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관람석으로 돌아온 로엔은 서둘러 라이칸을 찾았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제게 쏟아지는 귀족들의 시선에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자릴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저를 보며 수군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로이슈덴 공작을 만나러 갔던 일이 벌써 소문이 퍼진 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귀족들은 물론, 제국민들까지 저를 흘끗거리며 대놓고 수군거릴 일은 없었다.
“록스버그 공작!”
시종장과 얘길 나누고 있던 에드윈이 로엔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를 불렀다.
“네, 폐하.”
자리에서 일어서자,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한다. 로엔은 에드윈의 명령에 따라 특별관람석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핑계를 대서라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딱히 핑곗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금 전 첫 대면 이후 계속해서 저를 대놓고 무시하던 황제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저를 부르는 덴, 분명 유쾌하지 못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내 부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군.”
“아닙니다, 폐하. 제가 감히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런데 어딜 다녀온 거지?”
예상했던 질문이라 순순히 대답했다.
“오랫동안 앉아만 있었더니 다리가 아파, 잠시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대신 귀찮아지는 게 싫어 진의 치료를 위해 막사에 갔던 얘긴 쏙 뺐다. 에드윈이 이미 제가 진을 만났단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 시합 도중 진을 만나는 일이 규정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었으니, 나중에 알게 된다고 해도 특별히 문제될 일은 없었다.
“그래? 그럼 그대의 베일은 산책하는 동안 바람에 날아간 모양이군.”
에드윈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리는 것을 보며, 로엔은 그제야 자신이 베일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베일.’
로엔은 신음을 삼키며, 최대한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 애썼다. 그제야 제가 관람석으로 돌아오자마자 사람들이 저를 보고 수군거린 이유 역시도 알게 된 것이다.
‘급히 나오느라 로이슈덴 공작가의 막사에 베일을 놓고 온 것 같은데, 어쩌지?’
다행히 얼굴 가리개를 한 상태였지만 베일 없이 사람들 앞에 선 건 처음이었다. 만에 하나 얼굴에 붙인 인피면구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낭패였다.
당장에라도 진의 막사로 가서 베일을 가져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는 사이, 로엔은 조금 전 그와 나눴던 키스가 떠올랐다.
서로의 숨결을 삼키며 진득하게 들러붙던 그의 입술을 떠올리자 로엔은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읏.’
키스로 인해 아랫입술이 부었는지 아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이 상태론 직접 막사로 찾아가는 건 내키지 않았다. 조금 늦더라도 라이칸이 돌아오면 로이슈덴 공작가의 막사로 가서 베일을 가져오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바람에 날아가는 걸 붙잡지 못했습니다.”
로엔이 에드윈의 말에 수긍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다행히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목소리에 혼란스러운 감정은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군. 그런데 듣자하니 산책 중에 캐슬리우스 백작을 만났다고?”
에드윈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순간 불안이 엄습했다. 옆에 앉아 있던 그리젤라 역시 캐슬리우스 백작이란 말에 흥미가 인 듯 로엔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귀족들 역시 캠벨 후작가의 파티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테니, 에드윈과 제 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게 뻔했다.
“네. 산책하다 길을 잃었는데, 그때 저를 도와 주셨습니다. 정말 친절한 분이시더군요.”
“그렇지. 굉장히 친절하지. 그리고 그대에게 개인적인 관심도 있고.”
작정을 한 것인지 에드윈의 발언이 굉장히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안 듣는 척 고갤 돌리고 있던 귀족들이 이젠 대놓고 로엔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악의적인 호기심이 드러나 있었다.
무엇보다 조금 뒤에 있을 검술 시합의 결승전에서 맞붙을 두 사람이었기에 자칫 말실수라도 했다간, 두 남자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못된 악녀가 될 판이었다.
“괴물 공작인 제게 개인적인 관심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이럴 땐 제게 따라붙는 소문이 좋을 때가 있었다.
로엔이 단호하게 부정하자, 다행히 귀족들 역시 납득한 듯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캠벨 후작가의 가든파티에서 백작님께서 제게 사업적인 부분의 자문을 구하긴 했습니다. 얼마 전에 작위를 물려받아 영지를 관리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저 역시 그 고충을 알기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돕겠다고 했습니다.”
로엔은 에드워드와 제 사이는 사업적인 자문을 주고받는 사이일 뿐이라고 다시 한 번 선을 그었다.
“그랬나?”
제 뜻대로 분위기가 흘러가지 않자 에드윈의 입꼬리가 불만스러운 듯 올라갔다.
“그것 외엔 없었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캐슬리우스 백작님을 불러서 물어보셔도 됩니다.”
“그렇게 확실히 아니라고 잡아떼니 더는 우길 수도 없겠군.”
