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로엔은 습기를 품은 입술을 열어 그가 제 체액을 삼킬 수 있도록 했다. 그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진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흐음―.”
로엔의 허리에 감겨 있던 진의 팔에 힘이 가해지더니, 더욱 진득하게 입안을 탐했다.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며 입 안쪽의 여린 점막을 자극했다. 그리곤 뭉근하게 고인 체액을 빨아 삼켰다.
“하아, 공작님.”
로엔의 허리가 야릇한 열기에 비틀렸다. 아랫배 안쪽에 고여 있던 열기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확 퍼지더니, 알 수 없는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흐음, 하아…….”
로엔은 본능적으로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갈증을 해결하려는 듯 그에게 체중을 실었다. 그러자 그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진이 낮게 욕설을 뱉어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영문 모를 소리가 진의 입술 새로 흘러 나왔다.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놀라, 로엔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그것도 진 로이슈덴의 몸 위로 올라타 그의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
다행히 약속대로 진이 눈을 뜨지 않아서 망정이지, 이 상황에서 눈이라도 마주쳤다면 온몸이 새빨갛게 익어 석류가 되었을 터였다.
“어, 왜 이렇게 됐지?”
당황한 로엔이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그러자 진이 험악하게 미간을 구기며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드레스 자락에 휘감긴 다리가 그의 특정 부위를 눌렀고, 눌린 부위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놀라 허리를 흠칫 떨기까지 했다.
“윽, 제길.”
“아파요? 잠깐만 기다려요. 얼른 비킬 테니까…….”
“제발 가만히 있어.”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막사 안을 울렸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로엔은 의아한 표정으로 순진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네?”
“제발 버둥거리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더 자극되니까.”
뭐가 자극되는 건지 알 수가…….
순간 로엔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제야 제가 깔고 앉아 있던 게 뭔지 깨달아서다.
그리고 엉덩이 아래 있는 건, 그녀가 움찔거릴 때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단단해지며 그녀의 엉덩이를 꾹꾹 찔러 댔다.
“미, 미안해요. 거긴 줄 몰랐어요.”
로엔은 화들짝 놀라 몸을 세웠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은 그를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윽.”
진이 상처를 치료 받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어 내며 흠칫 몸을 떠는 게 보였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제발 얌전히 있어.”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위험스럽게 느껴졌다. 로엔은 몸을 굳힌 채, 그의 말처럼 꼼짝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엉덩이 아래 느껴지는 뜨겁고 단단한 것이 자꾸만 찔러 대는 바람에 본능적으로 뒤척이게 됐다.
“읏.”
진이 억눌린 신음을 뱉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기울어졌던 시야가 원래로 돌아왔다.
하지만 안도하는 것도 잠시, 로엔은 난처함에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진이 몸을 일으키자, 이번엔 그의 탄탄한 허벅다리를 타고 앉은 모양새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비켜 줬으면 하는데? 아님, 이 자세로 키스 말고 더한 걸 확인하고 싶다면 모를까.”
분명 농담조였지만, 그가 뿜어내는 열기로 봤을 때 절대 빈말 같지 않았다.
“아니에요. 비키려던 참이었어요.”
로엔이 재빨리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얼굴 가리개를 찾았다.
‘어디 있지? 분명 한 쪽 귀에 걸려 있었는데.’
로엔이 손으로 더듬어 얼굴 가리개를 찾았지만 잡히지 않았다.
“이제 눈을 떠도 될까?”
“아니요. 잠깐만요. 잠깐 기다려요.”
로엔이 다급하게 외치곤 서둘러 바닥을 확인했다. 그러다 진의 탄탄한 다리 아래 깔린 투명한 천을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눈은 뜨지 말고 다리만 살짝 들어 봐요.”
로엔의 요구에 진이 미간을 구겼다.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공작님이 제 얼굴 가리개를 깔고 앉아 있어서 그래요.”
“귀찮게.”
불퉁한 말투와는 달리 진은 순순히 한 쪽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됐나?”
“아니요, 그쪽 말고 반대쪽이에요.”
여지없이 진의 입매가 굳어지는 게 보였다. 이번엔 ‘화를 내려나?’라고 생각한 순간, 진은 이번에도 반대쪽 다리를 들어 올려 주었다.
재빨리 얼굴 가리개를 귀에 걸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제 됐으니 눈을 떠도 돼요.”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하아.’ 하고 긴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그리곤 지금껏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눈꺼풀 아래 숨겨져 있던 아름다운 은청색의 눈동자가 곧장 로엔을 향해 날아왔다.
두근.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흠, 흠.”
로엔은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고갤 돌렸다. 다행히 진 역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는 이만 가 보는 게 좋겠어요. 상처도 치료했고, 이제 곧 결승전이기도 하고. 너무 오래 자릴 비우면 라이칸이 찾을 수도 있거든요.”
