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참기 힘들 만큼 아프군. 그리고 공작새의 눈물은 없어. 알렉도 챙겨 오지 않았고.”
진은 아예 가능성을 차단하듯 알렉까지 언급했다.
사실 유능한 집사인 알렉이라면, 로열 에스콧에서의 사건을 계기로 당연히 공작새의 눈물을 챙겼을 터였다. 하지만 로엔에게 그 사실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
로엔이 수긍하듯 고갤 끄덕였다.
“저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라이칸에게 공작새의 눈물을 가져오라고 했거든요. 곧 도착할 거예요.”
진의 음험한 속마음을 전혀 알 리 없는 로엔이 재빨리 그를 안심시켰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만큼 심하지 않아 다행이에요.”
상처 부위에 다시 깨끗한 천을 올려놓고는 옆에 있는 붕대로 상처 부위를 감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용병 기사 말이에요. 하드윅 백작이 고용했다는 그자요. 제 생각엔 폐하의 사림인 것 같아요. 아니면, 하드윅 백작이 폐하의 사람이 되었거나. 제가 조사한 바론 하드윅 백작과 폐하의 연결점이 없긴 한데, 아직 모르죠. 폐하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제 편으로 만드시는 분이니까요. 제 말 듣고 있나요?”
풀리지 않게 그의 몸에 붕대를 감느라 진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그의 어깨가 흠칫 굳어지는 걸 보고서야 고갤 들었다.
붕대를 감을 때, 너무 세게 묶은 걸까?
진이 말도 못 한 채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고통을 삼키는 것과 닮아 있어, 로엔은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손을 뗐다.
“많이 아픈가요? 어쩌죠? 당장 공작새의 눈물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제가 나가서 라이칸이 왔는지 보고 올게요.”
로엔은 당장에라도 막사를 나갈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다려.”
그 순간 진이 손을 뻗어 로엔의 팔을 붙잡곤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럴 것 없어. 공작새의 눈물 말고 다른 특효약을 알고 있거든.”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다른 특효약이라니. 공작새의 눈물 말고 다른 치료약이 있었나요?”
로엔이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진을 올려다보았다.
“맞아.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군. 그 특효약을 너도 갖고 있는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다른 특효약이라니. 공작새의 눈물 말고 다른 치료약이 있었나요?”
로엔이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진을 올려다보았다.
“맞아.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군. 그 특효약을 너도 갖고 있는지.”
진이 탐색하듯 로엔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덴 듯 따가웠다. 심장 역시 무섭게 뛰었다.
‘특효약이라니. 혹시 그게…….’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진이 말하는 특효약이 체액이라면, 그것을 가진 사람은 시모네타뿐이었다.
‘그런데 그걸 내가 갖고 있는지 확인한다는 건…… 설마?’
로엔은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최대한 담담하려 애썼다.
“내가 아는 사람이 내 고통을 잠재우는 데 키스가 특효약이라고 했거든.”
“아는 사람이요?”
“그래. 상인인데, 작은 만물상점을 운영하고 있지.”
로엔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진의 표정을 살폈다.
“그 상인이라는 사람이 공작님의 고통을 치료할 수 있는 특효약이 키스라고 했다는 거죠?”
“맞아. 그리고 알렉의 말로는, 그날 로열 에스콧에서 네가 나에게 키스를 했다고 하더군.”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한 로엔이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건 공작새의 눈물을 먹이기 위해서였어요. 다른 뜻이 아니라.”
“알렉도 같은 말을 했어. 그래서 더 확인해 보고 싶은 거야. 내 몸속에서 들끓던 드래건의 힘이 사라진 이유가 네가 먹인 공작새의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그 상인이 말했던 특효약 때문인지.”
“그야 당연히…….”
“공작새의 눈물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장담하지?”
“그거야……”
로엔이 난처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시모네타와 자신이 동일인이란 사실을 알지 못해 다행이긴 했지만, 그와 키스라니.
“내가 걱정돼서 온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죠. 그럼 제가 왜 왔겠어요?”
그의 질문에 새삼스럽게 제 행동이 떠올라 귓불이 붉어졌다. 그가 단검에 찔렸다고 앞뒤 살피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오다니. 생각해 보면 대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분명 치료가 끝나고 관람석으로 돌아가면 제가 어딜 다녀왔는지 모르는 이가 없을 터였다.
대놓고 티를 낸 꼴이었으니까.
