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공작님을 찌른 그 검, 로열 에스콧에서와 같은 종류예요. 확실해요.”
로엔이 사건의 심각성을 주지시키듯 그날의 일을 언급했다. 하지만 진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의 태도가 답답해 애가 타는 건 로엔뿐이었다.
“뭐 하고 계세요. 당장 가서 상처를 살펴야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정말 내가 다쳐서…….”
“네, 몇 번을 말해요.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없으니 얼른 막사로 가요. 그런데 공작새의 눈물은 있나요?”
말끄러미 쳐다만 보고 서 있는 진이 답답해, 로엔이 그를 채근했다.
“그래. 가야지. 상처가 났으면 치료를 해야 하니까.”
말을 처음 배운 아이처럼 어색하게 말하는 진이 이상했지만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려고 했다.
“빨리 가요.”
로엔은 목석처럼 서 있는 진의 팔을 붙잡고는 막사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나무에 기대서 있던 그가 로엔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쪽이야.”
거기다 방향을 잘못 잡은 로엔에게 길까지 알려 줬다.
“진즉 말해 주면 좋잖아요.”
로엔은 그가 알려 준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을 놓았다간 다시 걸음을 멈출 것 같아 힘까지 주었다. 잡힌 손이 흠칫 떨리는 것 같더니, 이내 걸음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뭐 해요? 빨리 좀 걸어요.”
“…….”
진은 앞서 걸어가는 로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얼굴을 가린 검은 베일이 바람에 흔들렸다.
‘잘 보이나? 저러다 넘어질 텐데.’
진은 지난번 가든파티에서처럼 품에 안고 걸어야 하나 생각했다. 다행히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두 사람은 막사 앞에 도착했다.
“주인님, 어디 가셨다가 이제 오시는……. 어, 공작님은 또 어떻게?”
로엔이 진의 손을 잡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서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알렉이 두 사람을 맞았다.
알렉은 로엔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놀랐지만, 두 사람이 손까지 잡고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됐으니까, 잠깐 나가 있어.”
로엔이 알렉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제 손을 놓았다. 고작 1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온기가 사라지자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럼 전 나가 있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제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렉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막사를 나갔다. 막사 안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로엔은 안으로 들어가 약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뭘 찾는 거지?”
“알렉이 약상자를 준비해 뒀을 거예요.”
“아, 그렇지. 내가 다쳤었지?”
진이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듯 낮게 읊조렸다.
로엔은 약상자를 찾으며 고갤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책상 아래 놓여 있던 상자를 발견하곤 서둘러 허릴 숙였다.
“이쪽으로 와 앉으세요. 옷도 벗으시고요.”
상자를 연 로엔은 붕대와 상처를 소독하는 약을 꺼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고 준비를 하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고갤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이 꼼짝도 않고 저만 바라보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오늘 정말 이상하네. 뭐 하시는 건데요? 얼른 오지 않고.”
진은 그제야 로엔이 말한 간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다음 명령에 대기하는 병사처럼 얌전히 기다렸다.
“옷도 벗으세요.”
“베일을 먼저 벗는 게 좋겠어.”
“네?”
그의 엉뚱한 요구에 로엔이 인상을 썼다.
“벗어야 네가 누군지 확인을 할 것 아냐. 그래야 내 상처를 보여 줘도 되는지 확인할 수 있을 테고.”
의심은 많아서는.
“지금 내가 록스버그 공작인지, 아닌지 확인하겠다는 말인가요?”
“맞아.”
정말 어이가 없었다. 에드워드와 함께 있는 저를 발견하고 손까지 붙잡아 끌고 올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록스버그 공작인지 아닌지 확인한다니.
“정말 내가 누군지 몰라 확인하려는 건 아니죠?”
“짐작만으로 내 몸을 보여 줄 수는 없잖아. 그러니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밖에.”
제 딴엔 부상을 당한 그가 걱정이 돼서 정신없이 왔건만. 얼굴을 확인하기 전까지 상처를 보여 주지 않겠다니.
정말 배알이 꼴렸지만, 결승 시합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대신 거칠게 검은 베일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자, 이제 됐죠? 이제 상처 좀 보여 줘요. 치료 좀 하게.”
진의 시선이 로엔의 얼굴을 핥듯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얼굴 가리개를 했는데도 그의 시선이 너무도 강렬해 벌거벗은 느낌마저 들었다.
“단추요.”
단추라는 말에 진이 손을 뻗어 검무복의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로엔은 혀로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단추를 푸는 것을 지켜보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읏!”
“왜요? 아프세요?”