횡설수설 말을 뱉어 내던 로엔은 진이 붙잡을세라 서둘러 막사를 빠져나갔다. 너무 서두른 나머지 진의 막사에 검은 베일을 놓고 왔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진은 서둘러 막사를 빠져나가는 로엔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지금은 굳이 잡지 않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녀 역시도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아프지 않는 걸 보니 효력이 있는 모양이야.”
진은 제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검은 베일을 발견하곤 천천히 들어 올렸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공평한 법이겠지?”
진은 검은 베일을 제 검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곤 잠시 후, 검술 시합장에서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막사를 빠져나왔다.
이제 지루하던 검술 시합을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결승전을 위해 막사를 나오던 진은 라이칸을 발견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여기에?’라는 의문이 떠오른 순간, 로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공작새의 눈물을 가지러 갔다고 하더니, 이제 돌아온 모양이다.
“네 주인이 보낸 모양이군. 하지만 어쩌지? 이제 필요 없는데.”
진이 더는 볼일 없다는 듯 지나쳐 가려 하자, 라이칸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공작님을 만나신 겁니까?”
진의 시선이 라이칸에게 향했다. 무심해 보이는 얼굴에 성급한 걱정이 들러붙어 있었다.
그 모습에 묘한 불쾌감이 일었다. 주군을 대하는 태도보다 좀 더 진득한 감정이 읽혀서다.
“알고 온 것 아니었나?”
“아닙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온 터라.”
라이칸의 대답에 진이 그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맞아.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다가 돌아갔지. 그러니 너는 어서 네 주인에게 돌아가 보는 게 좋아. 그리고 충고 하나 하자면, 네 주인에게서 떨어지지 마. 어떤 이유에서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요. 제 주인은 공작님이 아닌데 말입니다.”
라이칸이 지나친 간섭이라는 듯 삐딱하게 말했다. 그러자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차갑게 변하며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너는 네 주인인 록스버그 공작을 지켜야 하잖아. 내가 아니라.”
진이 라이칸의 손에 들려 있는 공작새의 눈물에 시선을 주었다. 그제야 라이칸은 진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렸다. 날이 서 있던 표정 역시 조금은 누그러졌다.
“지금 걱정하시는 겁니까?”
주어가 없는 말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지칭하는 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하면 안 되나?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데.”
“정략결혼입니다. 그것도 1년이란 기간이 주어진 관계죠.”
라이칸이 두 사람의 관계를 구분하듯 선을 그었다. 그 정도의 관계니, 더는 제 주인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확히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진은 삐딱하게 서선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오는 라이칸을 향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노선을 정확히 하라고 경고했다.
“1년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라이칸은 고민할 것 없다는 투로 여상하게 말했다. 제 주인은 이 결혼을 계약에 의한 철저한 사업적인 관계라고 했다. 그러니 저 역시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만 의무를 다하면 그만이었다.
“그럼 날 감시하는 것도 그만둬. 도둑고양이처럼 내 주위를 기웃거리는 건 딱 질색이니까.”
“그건 감시가 아니라…….”
“감시가 아니라, 보호라는 건가?”
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라이칸을 보았다. 입을 꾹 다무는 모습을 보며 긍정이라 여긴 듯했다.
“보호란 지키는 상대가 약할 때 가능한 말이지. 하지만 난 너보다 훨씬 강한 존재니, 보호는 필요가 없어. 그러니 괜한 일에 힘 빼지 말고 네 주인이나 지켜.”
진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라이칸을 남겨 두곤 걸어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라이칸은 주먹을 움켜쥐곤 멀어지는 진을 쏘아보았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진 로이슈덴은 강했다. 저는 물론 타란 대륙에서 그에게 맞설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의 말처럼 보호 따위 필요가 없었다.
“공작님은 저런 거만한 자가 뭐가 믿을 만하시다고 하는 건지.”
라이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거만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그리고 볼수록 기분 나빴다.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라이칸이 제 주인이 있는 관람석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진이 들고 있는 검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저건…….”
진의 검에 묶인 검은 천은 분명 제 주인이 흉터를 숨기려 쓰고 다니는 것이었다.
“왜 저기에 공작님의 것이 묶여 있는 거지?”
의아함도 잠시, 라이칸의 머릿속에 귀족들이 말했던 단어가 떠올랐다.
티핏.
‘설마 공작님이 저 거만한 자에게 주신 건가?’
라이칸은 진의 검에 묶인 채 검은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베일을 충격을 받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제 주인이 다른 레이디들처럼 마음에 품은 기사에게 하듯 티핏을 주다니.
라이칸은 불안해졌다. 제 주인이 저 거만한 사내에게 흔들려, 지금까지 쌓아 온 계획을 무너트릴까 걱정이 됐다.
라이칸은 불안함을 품고 서둘러 로엔이 있는 관람석으로 발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