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챙!
또다시 진의 검을 피한 에드워드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낼 새도 없이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피해야 했다. 몇 번이나 뒷걸음을 치며 공격할 기회를 노렸지만, 진 로이슈덴에겐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가 궁지에 몰린 쥐처럼 느껴졌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도망칠 틈도 보이지 않았다.
“헉, 헉. 제길.”
거친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렇게 차이가 났었나?’
제 검술 실력 역시 한 번도 뒤처진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진 로이슈덴이 작정하고 공격하니 이건 차원이 달랐다.
“벌써 지치면 안 되지. 내 적이 이렇게 시시해서야 김빠지잖아.”
짓씹듯 뱉어 내는 거만한 목소리에 에드워드가 고갤 들었다.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태양 빛을 받고 서 있는 진 로이슈덴에 의해 생긴 그림자였다.
에드워드는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 중이었다. 역광을 받고 서 있는 진 로이슈덴은 그의 말대로 자비 없는 사신처럼 검을 휘둘렀다.
챙―, 소리와 함께 에드워드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날아가 땅에 박혔다. 에드워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진을 응시할 뿐이었다.
스륵, 서늘한 냉기가 제 목에 닿았다. 전쟁터에서 수천 명을 죽인 로이슈덴가의 보검이었다.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해. 그러면 살려는 주겠다.”
“…….”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사로서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은청색의 눈동자에 사로잡혀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용맹하다던 게르피온의 전사들과 싸울 때도 느껴 보지 못한 공포에 에드워드는 몸을 덜덜 떨 뿐이었다. 그가 느낀 건 끝없는 절망이었다.
“그만! 여기서 경기를 끝낸다.”
시합장을 울리는 에드윈의 목소리에 진은 에드워드의 목에 겨눴던 검을 거두었다. 그제야 에드워드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진 로이슈덴 공작님께서 검술 시합에서 우승하셨습니다. 우승자는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시종장의 선언에 관람석에서 지금껏 숨을 죽인 채 시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레와 같은 환호를 보내왔다.
진은 고갤 떨군 채 앉아 있는 에드워드에게 다시 한 번 시선을 준 뒤, 검을 갈무리했다. 그리곤 황제가 있는 특별관람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은 제게 향한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에도 무심한 표정이었다. 황제가 있는 특별관람석으로 걸어오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에드윈이 아니라, 로엔에게 향해 있었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 심장이 뛰었다. 사람들의 환호와 흥분이 로엔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 모양이다.
“폐하.”
에드윈 앞에 선 진이 황제를 향해 예를 갖췄다.
“진 세인트 루이스 로이슈덴 공작, 우승을 축하한다.”
기쁜 듯 말하고 있지만 에드윈의 얼굴에는 가면 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 우승했으니 약속대로 그대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승자의 특권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지금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폐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나중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누구나 원하는 승자의 특권엔 관심 없다는 투였다.
“상관은 없다. 어차피 승자의 특권에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니. 대신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군. 혹시라도 공작이 내게 목숨을 구걸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 특권을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에드윈이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몇몇 귀족들이 에드윈을 따라 웃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에드윈과 진을 번갈아 보았다.
정복 전쟁이 끝난 후 타란 대륙을 황제의 발아래 가져다 바친 최고의 기사가 아드리안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은 정복 전쟁이 끝났으니 어느 때보다 평화로울 것이라 기대할 테지만, 아드리안 제국의 정세는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전쟁터에서는 진 로이슈덴의 실력과 힘이 아드리안 제국을 지키는 강력한 무기였지만, 전쟁이 끝난 지금은 황실을 위협하는 양날의 검 또한 될 수가 있었다.
거기다 로이슈덴 공작가는 황실인 존더부르크와 피를 나눈 혈족이었다.
아직 국혼을 치르지 않은 에드윈에게 불운이 찾아들어 그가 죽게 된다면, 다음 황위 계승은 진 로이슈덴에게 있었다.
그러니 눈치 빠른 귀족들을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하는지 가늠하느라 연일 황제의 횡보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폐하, 로이슈덴 공작가는 ‘부러지지 않는 검’으로 아드리안 제국의 자존심입니다. 오직 폐하만이 손에 쥔 제국의 검을 쓰실 수 있을 겁니다.”
