘다. 그러자 진이 퍽이나 아쉽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는 게 보였다.
“어쩔 수 없지. 그대가 싫다니. 알렉에게 부탁할 수밖에.”
실망한 것 같은 표정에 로엔은 한순간이었지만 마음을 바꿀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가 있는 걸 보니, 그가 지금 그녀를 놀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로엔이 베일 안에서 곱게 흘기자, 진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깊어졌다.
순간 심장 부근이 뜨거워졌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괜스레 발끝이 곱아들었다. 심장에 가느다란 현이 달려 있어, 그곳으로 미세한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작정하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레이디 로엔.”
갑작스러운 호칭 변화에 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뭘 하려고 이러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네, 로이슈덴 공작님.”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레이디 로엔에게 승자의 예를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예를 취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정중한 태도였다.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레이디를 향한 존중과 경외가 담겨 있었다.
이상했다. 당연히 대답은 ‘네.’였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로엔에겐 감정을 숨기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제 목적을 위해선 거짓말도 쉬웠다.
그런데 ‘네.’라는 단 한 마디가 천근만근이 되어 입술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로엔은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진의 시선에 몸을 떨었다. 심장이 속도 없이 뛴다.
“레이디 로엔?”
진이 채근하듯 다시 부른 후에야, 로엔은 대답할 수 있었다.
“허락할게요.”
로엔의 대답이 떨어진 순간, 숨죽이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제국민들이 거칠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엔 만큼이나 진의 행동 하나하나에 제국민들의 신경이 모두 쏠려 있는 듯했다.
로엔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진이 승자의 예를 취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새하얗고 섬세한 손이 아닌, 검은 장갑을 낀 손이었다.
‘귀족들이 멸시하던 괴물 공작의 손.’
그 앞에 진이 무릎을 꿇었다.
청명한 오후의 햇살이 두 사람을 비췄다. 로엔의 얼굴을 가린 검은 베일이 바람에 일렁였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강하고 아름다운 기사의 모습이 고스란히 사람들의 눈에 담겼다.
분명 두 사람의 모습은 지금껏 그들이 상상해 온 기사와 레이디의 낭만적인 고백 장면과는 달랐다.
‘괴물 공작과 아름다운 기사.’
그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모습은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말도 안 되지만, 아름다운 광경이란 생각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진이 로엔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순간은 찰나였지만, 뜨거운 감촉은 강렬했고 오래도록 남았다.
“저건 타라의 연이 아닌가요?”
“설마요?”
“하지만 분명히……”
타라의 연이라고?
로엔이 고갤 숙여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귀족들의 말처럼 제 손목에 타라의 연이 채워져 있었다.
성인 의식을 치른 여인들에겐 붉은 실을 꼬아 만든 타라의 연이 주어졌지만, 남자들에겐 푸른 실을 꼬아 만든 타라의 연이 주어졌다.
그런데 지금 로엔의 손에 푸른색의 타라의 연이 채워졌다. 게다가 연의 끝엔 로이슈덴 공작가를 상징하는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이건?”
로엔이 놀라 진을 보았다.
“레이디 로엔께서 주신 티핏에 대한 제 대답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레이디 로엔의 타라의 연으로 받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이건 승자의 예를 취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진 로이슈덴은 황제와 귀족들, 그리고 제국민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괴물 공작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록스버그 공작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레이디 캐서린! 괜찮나요?”
충격이 컸는지 지금껏 주먹을 꼭 쥔 채 두 사람을 지켜보던 캐서린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옆에 서 있던 제인이 재빨리 캐서린을 부축하며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레이디들의 사정 역시 다르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사건에 넋을 잃은 얼굴이었다.
“그대의 청혼은 잘 봤다, 로이슈덴 공작. 이미 록스버그 공작이 공개 구혼을 한 상태니, 대답은 듣지 않아도 되겠군.”
에드윈의 서늘한 목소리에 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의 축복을 받고 싶습니다. 저희 두 사람을 위해 축복을 내려 주시겠습니까?”
진의 뻔뻔한 요구에 에드윈의 시선이 로엔의 손목에 채워진 타라의 연으로 향했다. 당연히 약혼 발표는 건국기념일 파티에서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발 앞서 일을 벌이다니.
에드윈은 자꾸만 제 계획에서 벗어나는 두 사람을 보자 짜증이 났다. 아니, 초조했다.
‘빌어먹을 진 로이슈덴.’
에드윈은 욕설을 삼키며 가면 같은 차가운 미소를 만면에 띠웠다. 그리곤 세상 다시없을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미래를 축복한다. 타라 여신의 축원이 함께하길. 아, 그리고 두 사람은 건국기념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연인들의 시간을 방해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두 사람을 배려하는 말처럼 보였지만 이건 엄연한 거부였다.
아드리안 제국의 건국기념일 파티에, 그것도 개국공신 가문이라고 알려진 두 가문에 참석하지 말라니. 황제가 두 가문과 척을 지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귀족들 역시도 에드윈의 서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드윈이 두 사람에게 등을 돌렸다. 시종장을 따라 가는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음산했다.
그 뒤를 초조한 표정의 그리젤라가 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