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아, 캐슬리우스 백작님.”
“네, 접니다.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로엔이 안도하며 에드워드를 보자, 그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저는 괜찮아요. 서두르다 앞에 사람이 있는 걸 보지 못했어요.”
“그러셨군요. 급하신 모양인데, 가는 곳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이곳은 공작님께서 오실 만한 곳이 못 돼서.”
에드워드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갤 돌리자, 막사 주변엔 험상궂은 인상의 기사들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로엔을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레이디의 등장에 휘파람을 부는 자도 있었다.
“아니에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으니까요.”
로엔이 귀찮은 기색을 숨기며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는 중에도 로엔의 시선은 로이슈덴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에드워드도 로엔이 어딜 가려는 것인지 눈치챈 모양이다.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갈무리하곤, 본연의 정중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혹시 로이슈덴 공작가의 막사를 찾으시는 것이라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로이슈덴 공작가의 막사는 이곳과는 조금 외떨어진 곳에 있어서 찾는 게 쉽지 않으실 겁니다.”
에드워드의 제안에 망설이던 로엔은 결국 고갤 끄덕였다. 진의 막사를 찾아다니느라 시간 낭비를 하느니, 에드워드의 도움을 받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부탁할게요.”
로엔의 대답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에드워드가 안도하는 게 보였다. 입가에도 미세했지만 웃음기가 머물렀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에드워드가 앞장서자, 로엔은 제게 따라붙는 기사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갔을까? 말없이 걷던 에드워드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묻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네요.”
“무슨 일 때문에 로이슈덴 공작가의 막사를 찾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공작님이 시합 도중에 다치셔서요. 비겁하게 방심한 사이에 뒤통수를 치다니. 정말 화가 나서 죽을 뻔했다니까요.”
“공작님이 다치셨습니까?”
에드워드가 금시초문이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르셨어요? 피를 흘리고 시합장을 빠져나가셨는데.”
로엔이 의외라는 듯 에드워드를 보았다.
“몰랐습니다. 사실이라면 걱정이군요. 하지만 조금 전 제가 봤을 땐, 특별히 다치신 것 같진 않았는데…….”
에드워드가 고갤 갸웃하며 이상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거야 남들 앞에선 아픈 티를 내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로열 에스콧에서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신음 한 번 안 내셨어요. 저택으로 돌아가 치료를 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지만요.”
“전쟁터에서도 그러셨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요.”
“공작님은 로이슈덴 공작님에 대해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걸 알지 않을까요? 결혼할 생각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겠군요. 제가 당연한 것을 물었네요.”
에드워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캐슬리우스 백작님에게도 곧 그런 상대가 나타나겠죠. 워낙 레이디들에게 인기가 많으신 분이니까요.”
“저는 그럴 것 같지 않네요. 저는 항상 타이밍이 늦는 편이라.”
로엔은 에드워드의 얼굴에 떠오른 안타까움을 애써 무시했다. 그가 제게 어떤 감정을 느끼든, 그건 제 몫이 아니었다. 그가 갈무리하고 책임져야 할 감정일 뿐.
“결승전에 올라가면 로이슈덴 공작님과 겨루게 될 겁니다.”
“알고 있어요. 응원은 못 할 것 같군요.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로엔이 건성으로 대답하곤 고갤 돌려 주위를 살폈다. 한참이나 왔는데도 로이슈덴 공작가의 막사가 보이지 않았다.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긴 한데, 만약에 제가 결승전에서 우승을 하게 되면 말입니다.”
주위를 살피던 로엔의 시선이 어느새 앞에 서 있는 에드워드에게 닿아 있었다.
“아니요. 우승은 로이슈덴 공작님이 하실 거예요.”
로엔은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순간 에드워드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 역시 진 로이슈덴과의 실력 차를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쉽게 우승을 하진 못하실 겁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해요. 백작님의 실력도 뛰어나시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럼 만약에 제가…….”
로엔의 칭찬에 어둡던 에드워드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하지만 우승은 로이슈덴 공작님이 하실 거예요.”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던 에드워드가 로엔의 단호함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검은 베일을 쓴 로엔을 응시했다.
가까운 거리 때문인지 베일 안에서 그를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보였다. 딱 한 번 본 게 다인데, 내내 펨부르크 호수를 닮은 그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부럽네요. 그리고 아쉽기도 하고. 만약에 로이슈덴 공작님보다 제가 먼저 공작님을 만났다면…….”
“아니요. 백작님을 먼저 만났다고 하더라도, 저는 공작님을 택했을 거예요. 제가 원하는 걸 가지신 분은 로이슈덴 공작님뿐이거든요.”