단추를 풀다 상처가 눌렸는지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솜에 소독약을 묻힌 채 기다리고 있던 로엔이 책상 위에 솜을 내려놓고는 상처를 살피기 위해 고갤 숙였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 때문인지 숲을 닮은 그의 체향이 콧속으로 스몄다.
“답답할 텐데, 그것도 벗지 그래?”
슬쩍 고갤 들자 진의 시선이 로엔이 쓰고 있는 얼굴 가리개에 닿아 있었다.
“이건 안 돼요. 흉측한 상처를 가려 놓은 거라 벗으면 불쾌하실 거예요.”
로엔의 대답에 진이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지난번에도 상관없다고 한 것 같은데.”
“그거야 공작님 사정이고요. 제가 불편해요.”
로엔이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의 입꼬리가 냉소로 비틀렸다.
“허리를 세워 보세요. 상처 좀 자세히 보게요.”
로엔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진은 허리를 세우기는커녕 단추를 풀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네가 벗겨 줘. 아파서 꼼짝도 못 하겠어.”
어디서 꾀병을 부리려고.
로엔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장난치지 마세요.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것 다 아니까.”
“그건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지 않기 위해 참은 거고. 이젠 너와 나밖에 없으니 참을 필요가 없잖아.”
로엔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폈다. 정말 아파서 이러는 건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진짜 아파. 그러니 네가 해 줘.”
다른 사람이었다면 꾀병이라고 여기고 무시했을 터였다. 하지만 진 로이슈덴이 꾀병을 부릴 리 없었다. 특히 제 앞에서.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쩔 수 없이 고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으니 가까이 와 보세요. 몸도 이쪽으로 돌리고요.”
명령대로 진이 순순히 다가앉자, 로엔이 손을 뻗어 검무복의 단추를 마저 풀었다. 그가 단추를 푸는 모습을 지켜볼 때도 그랬지만, 그의 옷을 직접 벗기자니 괜스레 긴장이 됐다.
“그만 쳐다봐요.”
“싫은데.”
로엔이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고갤 들자,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웬 심술을 부리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혹시 저에게 화난 거라도 있으세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군. 화를 낼 만큼 우리가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말이야.”
진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삐딱하게 말했다.
“바로 지금 그 태도 때문이잖아요. 공작님 말씀처럼 친한 사이도 아닌데, 계속해서 화났다고 시위를 하고 계시니까요.”
로엔의 지적에 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말해 보세요. 오해는 풀어야 할 것 아니에요.”
단추를 마저 푼 로엔이 천천히 검무복을 옆으로 밀어 벌렸다. 그러자 단검에 베인 상처가 보였다. 흘러내린 피가 드래건의 비늘에 엉겨 붙어 있어, 먼저 피를 닦아 내야 할 것 같았다.
“캐슬리우스 백작과 무슨 이야기를 했지? 곁에 사람이 온 줄도 모르고 얘길 하고 있던데. 설마 고백이라도 받은 건가?”
“고백은 무슨. 흰소리 그만하시고 피나 닦게 가슴을 제 쪽으로 내밀어 보세요.”
로엔이 책상 위에 놓아둔 솜을 집어 드는 사이, 진이 또다시 성급하게 물어 왔다.
“그러니까 고백은 아니란 거지?”
“당연히 아니죠. 딱 한 번 본 게 단데, 고백은 무슨.”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묘한 눈빛으로 진을 바라보았다.
“지난번부터 굉장히 궁금했는데요. 혹시 공작님, 백작님을 질투하시는 건 아니죠?”
순간 진의 어깨가 굳어졌다.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에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하지만 정작 로엔은 소독약이 묻은 솜으로 진의 상처 주위의 피를 닦아 내느라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읏.”
“죄송해요. 조심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로엔은 재빨리 변명을 하곤 마저 피를 닦아 냈다.
단검에 찢긴 드래건의 비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난번 상처와 새로 생긴 생채기가 더 해져, 보기만 해도 아플 것 같았다.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본능적으로 바람까지 ‘후후.’ 불어 가며 상처를 소독했다.
“다행히 단검에 독은 묻어 있지 않았네요. 공작새의 눈물만 먹으면 되겠어요.”
소독한 상처에 지혈제를 뿌린 뒤 깨끗한 천으로 상처를 덮었다.
“윽!”
“미안해요. 이제 조금만 하면 끝나니까…….”
진이 신음을 뱉어 내자, 로엔이 놀라 고갤 들었다. 그러다 인상을 잔뜩 쓴 진과 눈이 마주쳤다.
“많이 아픈가요?”
지난번과는 달리 유독 아파하는 진의 반응에 로엔은 저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진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는 진은 마치 얌전한 강아지 같았다.
‘아니다, 길들여진 맹수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순해 보이는 게, 왠지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