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라이칸은 막사 앞에서 진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저를 경계하며 쏘아보던 눈빛은 수컷이 제 암컷의 주위를 배회하는 수컷에게 던지는 경고의 눈빛이었다. 그런 감정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닌, 본능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 주인은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기사가, 아니 사내가 제 검에 레이디의 물건을 깃발처럼 묶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그건 일종의 과시였다. 힘 있는 맹수가 영역 표시를 하듯, 제 경쟁자들을 제압하려는 본능과도 같았다.
그나마 지금은 로엔이 직접 검은 베일을 진에게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 것 같았다.
라이칸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갈무리하며, 별일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말했다.
“우승을 하시려는 모양입니다.”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었어?”
로엔은 진 로이슈덴이 이번 검술 시합에서 우승할 거라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다는 표정이었다.
누구나 진 로이슈덴이 우승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겠지만, 라이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실력만 따진다면 아드리안 제국, 아니 타란 대륙에서 진 로이슈덴을 능가하는 기사는 없었다. 다만 승부에 관심이 없는 진 로이슈덴이 있을 뿐이었다.
라이칸이 본 진 로이슈덴은 승부나 권력에 욕심이 없는 자였다. 그와 가장 어울리는 단어가 ‘무심함’이라면 말 다 한 것이다.
그러니 오늘 치러지는 검술 시합의 결과 역시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가 자신의 검에 누구 것인지 명백한 검은 베일을 묶고 나타났다.
황제를 포함해 제국민이 보는 자리에 레이디의 티핏을 깃발처럼 달고 나타난 이유는 뻔했다.
그 깃발의 주인을 위해 우승을 원한다는 뜻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로엔 록스버그 공작을 위해서 우승하려는 것이다.
라이칸은 진 로이슈덴을 바라보고 있는 제 주인을 응시했다. 검은 베일을 쓴 로엔 록스버그에게선 범접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아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이칸은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는 대신, 쉬운 답을 내놓았다. 지금은 굳이 제 주인에게 진 로이슈덴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래. 당연히 공작님이 우승하실 거야. 캐슬리우스 백작님 실력도 제법이긴 하지만, 아직 안 되지.”
아마 평생을 노력해도 진 로이슈덴을 이길 사람은 없을 거라는 게 로엔의 생각이었다.
부우우웅―.
그때, 결승 시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로엔의 시선이 다시 진 로이슈덴에게 향했다. 그 역시 로엔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조금 전 시합장을 울렸던 나팔 소리만큼이나 팔랑거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검은 베일이 자꾸만 눈을 붙잡았다.
‘대체 왜?’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라이칸에겐 내색하지 못했지만, 진의 행동에 자꾸만 심장이 간질거린다.
그가 왜 제 베일을 티핏처럼 검에 걸었는지, 그 해답을 찾다 보면 결국은 한 가지에 도달한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거야.’
생각지도 못했다. 로엔은 티핏을 준비하는 게 어떻겠냐는 스미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진 로이슈덴은 절대 사람들 앞에서 승자의 예를 취하지 않을 것이란 게 이유였다.
하지만 로엔은 그게 진실이 아님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한 꺼풀 벗겨 마음속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상처받고 싶지 않는 마음이 존재했다. 티핏을 준비해 왔다가 비웃음을 사고 싶진 않았다.
비웃는 사람이 진 로이슈덴인지, 아니면 제국민인지 아직 모호했지만, 그 속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저는 아직 겁쟁이였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했던 진 로이슈덴이 먼저 움직였다. 어떤 이유로 마음이 바뀌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챙, 채챙―.
두 개의 검날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에 로엔은 정신이 들었다.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결승전이 시작되어 있었다.
예리한 검날이 서로의 허점을 파고들며 격렬히 부딪혔다.
“생각보다 캐슬리우스 백작님 실력도 밀리지는 않는군요.”
지금까지는 방어적인 형태로 시합을 해 오던 에드워드가 진과 마주한 지금은 필사적일 만큼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거 만만치 않겠는데요.”
귀족들은 진 로이슈덴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에드워드를 보며, 어쩌면 에드워드가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로엔의 생각은 달랐다. 겉으로 봤을 땐 에드워드가 진을 몰아붙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여유롭게 에드워드의 검을 받아치는 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에드워드는 진과의 실력 차이를 확연히 느낀 나머지 조급해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패턴을 잃고 필사적으로 공격에 매달리고 있었다.
