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무슨 뜻이지? 귀족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는 건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분노가 담겨 있었다. 당장에라도 로엔을 괴롭힌 자들의 목을 검으로 내려칠 기세였다.
“폐하셨습니다. 귀족들은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고요.”
알렉이 로엔을 괴롭힌 악의 축의 정점이 에드윈이라고 고자질을 했다.
“폐하였다고?”
“네. 제가 들은 마지막 말은 ‘록스버그 공작. 앞으로도 그런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홀로 아름답게 서 있길 바란다. 누구의 옆이 아니라 고고하게 혼자서.’였습니다.”
알렉은 로엔에게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대로 말했다. 다시 생각해도 황제만 아니라면 제가 나서서 감쌌을 터였다.
“결혼을 반대하겠다는 뜻이군.”
“황제 폐하라도 귀족가의 결혼을 반대할 권리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귀족들이 황제의 뜻에 동참하게 될 것이란 거지. 그렇게 되면 우리 두 가문은 귀족들 사이에서 고립될 테고.”
결혼 한 번으로, 황제를 포함해 아드리안 제국의 귀족들을 모두 적으로 돌릴 판이었다.
“공작은 어땠지? 당연히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당하고 있었겠지?”
“아니요. 저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강단 있고 자신만만하시던지. 오히려 폐하께서 입도 뻥긋 못 하셨습니다.”
진이 의구심이 가득 찬 표정으로 알렉을 보았다. 믿지 않는 눈치였다.
“사실입니다. 폐하께서 공작님에게 혼자 고고히 있으라며 어깃장을 놓기 전에 공작님이 귀족들 앞에서 폐하를 한 방 거하게 먹이셨거든요. 그 모습을 주인님께서도 보셨어야 했는데. 제가 다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라 울컥했다니까요.”
정말 제가 칭찬이라도 받은 표정이었다. 진은 그 모습에서 어이가 없어 해야 맞았지만, 안심이 됐다.
“그 사고를 겪고도 당당히 살아남았으니 강하겠지.”
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최근 록스버그 공작가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면서, 10년 동안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운명이 얼마나 가혹하고 위험천만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부모를 잃고 상처까지 입은 아이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니.’
그들에 대한 분노로 욕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한편으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을 로엔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속이 쓰렸다,
“정말 대단해. 두려웠을 텐데 도망치지 않다니.”
로엔의 용기 있는 삶에 비해 제 삶은 도망치고 원망하는 것밖엔 없었다.
처음엔 아버지가 저지른 반역죄를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필사적이었고, 성년이 된 후 드래건의 힘이 제 몸속에서 각성했을 땐 도망치듯 전쟁터로 향했다.
정복전쟁에 큰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몸속에서 날뛰는 드래건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필사적이었을 뿐이었다.
정복전쟁의 승리는 뜻하지 않은 성과였다.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불로소득.
내 것이 아닌 승리.
진이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알렉을 돌아보았다.
“나와 결승전에서 만나게 될 기사가 누구라고?”
“공작님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님이거든요. 세이지 님 말씀으론 꽤나 실력이 있다고…….”
“있지. 하지만 나보단 아니야.”
거만하기까지 한 말투였지만, 진 로이슈덴이 말하자 그 말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알렉은 평소보다 날을 세운 진의 서늘한 목소리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차가운 눈매며, 삐딱하게 올라간 입꼬리까지.
목소리만큼이나 얼굴에 불쾌감이 묻어 있었다.
“당연히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주인님의 실력을 의심한 적도 없고요.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시끄러우니까 그 입 좀 다물어.”
진이 눈살을 찌푸리자 알렉이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진의 눈치를 살피는 건 여전했다.
진은 알렉이 대체 뭘 오해했기에 저런 변명을 늘어놓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록스버그 공작도 알고 있나? 내가 캐슬리우스와 결승전에서 맞붙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말이야.”
“그것이라면 당연히 알고 계십니다. 제가 말씀드렸거든요.”
“뭐라고 했는데?”
“네? 그야 당연히…….”
별생각 없이 말을 하려던 알렉이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다.
알렉은 제 주인의 서슬에 움찔 몸을 떨며 마른침까지 삼켰다.
