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챙, 채챙―.
두 개의 검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에 로엔은 긴 상념에서 깨어나 시합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검을 든 금발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은 에드워드 캐슬리우스였다.
‘우승 후보라고 하더니, 거짓은 아니었나 보네.’
지금까지 본선에 진출했던 기사들의 대부분이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형태였다면, 에드워드는 확실히 화려한 검술로 승부하는 기사였다.
챙―!
또다시 검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시합이 막바지로 치닫는지, 에드워드의 검이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헉, 헉.”
에드워드의 공격을 받은 상대가 거친 숨을 내쉬며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뒷걸음을 쳤다. 그러나 이내 균형을 잃고는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에드워드가 넘어진 기사에게 다가가 목에 검을 겨눴다. 승부의 끝이었다.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님이 결승전에 진출하셨습니다.”
시종의 선언에 숨죽인 채 시합을 관전하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에드워드는 들고 있던 검을 갈무리하곤, 황제가 있는 특별관람석을 향해 허릴 숙였다.
“잘 됐네.”
고갤 들어 에드워드 쪽을 보는데, 그가 눈을 마주쳐 왔다. 그리고 그 순간 믿기지 않게도 에드워드가 로엔을 향해 고갤 숙여 왔다.
‘설마 나에게 알은체를 한 건 아니겠지?’
뜻밖의 행동에 로엔은 베일 너머로 의아한 듯 에드워드의 응시했다. 캠벨가의 가든파티에서 한 번 본 게 다인데, 인사까지 해 오다니. 당황스러웠다.
“어머, 지금 캐슬리우스 백작님이 이쪽을 보고 인사한 것 맞죠?”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갤 돌리자, 캐서린 캔싱턴 옆에 앉아서 시합을 관람하던 제인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분명해요. 저도 똑똑히 보았거든요. 그럼 우리 중 누군가에게 마음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선 저렇게 수줍게 웃을 리 없잖아요.”
제인의 말에 반응한 건 옆에 앉아 있던 에밀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에드워드에게 고백이라도 받은 듯 한껏 들떠 있었다.
“누굴까요? 정말 궁금하네요.”
“당연히 레이디 캐서린이시겠죠.”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듯 제인이 에밀리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엔 ‘너는 아니니, 꿈 깨.’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일 수도 있…….”
“걱정 말아요. 절대 레이디 에밀리는 아닐 테니까.”
제인이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부정하곤, 캐서린 쪽으로 고갤 돌렸다.
“레이디 캐서린은 어떠세요? 만약에 캐슬리우스 백작님이 우승하셔서 ‘승자의 예’를 표하신다면, 받아 주실 건가요?”
제인은 캐서린이 티핏을 준비해 온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럴 마음 없어요. 어차피 우승은 다른 분이 하실 것이고요.”
캐서린이 정색을 하며 제인을 쏘아보았다.
“아니, 저도 당연히 로이슈덴 공작님이 우승할 것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분은 지금 다른 분과 약혼하신다는 소문이…….”
“지금 그 헛소문을 믿는다는 건가요?”
캐서린의 뾰족한 목소리에 제인과 에밀리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 망설임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캐서린은 불쾌한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고갤 휙 돌려 로엔을 쏘아보았다.
졸지에 캐서린의 원망 어린 시선을 받게 된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다 살다 사교계의 꽃의 질투와 시기를 받게 되다니.
그 순간, ‘와아아!’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고갤 돌리자 진 로이슈덴이 검을 들고 시합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때마침 시합장 밖으로 나가던 에드워드가 진과 눈이 마주치자 허릴 숙였다. 하지만 진은 에드워드에겐 관심조차 없는 듯 무심한 얼굴로 지나칠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묘한 분위기에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덩달아 긴장했다.
어느새 사람들의 관심은 에드워드가 아니라, 진 로이슈덴에게 쏠려 있었다.
“로이슈덴 공작님과 시합할 가문이 하드윅 백작가군요.”
“설마 조금 전 상대를 죽이려 들던 그 용병 기사를 말하는 건 아닐 테죠?”
“왜 아니겠어요? 하드윅 백작가에서 두 명의 용병 기사를 고용하지 않은 이상, 로이슈덴 공작님이 상대해야 할 기사는 그자가 맞는다는 거죠.”
“이러다 정말 누구 하나 죽어 나가는 건 아니겠죠?”
남자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그런데 소문에 하드윅 백작가의 재정이 바닥이라고 하던데, 용케도 저런 용병을 구했네요. 저 정도 실력이면 어마어마한 돈을 요구했을 텐데 말이에요.”
“뭐, 상금을 타면 반반씩 나누기로 했겠죠. 거기다 이번 시합에선 특별히 폐하께서 승자에게 주는 특권이 있잖아요. 만약 상금을 하드윅 백작이 다 꿀꺽한다고 해도, 용병 기사에게도 손해는 아닐 테니 말이에요.”
“그렇겠군요. 우승만 한다면야.”
때마침 용병 기사가 시합장 안으로 들어왔다. 앞선 시합에서 튄 피를 닦지도 않았는지 용병 기사의 옷과 손엔 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 모습에 관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역한 피 냄새가 확 끼쳐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로이슈덴 공작님이라도 이번 시합에선 고전하지 않을까요?”