“라이칸이 공작새의 눈물을 가지고 온다고 쳐도, 결승전이 시작되기 전에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는 거잖아.”
“그……렇죠. 하지만 곧 도착할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면…….”
“아파. 계속 참고 있긴 한데, 이젠 한계야. 그리고 다른 특효약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더는 참고 싶지도 않고.”
로엔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와 키스라니.
“저는…….”
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챈 듯 진이 손을 뻗어 왔다. 턱을 붙잡힌 채로 고갤 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 들었다.
로엔은 긴장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진득하게 따라붙는 그의 시선에 자꾸만 고갤 돌리고 싶었다.
“허락해 주겠어? 정말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래.”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세이렌의 유혹처럼 달콤했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이 들리는 듯했다.
“대신 눈 감아요. 제가 뜨라고 할 때까지 뜨면 안 돼요. 그것만 약속하면 허락할게요.”
미쳤다. 정말 미친 거야.
제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걸 알고 있다. 저를 삼킬 듯 내려다보고 있는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열기를 띠고 번뜩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냥감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맹수처럼 진득한 눈빛이었다.
“좋아. 네가 눈을 뜨라고 할 때까지 뜨지 않을게. 약속해.”
진이 턱을 붙잡았던 손을 내리곤 순순히 눈을 감는 게 보였다. 제 딴엔 약속을 지키겠다는 행동처럼 보여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얌전한 척 내숭이라니.’
진 로이슈덴에게 얌전함과 내숭이란 단어는 절대 어울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자 심장이 자꾸만 간질거렸다.
“뭐 해? 기다리고 있잖아.”
몇 분 기다리지도 않고선 성급함을 드러내는 진을 보며, 또 한 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로엔은 긴장감을 떨쳐 내기 위해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와 여러 번 키스한 경험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긴장이 되긴 처음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던 가리개의 한 쪽을 풀었다. 그러자 사라락 소릴 내며 얼굴을 가렸던 천이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눈 뜨면 안 돼요. 알죠?”
로엔이 눈을 감고 있는 진을 향해 다시 한 번 약속을 상기시켰다.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뜨라고 할 때까지 절대 뜨지 않을 테니까.”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로엔은 천천히 긴장을 누그러뜨리며 진의 모양 좋은 입술을 응시했다. 웃음기라곤 전혀 없는, 세상에서 가장 차가울 것 같은 입술이었다.
금욕적이란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입술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갖고 싶었다. 제가 가진 열기로 얼음처럼 차가운 입술을 녹이고 삼키고 싶었다.
‘이런 게 정복욕이란 건가?’
로엔은 새삼 깨달았다. 그가 특효약이란 말을 꺼낸 순간부터, 저 역시 그와 입을 맞추고 싶었다는 걸.
“이제 할게요.”
로엔이 양손을 뻗어 그의 뺨을 붙잡았다. 작은 접촉에도 불구하고 흠칫, 그의 어깨가 떨리는 가 싶더니 이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로엔은 다시 한 번 진이 눈을 감고 있는지 확인했다. 눈을 감은 채 얌전히 기다리는 그가 꼭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커다란 맹수 같아, 머릴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천천히 숨을 고른 뒤 로엔이 고갤 숙여 그의 입술에 천천히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소릴 내며 두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이제 됐나요?”
“지금 장난해?”
진이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불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풋,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화를 내는 와중에서도 착실하게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그럼…… 으흡!”
방심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팔이 로엔의 허리를 감아 왔다. 그리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갤 숙여 깊숙이 입술을 겹쳐 왔다.
“자, 잠깐만…… 흐음.”
당황한 로엔이 그를 밀어내기 위해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더욱 진득하게 몸을 부딪쳐 왔다. 입술 역시 허기진 맹수처럼 탐욕스럽게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짙은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로엔은 신음을 삼키며 밀어내기 위해 뻗었던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곤 그에게 매달리며 꼭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뜨거운 열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기분 좋은 나른함에 이곳이 어딘지도 잊을 정도였다. 촉촉하고 여린 살이 그에 의해 가차 없이 빨리자, 로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감겨들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두 사람의 입술이 농밀하게 얽혀 들었다.
로엔은 제 입술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열심히 집어삼키는 진의 키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네가 달려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날 걱정하다니.”
진득하게 얽혀 들던 입술을 떼곤, 진이 사랑스럽다는 듯 입술을 비벼 왔다. 그리곤 그녀의 눈에도 이마에도 입을 맞췄다.
“네가 와서 다행이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이 하나처럼 얽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