‘갑자기 왜 이러시지? 내가 또 뭔가 실수라도 한 건가?’
순식간에 변한 제 주인의 눈빛은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보여 오금이 저렸다.
알렉은 두려움에 떨며 제 주인의 행동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그러다 유독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설마 캐슬리우스 백작님의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는 내 말에 기분이 상하신 건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살짝 초점이 어긋난 직감에도 불구하고 알렉의 변명은 진이 듣고 싶은 말을 정확히 집어냈다.
“록스버그 공작님께서는 공작님의 실력은 타란 대륙 최고라고,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제야 냉기가 풀풀 날리던 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단 거지?”
무심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뭔가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네,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주인님이 우승하실 것이라 여기시는 듯했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기대에 부응을 하는 수밖에 없겠군.”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입술 새로 비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아주 순간이었지만, 알렉에게는 제 주인의 모습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화려한 날개를 펼치는 수컷 공작새와 겹쳐 보였다.
믿기 힘들어 눈을 비비며 다시 확인하려 했을 땐, 진은 이미 막사를 나가기 위해 등을 돌린 뒤였다.
“우승할 생각은 없었는데, 꼭 해야겠군.”
막사의 무거운 천이 펄럭였다. 순식간에 혼자 남겨진 알렉은 조금 전 제 주인이 했던 말을 곱씹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주인님이 록스버그 공작님을 위해 우승하시겠다는 거지?”
알렉은 얼떨떨했다. 그가 아는 진 로이슈덴은 절대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여인에게는 잔인할 만큼 냉정했다.
그랬던 그가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바꿨다. 아니, 그 말에 휘둘리며 행동하기에 이르렀다.
“혹시 주인님이 공작님을…….”
그것밖엔 진의 변화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에게 보인 반응 역시 이상했다. 처음엔 검술 실력을 칭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치곤 너무 감정적이었다.
“설마 질투라도 하신 건가?”
알렉은 제가 뱉어 낸 말에 놀라 숨을 삼켰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진 로이슈덴이 질투라니.
사실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질투 대상이 시모네타가 아니라 록스버그 공작이라니. 아무리 결혼식이 한 달 후라고 해도, 제 주인의 성격상 이렇게 짧은 순간 마음이 변할…….
“아니지. 남녀 사이야 하룻밤에도 역사가 이루어지는 법인데. 두 분께도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잖아.”
의구심이 자꾸 고갤 들려했지만, 알렉은 애써 무시했다. 뭐가 됐든 제 주인이 변했다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좋은 방향으로.
알렉의 눈동자가 기쁨으로 일렁였다. 순식간에 차오른 습기를 손등으로 닦아 내곤 서둘러 진을 따라 막사를 나갔다.
* * *
본선 시합은 막무가내로 행해진 예선전과는 달리, 긴장감이 흘렀다. 본선 시합이 시작된 이후 매 시합마다 부상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관람석에서 ‘이러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는 건 시간문제.’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흘러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그 어느 때보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시합을 관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우승 상금 때문인가?”
예년보다 과격해진 시합의 양태를 두고 그렇게 추측하며 그저 제 가문의 기사가 죽지 않고 무사히 시합을 치르길 바랄 뿐이었다.
로엔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드윈을 응시했다. 옆에 앉은 그리젤라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선 평소와 다른 점을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로엔은 고갤 돌려 라이칸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보니 몇몇 귀족가를 제외하곤 본선에 진출한 기사들이 낯설었다. 대부분이 검술 시합을 앞두고 고용한 용병 기사인 모양이었다.
‘승자의 특권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 필사적인 건지.’
로엔은 앞선 시합에서 상대방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이던 기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드윅 백작가의 용병 기사였다.
욕심 많은 하드윅 백작도 이번 시합에서 우승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한 모양이었다.
‘하필 진 로이슈덴과 다음 시합에서 맞붙을 게 뭐람.’
로엔은 상대가 싸울 의지를 상실한 채 바닥에 넘어져 있는데도 잔인하게 다리에 검을 박아 넣던 용병 기사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주어가 없는 생각의 주인은 당연히 진 로이슈덴이었다.