잡아뗀 것도 아니고, 우긴 것도 아니었지만 로엔은 그것을 지적할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그저 아무런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가길…….
“저기 로이슈덴 공작님이 나오시네요.”
때마침 시합장 안으로 들어서는 진을 발견하곤 관람석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로엔은 안도했다. 결승전이 시작되면, 더는 이런 얘기를 할 필요가…….
“그런데 저게 뭐죠?”
“뭘 말씀하는지 모르겠군요.”
“저기요. 로이슈덴 공작님의 검에 달린 저거요. 검은 천 같은데.”
“설마 저건…….”
뒷말은 목구멍 속으로 삼켜졌지만 관람석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했다.
귀족들의 시선이 검을 든 진 로이슈덴과 항상 쓰고 다니던 검은 베일을 쓰지 않고 서 있는 로엔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로엔은 귀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햇살 아래 서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고, 쨍할 정도로 밝은 태양 빛이 로엔의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비추고 있었다.
‘아, 망했다.’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딜 다녀왔냐는 에드윈의 질문에 산책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 말이 거짓말이란 걸 진의 검에 걸린 베일로 인해 다 알게 된 셈이었다.
“산책이란 게, 저런 의미였던 모양이군. 티핏 같은 건 준비하지도 않았다고 하더니…….”
에드윈이 입가를 비틀며 말을 멈췄다. 그리곤 알 만하다는 듯 로엔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지. 내가 잘못 물어봤군. 티핏이 아니라 다른 걸 준비했는지 물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 어떤 티핏보다 그대의 베일이 확실한 존재감을 갖고 있긴 하군. 아드리안 제국에서 저 검은 베일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이가 없을 테니까.”
에드윈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듯 쐐기를 박았다. 로엔을 얕은 술수로 황제를 속인 거짓말쟁이라며 비난한 것이다.
“폐하, 그런 게 아니라…….”
“변명은 필요 없다, 록스버그 공작. 정말 실망이군. 더는 보고 싶지 않으니 그만 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에드윈이 더는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차갑게 고갤 돌렸다. 어쩔 수 없이 로엔은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에드윈의 축객령에 귀족들 역시 하나둘 로엔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 순간부로, 황제에게 단단히 찍힌 것이다.
“믿을 수가 없네요. 로이슈덴 공작이 괴물 공작이 건넨 티핏을 검에 달다니.”
보고도 여전히 믿기지 않은 듯 귀족들의 시선은 진의 검에 묶인 검은 베일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자리로 돌아온 로엔 역시도 진의 검에 묶인 검은 베일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 베일을 검에 묶고 나왔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뒤를 돌아보자 라이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조금 전 에드윈에게 내쳐지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왔어? 난 괜찮아.”
로엔은 애써 침착하게 말한 뒤, 걱정할 것 없다는 듯 고갤 끄덕여 보였다. 그리곤 공작새의 눈물부터 찾았다.
“공작새의 눈물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로이슈덴 공작님을 만나 뵙고 왔습니다. 드렸더니, 필요 없다고 하시더군요.”
“공작님을 만났어?”
“네.”
“다른 말은 없었고?”
“앞으로 로이슈덴 공작가 주변에 얼쩡거리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시간에 공작님을 지키라고 하시더군요.”
“그랬어?”
진 로이슈덴이라면 당연히 눈치챌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부러 라이칸에게 로이슈덴가를 감시하게 한 건, 암살자들이 로이슈덴가 쪽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리고, 여기.”
어디서 구해 왔는지 라이칸이 품 안에서 검은 베일을 꺼내 건넸다.
“어떻게 알고 가져온 거야?”
이번엔 정말 놀랐는지 로엔의 눈동자가 커졌다.
“날씨가 덥다며 세실이 건네주었습니다. 제가 씌워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할게.”
로엔은 라이칸에게서 검은 베일을 받아 얼굴에 썼다. 환하던 시야가 검은 베일로 가려지자, 조금 안심이 됐다.
“세실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렇지 않아도 로이슈덴가의 막사에다 베일을 놓고 와서 굉장히 난처했거든.”
“공작님께서 직접 주신 게 아니셨습니까?”
“베일을? 아니야. 급하게 나오느라 깜빡 잊고 나온 거야.”
로엔의 시선이 에드윈 쪽으로 향했다. 결승 시합이 시작되려는지 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로이슈덴 공작님이 검에 베일을 묶고 나오는 바람에 일이 좀 꼬였어. 거짓말쟁이가 된 건 상관없는데, 완전히 폐하의 눈 밖에 난 것 같아. 휴우, 공작님은 대체 왜 베일을 검에 묶고 나타나신 건지. 이해가 안 돼.”
로엔이 한숨까지 내쉬며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로엔을 보며 라이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