“에이, 설마 그런 일이…….”
하지만 대답을 하던 사람도 장담할 수 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용병 기사의 잔혹함이 떠오른 모양이다.
“그런데 폐하께서 왜 아무런 말씀도 없으실까요?”
귀족이 슬쩍 특별관람석 쪽을 보았다. 그리곤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작게 속삭였다.
“그래도 로이슈덴 공작님과는 사촌지간이니 뭔가 조치를……”
“눈치 없기는. 원래 혈족이 더 잔인한 법이죠. 그러니 입도 뻥긋 말고 구경이나 해요. 폐하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으면.”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잦아들자 로엔도 몸을 바로 했다. 귀족들도 진 로이슈덴과 황제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네요. 로이슈덴 공작님도 이쪽을 보고 계시는 걸 보면.”
에밀리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레이디들의 시선이 일제히 로엔에게 향했다.
다들 ‘설마?’ 하는 표정이었다.
그제야 얼마 전 캠벨 후작가의 가든파티에서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이 참석했고, 진 로이슈덴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는 소문도 함께 생각난 눈치였다.
로엔은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태연하게 받아 내며 허릴 곧게 폈다.
‘이제야 레이디들의 공공의 적이 된 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모양새라 몹시도 만족스러웠다.
“레이디 캐서린, 괜찮으신가요?”
제인이 창백해진 캐서린을 보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괜찮으니 호들갑 좀 그만 떨어요.”
캐서린이 제게 향한 레이디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불쾌감을 드러냈다.
“죄송해요, 레이디 캐서린. 저는 그냥 걱정이 돼서.”
제인의 말에 캐서린은 입을 꾹 다물곤 뒤에 앉은 로엔을 쏘아보았다.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진 로이슈덴의 관심은 물론 에드워드 캐슬리우스의 시선까지 로엔에게 향해 있었다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한 눈치였다.
로엔은 베일 안에서 픽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진 로이슈덴도 의외로 뻔뻔한 구석이 있었잖아.’
아직도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 진을 보며, 로엔은 심장 부근을 손으로 눌렀다. 혈독화가 새겨진 곳이 자꾸만 간질거렸다.
“시합을 시작하라.”
낮게 가라앉은 에드윈의 목소리에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내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 시합을 알리는 깃발을 들어 올렸다.
진은 무심한 표정으로 마주 선 하드윅의 용병 기사를 응시했다.
거친 숨을 내쉬는 용병에게선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그리고 피 냄새에 섞인 역한 풀 향 역시도.
익숙한 향이었다. 전쟁터에서 적국의 기사들에게서 나던 향과 비슷했던 것이다.
‘게르피온에서 온 기사였나?’
전쟁은 끝났지만 진 로이슈덴에게 원한을 품은 적국의 기사들은 많았다. 아마 그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용병 기사를 바라보는 진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검을 쥐자 몸속에 잠들어 있던 드래건의 힘이 꿈틀거렸다. 살육을 원하는 잔혹한 힘이었다.
‘꺼져. 네 차례는 아직 아니니까.’
진은 단숨에 드래건의 힘을 제압한 뒤 달려드는 용병 기사를 향해 검을 들었다.
* * *
‘이런, 미친.’
황제가 또다시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관람석을 나온 로엔은 어두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분노를 삼켰다.
로엔은 조금 전 검술 시합에서 진을 공격했던 하드윅 백작가의 용병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을 떠올렸다.
품속에 단검을 숨기고 들어온 용병 기사는 졌다는 신호를 보낸 뒤, 방심한 채 서 있던 진을 비겁하게 공격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단검은 분명 로열 에스콧에서 진을 공격했던 화살촉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만년설을 제련해 주술을 건 검은 이번에도 진의 심장 부근에 돋아난 드래건의 비늘을 찢어 놓았을 터였다.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어.’
초조하게 건물을 빠져나오며 로엔은 아주 잠깐 라이칸이 돌아올 때까지 자릴 뜨지 않겠다는 약속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를 멈춰 서게 할 순 없었다. 단검에 찔린 순간 붉은 피를 흘리던 진의 모습이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서 가서 그의 상처를 살펴야 했다.
‘그런데 하드윅 백작이 언제부터 황제 편에 선 거지?’
그녀가 아는 한 에드윈의 측근 중에 하드윅 백작은 없었다. 로엔은 최대한 빨리 랑케의 벤투스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등 뒤로 따라붙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막사들이 몰려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로이슈덴가의 막사가 어디 있는지 확인해 둘 걸 그랬다.
“분명 여기쯤 로이슈덴 공작가의 막사가 있을 텐데.”
로엔은 밀려드는 인파를 거침없이 헤치고 나아갔다. 얼굴을 가린 베일이 앞을 가려 방해가 됐지만 속도를 줄이진 않았다.
빠르게 걷던 로엔은 뒤돌아 서 있던 사내를 피하지 못하고 부딪혔다.
“읏, 죄송합니다.”
로엔이 재빨리 몸을 바로 하며 사과했다. 그러자 상대 역시 놀란 듯 움찔하더니 이내 말을 건네 왔다.
“괜찮으십니까, 공작님?”
낯익은 목소리에 로엔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에드워드 캐슬리우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