마치 초식 동물이 맹수에게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맹수가 이를 드러내기 전에 먼저 공격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아무리 초식 동물이 죽을힘을 다해도 맹수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사락, 소리와 함께 에드워드의 검이 진의 팔을 베었다. 순식간에 붉은 피가 후드득 바닥에 떨어졌다.
“허업, 피가…….”
레이디들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엔 역시도 진의 팔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설 뻔했다.
하지만 정작 팔을 베인 진 로이슈덴만이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사람들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를 드러내기 직전의 맹수처럼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결승 시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헉, 헉…….”
에드워드가 거친 숨을 내쉬며, 진의 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았다.
“벌써 지친 건 아니겠지, 백작?”
진이 여유롭게 웃으며 검에 묶여 있던 검은 베일을 풀었다. 그리곤 피가 나는 제 팔에 감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에드워드의 입매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왜, 탐이 나나?”
“…….”
에드워드는 대답 대신 쥐고 있는 검에 힘을 주었다. 진 로이슈덴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에드윈이 제게 록스버그 공작을 신붓감으로 주려 했다는 사실을.
“탐이 나도 잘 숨겨야지. 다 티 나잖아.”
에드워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진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그게 무슨……?”
“시치미를 뗄 생각인 모양인데, 잘 생각했다. 숨길 수 없으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네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절대 네 것이 될 수 없는 존재니까.”
에드워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이 풀리지 않게 단단히 매듭을 지은 진은 검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진 로이슈덴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사냥감을 탐색하며 느른하게 움직이던 맹수였다면, 지금은 사냥 직전의 모습이었다. 한 순간이라도 사냥감이 허점을 드러낸다면, 잔혹하게 이를 드러내며 목을 물어뜯을 기세였다.
“하아, 제길.”
에드워드는 그제야 진과 대결을 하는 동안 느꼈던 불안의 정체가 무언인지 분명이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저와 진심으로 싸울 마음이 없었던 겁니까?”
“그것보단 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본 거지. 그러니 너무 마음 상해할 건 없다, 캐슬리우스.”
에드워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미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 있는 동안 진 로에슈덴이 자비 없이 적군을 죽이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봐 왔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잊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채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진 로이슈덴이 얼마나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존재였는지를 말이다.
등줄기에 소름이 끼쳐 들었다. 진 로이슈덴은 같은 편일 땐 의지가 되는 존재였지만, 적이 되었을 땐 무슨 일을 해서라도 피하고 싶은 자였다.
“그러니 각오해. 지금부터 진심으로 널 상대해 줄 생각이니까. 그게 예의고.”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냉기를 품고 번뜩였다. 그 눈빛엔 의심의 여지없이 제 것을 탐한 자에 대한 서늘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공작님을 마음에 품으신 겁니까?”
절대 이 자리에서 해선 안 되는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넌 어떨 것 같은데?”
대답 대신 진이 되물었다. 에드워드는 태양 아래 사신처럼 서 있는 진 로이슈덴을 응시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입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진의 팔에 묶인 검은 베일에 시선이 닿았다.
“눈 돌려. 파 버리기 전에.”
에드워드가 본능적으로 고갤 들었다. 그러자 진 로이슈덴이 잔혹하게 웃으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진짜였다.
사실 짐작은 했었다. 가든파티에서 록스버그 공작을 품에 안은 채 저를 지나쳐 갔을 때부터 그가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사람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검은 베일을 검에 묶고 나타났을 때도 모든 면에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
귀족으로 태어난 자의 숙명대로 가문의 명예와 평판을 멍에처럼 어깨에 지고 살아야 하는 자신과는 달리, 진 로이슈덴은 록스버그 공작이 상처투성이 괴물이든 귀족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존재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록스버그 공작을 제 사람으로 인정한 것이다.
“경고했던 것처럼 자비는 없다. 그러니 절대 항복하지 마. 쉽게 이기면 화가 날 것 같거든. 네 마음의 경중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의 검이 에드워드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재빨리 피하긴 했으나 또다시 날아드는 검을 받아 내느라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야 했다.
에드워드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날카롭게 날아드는 검을 받아 냈다. 이번엔 운 좋게 진의 검을 받아쳤지만, 다음번도 운이 좋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