가능성을 차단하듯 로엔이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정말 끼어들 틈도 주지 않는 로엔의 태도에 에드워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작은 여지도 주지 않는군요.”
“오래 겪어 보진 않았지만 백작님은 좋은 분이세요.”
에드윈의 사람만 아니라면 정말 욕심날 정도였다.
“그러니 다른 사적인 감정으로 얽히고 싶지 않군요. 하지만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그때 말씀드렸던 약속은 아직 유효하니까.”
에드워드 역시 캠벨 후작가의 숲에서 로엔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잊어 주십시오. 제가 공작님을 찾게 된다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일 테니까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에드워드의 푸른 눈동자가 복잡한 감정을 담고 로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난처했다. 괴물 공작을 짝사랑하는 상대를 만나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백작님, 저는…….”
로엔이 에드워드에게 뭔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록스버그 공작,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에드워드에게 향해 있던 시선이 어느새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검무복을 입고 서늘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진을 발견하자마자, 베일 안에서 로엔의 입가가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눈빛 역시 기쁨으로 반짝였다.
“여기서 뭘 하는지 물었다. 그것도 다른 사내와 함께 말이야.”
뒤이어 들려온 음산한 목소리에 로엔이 재빨리 고갤 가로저었다.
“아무것도요. 지금 공작님께 가던 길이었어요.”
“나에게 오려던 것치곤,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닌가?”
삐딱하게 치켜든 턱이 묘하게 거만해 보였다. 로엔과 에드워드를 번갈아 보는 그의 눈빛 역시 냉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서늘한 태도에 뭐든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요. 길은 잃은 게 아니라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었어요. 캐슬리우스 백작님이 친절하게 길을 알려 주셨고요. 감사했어요, 백작님. 이제 공작님을 찾았으니 그만 가 볼게요.”
로엔이 에드워드를 향해 인사를 건넨 뒤, 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록스버그 공작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할 말이…….”
다급했는지 에드워드가 로엔의 팔을 붙잡았다.
“백작님, 무슨…… 어엇?”
로엔이 에드워드를 돌아보려는 순간, 진이 로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로엔의 팔에 닿았던 에드워드의 손을 거칠게 떼어 냈다.
“어디에 손을 대는지 모르겠군, 캐슬리우스 백작.”
“그것이 아니라…….”
당황한 에드워드는 난처한 듯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확실히 하는 게 좋겠군. 캐슬리우스 백작, 난 내 것을 탐하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잘 기억하는 게 좋을 거야.”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로엔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 무감하던 은청색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뜩이며 에드워드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로엔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시합장에서 있어야 할 결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질 것 같았다.
“공작님, 어서 가요. 네?”
로엔이 초조한 듯 진의 손을 붙잡곤 막사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제야 에드워드에게서 눈을 뗀 진이 로엔을 내려다보았다.
“가요. 다치셨잖아요.”
진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매달리는 로엔의 태도가 싫지 않은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따라와.”
진은 로엔의 손을 단단히 움켜쥐고는 에드워드를 지나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시합장 근처의 숲이었다. 인적이 없어 우선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그가 데려온 곳이 그의 막사가 아니라 의외였다.
“막사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로엔이 주위를 살피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진은 그녀의 말엔 관심도 없는 듯 굳은 얼굴이었다.
“여긴 왜 온 거지? 레이디가 호위도 없이 이런 곳에 오다니. 아무리 너라도 위험하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건조한 말투 속에 담긴 감정은 분명 걱정이었다. 로엔은 그가 왜 그런 걱정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오히려 여기가 더 안전해요. 귀족들 틈에 섞여 있는 것보다는.”
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로엔의 검술 실력이 뛰어난 점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지만, 로엔은 암살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우선 막사로 가요. 여기선 확인해 볼 수도 없잖아요.”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로엔이 입을 열수록 진은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뭘 확인해 본다는 건지 모르겠군.”
“뭘 확인하긴요. 당연히 상처죠. 조금 전에 단검에 찔렸잖아요. 피도 났고.”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로엔이 진의 가슴을 응시했다. 검은색의 검무복이 단검에 찢겨 있었고, 그 주위는 진득한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 상처를 살피기 위해 날 찾으러 왔다는 건가?”
“당연하죠. 그럼 제가 왜 공작님을 찾아 막사까지 왔겠어요?”
로엔이 어이가 없다는 듯 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진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공작님을 찌른 그 검, 로열 에스콧에서와 같은 종류예요. 확실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