진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진 로이슈덴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시험하고 있었지만, 진은 한 번도 황제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귀족들과 제국민 앞에서 진이 황제에게 무릎을 꿇음으로써 제 신념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진을 내려다보는 에드윈의 턱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굉장히 기쁘군.”
“폐하께 로이슈덴가의 ‘부러지지 않는 검’을 바치겠습니다. 정복 전쟁이 끝난 이상 저에게 검은 필요치 않습니다.”
진이 로이슈덴 공작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검을 에드윈에게 내밀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을 지켜보던 관람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리는 귀족들뿐만 아니라, 제국민들도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진이 황제에게 보인 태도는 파급 효과는 컸다.
오늘을 기점으로 누구 하나 황제에 대한 진 로이슈덴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자는 없을 터였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에드윈의 뺨이 씰룩였다. 꽉 다문 입매가 경련하듯 떨렸다.
“폐하,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진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제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진이 내민 검을 거절한다면 대놓고 진을 경계하고 믿지 않고 있음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제길, 처음부터 작정을 했군. 날 덫으로 밀어 넣으려고.’
에드윈은 로이슈덴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검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의 마음이 그렇다니, 받겠다.”
에드윈이 진이 내민 검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숨을 죽인 채 지켜보던 제국민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 눈엔 에드윈과 진의 모습이 황제와 그 황제를 따라는 믿음직한 기사의 모습으로 보일 테고, 심장이 뜨거워질 만큼 감동적인 장면일 터였다.
“폐하, 너무 기뻐요. 정말 감동적이에요.”
옆에 앉아 있던 그리젤라 역시 뭉클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에드윈은 욕설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젤라, 마음이 이리 약해서야. 그대는 국혼을 치르기 전에 마음을 공고히 하는 법부터 배워야겠군.”
에드윈은 제 뜻을 읽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 구는 그리젤라를 은근히 비꼬았다. 하지만 순진한 그리젤라가 그 사실을 알아차릴 리 없었다.
“국혼을 치른 후에도 폐하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 계시는 로이슈덴 공작님처럼요.”
그리젤라가 속도 모르고 수줍게 웃었다. 에드윈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다 제 손에 들어온 로이슈덴 공작가의 검에 눈이 갔다. 차가운 감촉이 끔찍이도 싫었다. 제 어두운 마음이 당장에라도 검을 빼 들고 진의 목을 내려칠 것 같아서였다.
“로이슈덴 공작!”
“네, 폐하.”
“그대에게 다시 이 검을 내리겠다. 아드리안 제국의 검으로서, 내 유일한 혈족으로서 소임을 다하라는 뜻에서 주는 것이니 앞으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검이 네 목을 찌르지 않도록.”
에드윈이 다시 진에게 검을 건넸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그 주군에게 검을 바치고, 그 검을 받은 주군은 다시 기사에게 검을 내린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기고 그 속을 들여다본다면, 끝없이 의심하고 경계하는 황제의 어두운 마음을 볼 수 있을 터였다.
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에드윈이 내린 검을 받아 들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제국의 검으로 소임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종장, 이제 검술 시합도 끝났으니 궁으로 돌아가야겠다.”
“마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폐하.”
에드윈이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는 듯 시종장을 따라나섰다. 그리젤라 역시 에드윈을 따라나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진이 에드윈을 불렀다.
“폐하!”
“아직 할 말이 남았나, 로이슈덴 공작?”
걸음을 멈춘 에드윈은 또 뭐냐는 듯 짜증이 섞인 얼굴이었다.
“아직 승자의 예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승자의 예를 취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에드윈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믿기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 호기심이 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승자의 예라고 했나?”
에드윈의 시선이 진의 팔에 묶여 있는 검은 베일에 닿았다. 이미 록스버그 공작의 티핏을 팔에 감고 있으면서도 승자의 예를 굳이 취하겠다니.
문득 에드윈의 머릿속에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 스치듯 지나갔다.
‘설마 록스버그의 돈에 팔려 결혼을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라도 준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긴 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 이 행동이 납득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가 아는 진 로이슈덴은 절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것이 정략결혼을 할 상대라고 해도 절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제 스스로 그 광대 노릇을 하겠다고 나서다니.
에드윈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검술 시합이 열린 이래, 200년 동안 승자의 예는 한 번도 지켜지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 관례니 생략할 순 없겠군.”
마지못한 허락이 분명했지만, 진은 상관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몸을 돌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로엔이 앉아 있는 관람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